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2]
우가키 총독의 글씨로 판명 난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1936년)’
일본 천황이 애용했던 헌상담배 ‘충미엽(忠米葉)’의 전래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작고한 테라우치 총독 때부터 조선 소산의 연초를 근제하여 가끔 천폐에 헌상하여 왔으며 거번 사이토 총독이 동상시에도 조선산의 연초로 양절연초를 근제하여 천폐에 헌상하였거니와 이번에는 특히 천황폐하께옵서 조선 소산의 연초는 향미가 극히 우량하다 하시와 또 제조하여 들이라는 황송한 처분이 계옵셔 사이토 총독은 즉시 총독부 전매과에 부탁하여 양절금구연초 3천 본을 근제하라 하였으므로 그간 계원들은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3천 본의 연초를 삼가히 만들어서 5일 9시 50분 제1번 열거로 이등실의 자리 한 편을 치우고 총독부 속 코타니 나오조(小谷直造) 씨가 받들어 가지고 궁내성을 향하여 동상하였는데 코타니 씨의 말들 듣건대, “천황폐하께옵서 어애용하시는 연초는 거위 조선 소산을 어애용하시는 줄로 배찰하는 터인데 이와 같이 천폐에 헌상연초는 충주군(忠州郡) 소산이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역시 충주 소산의 제일품 가는 연초와 또는 토이기(土耳其) 소산의 연초 종자를 이종배양하는 태전(太田, 대전) 부근에서 소산되는 양연으로 3천 본의 연초를 근제하여 가지고 궁내성으로 출발하는 길인데, 여하간 조선양연으로 제일 영광을 많이 입기는 충주 소산의 일품양연이라”고 말하더라.
이것은 『매일신보』 1920년 3월 7일자에 수록된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이 천폐(天陛, 천황폐하)에 헌상(獻上)하는 양절금구연초(兩切金口煙草), 3천 본(本)을 봉지(捧持)하고 동상(東上)한 총독부 속(屬) 코타니 나오조(小谷直造) 씨」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양절금구연초’는 양끝을 자른 권연(卷煙, 궐련)에 금구(金口, 금종이로 말아놓은 물부리)를 달아놓은 담배를 말한다. 금구, 즉 물부리는 일종의 원통형 ‘마우스피스(mouthpiece)’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에 있던 조선총독이 직접 일본 천황에게 갖다 바친 무수한 헌상품 목록에는 조선의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주요 특산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특히 담배는 일찍이 1915년에 충주지방에서 재배한 황색종 엽연초로 만든 특제품이 처음 헌상된 이래로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이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본국을 내왕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상납하는 주요한 헌상품목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 이듬해인 1916년에는 조선 재래종인 ‘영월초(寧越草)’와 대구 지역에서 재배한 내지종(內地種, 일본품종) 잎담배를 섞어 정성껏 제조한 권연초를 무려 세 차례나 천황에게 특별 헌상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황색종(黃色種) 엽연초는 글자 그대로 ‘옐로 오리노코 담배 종자(Yellow Orinoco Tobacco)’에서 옮겨온 말이다. 원산지가 미국이므로 이를 일컬어 ‘미국종 황색연초’, ‘미국종 엽연초’, ‘미국 황색종’ 또는 ‘미종(米種) 황색엽’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충주 지역에서 재배되는 황색연초는 품질이 좋고 생산수량도 풍부한 탓에 그 명성이 드높았는데, 이로 인해 이른바 ‘충미엽(忠米葉; 충주 지역에서 재배한 미국종 엽연초)’이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1936년10월23일자에수록된「황색종(黃色種)의 연초는 충주(忠州)서 경작 창시(耕作 創始)」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러한 ‘충미엽’의 위상을 이렇게 그려놓은 내용이 눈에 띈다.
조선의 풍토(風土)가 황색종 연초의 생산지인 북아메리카(北亞米利加)의 ‘버지니아’, ‘북(北) 카롤라이나’ 등 각주(各州)에 혹사(酷似, 흡사)하여 명치 39년(1906년) 한국정부 재정고문부(韓國政府 財政顧問部)에서 시작(試作)에 착수하고 기년(幾年)의 장애변전(障碍變轉)을 경(經)하여 본종(本種) 경작의 가능함을 확인하여 명치 45년(1912년) 충북 충주(忠北 忠州)에 경작을 창시하였던 것인데 지금은 충주, 음성(陰城), 괴산(槐山), 제천(堤川)의 4군(郡) 32개 읍면(邑面)에 호(互)하고 그 경작면적이 2,020정보(町步)를 초(超)하며 배상금(賠償金) 2백만 원(圓, 엔)을 넘는 연초대생산지(煙草大生産地)로 된 것이다. 그리고 충주를 중심(中心)한 황색종의 연초는 ‘충미엽(忠米葉)’이라고 하는데 이 충미엽의 산액(産額)은 세계 총생산액의 120분(分)의 1에 상당(相當)한 것으로 세계 어느 나라든지 연초잡지(煙草雜誌)의 생산표(生産表)에는 반드시 충주연초가 말위(末位)이나마 한 자리 끼어 있다.
