[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지창
투표나 공적 임명이 필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과거 친일 행위는 비교적 쉽게 노출되고 비판도 많이 받는다. 문화·예술 분야 권력자의 친일 행적은 이와 다르다. 작곡이나 그림 등으로 이뤄진 반민족행위는 그 폐해에 비해 덜 드러난다.
2006년 12월에 <내일을 여는 역사>에 수록된 김민수 서울대 미대 교수의 기고문 ‘친일 미술의 상처와 문화적 치유’는 “성격상 친일미술은 제3제국 시기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의 이념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독일의 나치미술과 유사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히틀러와 나치를 감동시킨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은 살아 있는 형태로 종교를 재현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나치미술은 국가사회주의 정치이념을 살아 있는 종교로 승화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친일미술 또한 일제의 침략주의와 군국주의 파시즘을 위한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종교시설은 텍스트 못지않게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도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평가되는 운보 김기창(1913~2001)도 비슷한 방식으로 식민지 한국인들의 심리에 영향을 줬다.
친일 행보 이어가다가, 해방 후 변신한 김기창
열세 살 때부터 친일화가 김은호 문하에서 공부한 김기창은 서울(경성)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1년에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했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이 공모전에서 그는 거듭거듭 상을 받았다. 1937년 제17회 선전부터 1940년 제20회 선전까지는 4연속으로 특선에 뽑혔다. 이에 따라, 4연속 특선자에게 주어지는 ‘선전 추천작가’의 타이틀을 갖게 됐다. 일제가 한국인 화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였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매우 예민할 때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중국 독점의 의지를 노출한 일본은 이로 인해 미국·영국 등과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에서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 등 서방세계를 더욱 자극했다.
일본은 그런 정세 속에서 한국 민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움직임에 시동을 걸고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을 압박해 친일파로 전향시켰다. 이 같은 시기에 한 번도 아니고 네 번 연속으로 총독부 공모전의 특선으로 선정됐다는 것은 예술적 능력이 출중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일제의 분위기나 심기를 잘 살폈다는 의미도 된다.
이것이 합리적 해석이라는 점은 그의 행보가 증명한다. 선전 추천작가로 선정된 그 시기부터 그의 반민족 미술이 본격화된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기창 편은 “27세에 선전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한 후 스승 김은호가 그랬듯이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반복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 김기창은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을 이렇게 요약한다.
“1943년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 기념 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게재하고, 잡지 <춘추>에 해군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리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지원병제·징병제 실시를 선전하고, 1944년 전시총동원체제를 독려하기 위해 개최된 경성일보사 주최의 결전미술전람회에 작품 <적진 육박>을 출품하여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선전함. 아울러, 1942~1944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기관지 <국민총력>, 잡지 <춘추>와 <회심> 등에 태평양전쟁 기념 삽화와 근로보국을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려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을 적극 선전함.”
예술가의 자존심이나 양심이 있다면 일제 패망을 계기로 붓을 내려놓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김기창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모독했던 한민족을 위한 작품 활동을 해방 이후에 맹렬히 펼쳤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후 세종대왕·을지문덕·조헌·신숭겸 등의 수많은 역사인물의 초상화를 도맡아 제작했다”라고 말한다.
일제가 가장 싫어하는 문자가 세종대왕의 한글이고, 일제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가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나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처럼 한민족을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인 인물들이다.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했던 화가가 이런 인물들의 초상화를 일제 패망 뒤에 쏟아냈던 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 1973년 자신의 얼굴에 기초해 제작한 세종대왕 영정은 2008년 현재 한국은행 만원권 화폐의 주된 도상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지적한다.
일제가 싫어한 한국 종교는 대종교 등과 더불어 기독교다. 유학자인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볼 때도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혐오는 대단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본인들은 이들을 배일파로 지목하고 은연중에 하나의 적으로 생각하였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했다는 점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 대표가 16인이나 된다는 점,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친일로 전향한 목사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김기창은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를 거들었다. 그랬던 그가 일제 패망 직후인 한국전쟁 시기부터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그림 30점에 담아냈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한복 입은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지난 2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예수의 생애> 판화 전시회를 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2020년 12월에 <신학과 학문>에 실린 심영옥 경희대 교수의 논문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 작품을 통한 기독교 토착화 담론’은 1977년에 나온 김기창 회고록인 <나의 사랑과 예술>을 인용해 “예수의 고난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한국적 성화의 필요성을 느꼈다”라는 김기창의 말을 전한다.
친일에 대해 사죄한 김기창, 하지만…
김기창은 친일 그림에 영혼을 담기 위한 사전 작업을 거쳤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국민총력> 제6권 제10호(1944년)에 따르면, 그는 친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선박을 만드는 현장을 답사하기도 했다.
또 그의 그림에는 침략전쟁과 관련된 심리적 장치가 반영됐다는 평가가 있다. 위 진상규명위원회의 <2006년도 학술연구용역 논문집 2>에 실린 최열의 ‘일제하 미술계의 친일행위 연구’는 <적진 육박>을 이렇게 해석했다.
“인물의 진행 방향을 정사각 화폭의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를 향하는 시선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아군 행진의 박진감은 물론 압도적인 기세를 드러내는 배치 방식이다. 또한 하단을 숲으로 메워놓음으로써 아군이 적군에 노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 심리를 가져다주는 효과도 노리는 매우 노련한 도상화를 구상하였다.”
이처럼 일제 침략전쟁을 위해 고도의 심리적 장치를 그림에 담았던 인물이 해방 얼마 뒤부터 한국 역사인물들, 그리고 예수의 생애를 시리즈로 그린 것이다.
김기창은 친일 그림을 그려 상을 받고 일제 기관지에 그림을 실었다. 이런 데서도 친일 수익이 발생했겠지만, 이보다 훨씬 큰 이익은 해방 이후에 발생했다. 해방 이후에 수많은 작품을 쏟아냈을 뿐 아니라 한국 화단의 거목이 되어 예술 분야의 권력을 행사했다.
김기창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했다.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청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활자화되지 않는 작품이 더 위험할 수 있으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더 유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작품세계가 청산되지 않은 사실이 갖는 위험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성 기자
<2024-11-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세종대왕 초상화 그린 화가의 충격적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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