그리고 충주 지역에 처음 미국 원산 황색종 엽연초가 전래된 내력에 대해서는 『개벽(開闢)』 1925년 4월호에 게재된 차상찬(車相瓚, 1887~1946) 특파원의 「충청북도답사기(忠淸北道踏査記)」를 보면, ‘충북(忠北)의 삼대명물(三大名物)과 이대광산(二大鑛山); 충주인(忠州人)의 생명(生命)인 황색연초(黃色煙草)’라는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84쪽) …… 명치 44년(1911년) 6월에 수(遂)히 황연(黃煙)의 산지(産地)를 선택하기 위하여 경기도(京畿道)의 양주, 광주, 황해도(黃海道)의 해주, 재령, 강원도(江原道)의 김화, 철원, 평강 및 충북(忠北)의 충주를 예정지(豫定地)로 정하고 경작면적, 농가호수, 지질, 토성(土性), 지세, 기상, 노은(勞銀, 품삯), 비료의 공급에 관한 조사를 정밀히 한 결과, 충주군(忠州郡)은 북미(北米) 뾪아지니아(Virginia)주(州)의 연초원산지와 위도(緯度)가 동일하고 또 기상(氣象)은 종래 농작물에 대해(大害)를 급(及)하는 사(事)가 무(無)하며 겸(兼)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차(且) 2천여 정보(町步)의 일대평야(一大平野)가 유(有)하며 지형(地形)은 배수(排水)에 극편(極便)할 뿐 외(外)라 연초경작에 최대금인물(最大禁忍物)인 철질(鐵質)을 함유(含有)치 아니하여 각 방면에 황연재배에 최적의(最適宜)한 것을 확지(確知)하고 명치 45년(1912년)에 동군(同郡)에 탁지부 사세국출장소(度支部 司稅局出張所)를 설치한 후 이래(爾來) 경작에 착수하여 토양을 분석하며 종자(種子)는 미국원산지(米國原産地)의 ‘엘로 오로노코’, ‘뿌라이트 엘로’, ‘헤스타’, ‘공쿠엘노’, ‘겐닷기 엘로’ 외 6종(六種)을 선(選)하여 선(先)히 민간경작(民間耕作)에 모범(模範)을 시(試)하고 차년도(此年度)에는 종자의 채취 및 시험경작을 목적하는 직영경작(直營耕作)으로 행하며 민간에는 경작용 물자를 대부(貸付)하여 각방(各方)으로 민간경작을 장려함으로 차(此)에 종업(從業)하는 자(者) 축년(逐年) 증가하여 충주에 황색연초가 수(遂)히 세(世)에 저명(著名)하고 또 충주에 차(此) 연초로 생업(生業)을 하게 되었다. [경작조합(耕作組合)은 대정 2년(1913년)에 설립(設立)됨].
그런데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의 교문에서 남쪽으로 200미터 남짓한 자리에 있는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KTGO 충주연협; 충북 충주시 단월동 488-1번지)의 앞뜰에는 일제의 손을 거쳐 이 땅에 들어온 미국산 황색종 엽연초의 재배가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했던 시절의 흔적 하나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름하여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라는 일제의 조형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 비석이 만들어진 것이 1936년 가을이었으므로, 얼추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때의 일이다. 처음 세워진 장소는 충주신사(忠州神社, 사직산 소재) 경내였다. 해방 이후에는 1973년 10월에 이르러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 구내(충주 용산동 소재)로 옮겨졌다가 다시 지난 2006년 5월 23일에 조합사무실 매각과 관련하여 통칭 ‘노루목 노변공원(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394-4번지 국도변)’으로 일시 이전되었으며, 그 이후 2011년 3월에 ‘황색종 연초경작 백주년 기념비’가 건립 제막될 때에 새로운 비석과 짝을 맞춰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된 내력을 지녔다.
현재 이 비석의 상태를 살펴보면 하단 4면에 부착되어 있는 비문(碑文)은 일본인 관리의 성명이라든가 일제의 연호가 있었던 부분 등을 포함하여 군데군데 인위적으로 깎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열다섯 자에 달하는 제자(題字, 표제 글씨)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그 옆쪽으로 휘호(揮毫)한 이의 정체를 나타내는 협자(脇字, 겨드랑이 글씨) 부분은 완전히 삭제된 상태라서 누가 쓴 글씨인지를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이름 가운데 한 글자가 ‘일(一)’인 것이 분명하므로 퍼뜩 그 당시의 조선총독이던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떠올랐으나 아쉽게도 이를 확인할 만한 구체적인 입증자료가 당최 눈에 띄질 않았다.
하지만 못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와 관련된 자료를 뒤지고 또 뒤지다가 막판에 간신히 하나 찾아낸 것이 조선전매협회(朝鮮專賣協會)의 기관지인 『전매의 조선(專賣の朝鮮)』 1936년 12월호였다. 여기에 채록된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 제막 관련 「기념비 공사보고(記念碑 工事報告)」라는 글에는 “비(碑)의 제자(題字) 15자(字) 및 협자(脇字) 9자(字)는 전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 각하(前朝鮮總督 宇垣一成 閣下)의 휘호(揮毫)에 관련된 것이며, 모두 환심조(丸深彫, 둥글게 깊이 파는 것)로 함”이라는 구절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이로써 이 글씨는 바로 우가키 총독의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는 과연 어떤 연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건립된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조선신문』1935년 10월 26일자에 수록된 「충주황색연초 창시기념비(忠州黃色煙草 創始記念碑), 충주 음성 양조(忠州 陰城 兩組)에서의 갹금(醵金)으로 사직산상(社稷山上)에 건설계획(建設計劃)」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충주(忠州)] 전선(全鮮)에 있어서 연초(煙草)의 충주(忠州)로서 연액(年額) 170만 원(圓)의 연초배상금(煙草賠償金)의 소장(消長)은 그리 과언(過言)은 아니다. 충주(忠州)가 금일(今日) 충북 제이(忠北 第二)의 도시(都市)로서 그 역강(力强)한 걸음을 딛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때마침 명년(明年)은 충주황색연초 창시이십오년(忠州黃色煙草 創始二十五年)에 상당(相當)하므로 지난 4월 이래 경작자 평의원(耕作者 評議員) 중의 발기인(發起人)의 노력(努力)에 의해 최근(最根) 상담회 개최(相談會 開催)의 결과(結果) 충주 음성 양조합 경작자(忠州 陰城 兩組合 耕作者)의 갹금(醵金)으로써 명년(明年) 9월(月)의 추계황령제(秋季皇靈祭)를 기(期)하여 사직산두(社稷山頭)에 30여 척(尺)의 일대 기념비(一大 記念碑)를 건설(建設)하기로 합의일결(合議一決)하고 벌써 준비(準備)에 착수(着手) 역원 일동(役員 一同)은 지금 한창 자연석(自然石)을 물색중(物色中)이라고 하니, 우(右) 사업(事業)은 진실로 유의미(有意味)한 계획(計劃)이라 일컬어지며 본사업(本事業)의 수행(遂行)에는 뜨거운 …… [중간 부분 판독불능] …… 풍광명미(風光明美)한 사직산상(社稷山上)에 우러러보는 웅대(雄大)한 기념비(記念碑)는 충주평야(忠州平野)를 일망(一望) 중에 부감(俯瞰)하여 위관(偉觀)을 더할 뿐만 아니라 충주명승지(忠州名勝地)로도 될 것이며, 상술(上述)한 것처럼 관계 깊은 충주읍민(忠州邑民)으로서도 차제에 대안(對岸)의 화재시(火災視; 강 건너 불구경)하지 않고 쌍수(双手)를 들어 사업(事業)의 수행(修行)에 찬동(贊同)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當然)한 책무(責務)가 아닐까. 더구나 사업(事業)의 예산(豫算)은 약(約) 5,000원위(圓位)이며, 제막식(除幕式)의 당일(當日)은 25년간(年間)에 있어서 연초경작(煙草耕作)에 관한 공로자(功勞者) 수십명(數十名)의 공로상 수여식(功勞賞 授與式)도 행할 예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충주신사 안에 건립된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는 그 이듬해인 1936년의 천장절(天長節, 4월 29일)에 맞춰 지진제(地鎭祭)가 거행되었고, 다시 10월 16일에 이르러 성대한 제막식이 개최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에 관한 내용은 『매일신보』1936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찬연(燦然)! 연초경작사(煙草耕作史) 25주년(廿五週年) 기념(紀念)의 성전현란(盛典絢爛), 기념비 제막식(紀念碑 除幕式)과 공로자 표창(功勞者 表彰), 충주(忠州)의 전시가 비등(全市街 沸騰)」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충주(忠州)] 대망(大望)의 연초경작 25주년기념비 제막식(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 除幕式) 급(及) 기념식전(記念式典)은 예정(豫定)과 여(如)히 지난 10월 16일 오전(午前) 11시부터 충주신사경내(忠州神社境內)에서 무네스에 전매국장(棟居 專賣局長), 사토 전매본국 기사(佐藤 專賣本局 技師), 진나이 경성지방전매국장(陣內 京城地方專賣局長), 마츠시 마 충북도지사 대리(松島 忠北道知事 代理), 오구라 산업과장(小倉 産業課長), 전(全, 충주), 김(金, 괴산), 권(權, 음성) 각 군수(各郡守), 쿠사지마(草島, 충주), 하야타(早田, 음성), 오시마(大島, 괴산) 각 경찰서장(各警察署長), 키사누키 전주지방전매국 수납과장(木佐貫 全州地方專賣局 收納課長), 곤도 판사(近藤 判事), 마츠이 협찬회장(松井 協贊會長) 등 관민유지(官民有志) 급(及) 재충신문통신관계자(在忠新聞通信關係者), 기타 연초경작자(其他 煙草耕作者) 등 600여 명(名)이 열석(列席)하여 기념식(記念式)을 거행(擧行)한 후(後) 충주산 황색연초경작(忠州産 黃色煙草耕作)의 창시자(創始者)이며 또한 전매충주출장소(專賣忠州出張所) 초대 소장(初代 所長)으로서 연초경작(煙草耕作)의 대업(大業)을 광고(曠古)에 수(垂)케 한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 현 청도미성연초주식회사장(現 靑島米星煙草株式會社長)] 옹(翁)을 영(迎)하여 총공비(總工費) 2,800원(圓)을 가지고 건립(建立)한 황색연초경작이십오주년기념비(黃色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 전(前)에서 기(其) 제막식(除幕式)을 거행(擧行)하였다.
그리고 사카이 충주경작조합 이사(酒井 忠州耕作組合 理事)가 간단(簡單)히 기념비공사(記念碑工事)를 보고(報告)하고 진나이 기념회장(陣內 記念會長)의 인사(人事)와 공로자 급 영년경작자(功勞者 及 永年耕作者)의 표창(表彰)이 있은 다음 내빈축사(來賓祝辭)에 들어가 무네스에 국장(棟居 局長), 김 충북지사(金 忠北知事, 대독), 각 군수(各郡守), 마츠이 충주읍장(松井 忠州邑長)의 축사(祝辭)가 있었고, 이어 식은 두취(殖銀 頭取) 아루가 미츠토요 씨(有賀光豊氏) 외(外) 각 방면(各方面)으로부터 비래(飛來)한 축전(祝電)을 피로(披露)하고 창시공로자(創始功勞者) 오카다 옹(岡田翁)의 인사(人事), 영년경작자(永年耕作者)의 답사(答辭)로써 폐식(閉式)하였는 바 때는 정(正)히 10월 16일 오후(午後) 2시 10분이었었다. 또한 폐식후(閉式後)에는 창공(蒼空)에 용립(聳立)한 노송고송(老松古松) 사이에 준비(準備)된 별석(別席)에서 축하연(祝賀宴)을 개최(開催)하였는데 주객(主客) 공(共)히 십이분(十二分)의 환(歡)을 진(盡)하고 무사산회(無事散會)하다. (사진은 기념비)
조선총독부 전매국장을 지낸 야스이 세이이치로(安井誠一郞, 1891~1962)가 지었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에는 “오호라, 버려진 밭을 갈아 귀한 땅이 되고 소연[消煙, 담배소비]이 황금으로 변하게 되니, 이른바 산업이 흥해야 나라의 곳간이 차고 백성이 마음 놓고 즐거이 생업을 이룬다는 것은 실로 이 말이다.”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일제의 입장에서야 의당 이와 같은 산업진흥을 통해 식민지 조선 전역에 태평치세가 도래하길 바랐을 테지만, 바꿔 말해 이러한 식산흥업(殖産興業)이야말로 전형적인 식민지배정책의 한 갈래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나저나 저 기념비의 돌기둥에 새겨진 글씨가 식민통치자의 우두머리인 조선총독의 글씨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둘째치고라도, 하필이면 저들의 기념물인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와 짝을 맞추듯이 ‘황색종 연초경작 100주년 기념비(2011년 3월 28일 제막)’를 나란히 세워놓은 것을 보면, 그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식민지 시절을 대하는 무심함이 어찌 이 정도일까 하는 생각에 내심 걱정과 근심이 떨쳐지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