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권중현
권중현은 이름에 들어간 무거울 중(重) 및 드러날 현(顯)과 달리, 이완용·박제순에 가려져 비중이 적어 보이는 을사오적이다. 그러나 일본이 볼 때는 가성비가 꽤 높은 친일파였다. 그의 팔십 생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위한 사전 서비스와 사후 서비스로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종 임금 때인 1854년에 지금의 충북 영동군에서 출생한 그의 원래 이름은 사전적 의미가 ‘균형을 유지한다’인 권재형(在衡)이다. 이름을 바꾼 것은 49세 때인 1903년 5월이다. 을사늑약 2년 전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 권중현 편에 따르면, 그의 첫 관직은 고종 때인 1883년에 받은 부산감리서(동래감리서) 서기관이다. 29세 나이로 일본과 가까운 곳에서 개항장 사무를 처리하게 된 그는 그 뒤 주로 대일 사무에서 경력을 쌓았다.
1885년에는 대외관계를 처리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됐고 1888년에는 일본을 시찰하게 됐다. 1890년에 전보국 주사로 옮겼다가 청나라 상인들의 기운이 강한 인천항의 방판(幇辦)이 된 그는 얼마 안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서기관이 되고 주일판사가 됐다.
1882년에 군대를 파견해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가 1894년까지 전무후무한 내정간섭을 실시했기 때문에, 이 12년간의 친일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친일과 성격을 다르게 보기도 한다. 1884년에 일본군의 힘을 빌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친일파로 분류하기 힘든 것은 그의 거사가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무너트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권중현은 일본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그래서 1894년까지의 행적은 그의 친일 이력에 넣을 수 없지만, 그 이후는 달랐다. 조선정부가 동학군의 위세에 눌린 틈을 타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간섭을 시작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 그해에 그는 ‘일본 라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을사늑약 체결 찬성, 그리고 암살 위기
일본의 강압하에 갑오경장(갑오개혁)이 진행되던 그 시절 권중현에 관해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서영희 당시 서울대 강사의 기고문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는 “당시 개화파 정권에 참여한 인물 중에서도 특히 일본공사관의 신임이 두터운 이른바 왜당(倭黨)으로 알려져 있었다”라고 말한다.
왜당으로 불린 권중현은 오늘날 우리의 눈에 의외로 비칠 수 있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권중현 편은 청일전쟁 2년 뒤인 1896년 상황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7월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 독립협회 위원에 선출되었다”고 말한다. 청나라가 물러간 뒤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청나라에 맞선 자주독립의 의미가 좀더 많이 강조될 때였다. 그래서 왜당 권중현의 독립협회 활동이 이 시기에는 아주 이상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물러나고 일본이 강해진 새로운 정세하에서 그는 장관급으로 올라섰다. 1898년에 농상공부대신이 된 것을 시작으로 법부대신·군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친일의 길을 과감히 걸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장을 훈장으로 받은 그는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군을 응원하기 위해 만주를 시찰했다.
한반도 주변에서 러시아가 약해지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입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권중현의 만주 시찰과 일본군 응원은 한국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을사늑약 이전부터 그는 늑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905년 11월 17일 그가 을사늑약 5대신이 되어 늑약 문서에 가(可)를 표기하는 일로 이어졌다. 조선 말년의 역사서를 표방한 정교(1856~1925)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는 “이완용과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다섯 사람은 일제히 모두 가(可)를 썼다”고 기술한다.
오늘날의 친일 뉴라이트들은 윤석열 정권의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세력을 ‘시야가 좁고 미래를 못 보는 사람들’로 폄하한다. 황제비서실 일지인 1905년 11월 20일 자 <비서감 일기>는 권중현을 비롯한 을사오적도 그런 논리를 운운했음을 보여준다. 이 기록은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이 상소”했다면서 이들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을 상소문에서 이렇게 비난했다고 알려준다.
“저들은 국가가 이미 망했고 종묘사직이 이미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노예가 되고 강토는 남의 땅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치에 닿지도 않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들이 과연 새 조약의 귀추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뉴라이트들은 일본과 외교적 연대를 강화하고 군사협력을 벌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말한다. 권중현과 그의 네 동지도 그랬다. “새 조약의 주된 취지에 대해 말하자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묘사직은 안녕하고 황실도 존엄합니다”라며 “다만 외교상의 한 가지 문제만 잠시 이웃나라에 맡긴 것인데,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게 그들의 말이다. 나라의 근간인 외교권을 넘기면서도, 을사늑약 문면에 “제국”, “한국 황제 폐하” 등이 있는 것을 근거로 그런 강변을 했다.
한일협력이라는 미명하에 외교권을 넘기고도 뻔뻔하게 행동하는 권중현을 세상은 그냥 두지 않았다. 위 <친일파 99인>은 1907년에 지금의 서울 인사동에서 을사오적암살단이 벌인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양복을 차려 입은 권중현이 인력거를 타고 일본 병정 및 순사 6~7명은 총칼을 들고 그를 둘러싼 채 지나가고 있었다. 이홍래가 용기 있게 앞을 가로막고 권중현의 어깨를 잡고서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꾸짖으며 협대(夾袋)에 간직한 육혈포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혈포가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권중현의 하인들이 일제히 이홍래를 붙잡았다. 그러자 동지 강원상이 육혈포를 꺼내 권중현을 행해 쏘았으나 권중현은 급히 피하여 길가의 민가로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강원상이 또 한 발을 쏘았으나 문이 닫혀 있어 맞지 않았다.”
권중현의 개인 측근들과 일본 군경 예닐곱 명이 무장 호위를 하는 상황에서도 항일운동가들이 달려들었다. 대중의 증오심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2개월 뒤 권중현은 추풍령을 넘었다. 윗글은 “관직을 물러나 모든 가족을 이끌고 추풍령 아래 산간마을 영동으로 퇴거하였다”라며 “사람들은 그가 이제 일체 정계에 욕심이 없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으나 곧이어 6월 중추원 고문에 다시 임명되었고, 칙명으로 일본박람회 시찰을 떠나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을사오적 중 가장 늦게 죽다
권중현이 을사늑약 후폭풍을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맞서기도 했다. 인사동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인 1906년 11월 그는 군부대신 자격으로 의병 진압부대를 각지에 파견했다. 을사늑약 이전부터 늑약을 향해 달렸던 그가 을사늑약 이후에는 늑약을 사수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사전·사후 서비스에 두루 충실한 친일파였다.
1910년에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은 그간의 공로를 치하해 자작 작위를 수여하고 국채의 일종인 은사공채 5만원권을 지급했다. 이 5만 원을 원금으로 넣어두고 연리 5%의 이자를 수령하는 권리를 준 것이다. 1911년 4월 8일 제정된 헌병보조원규정에 따르면,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월급은 7원에서 16원이었다. 헌병보조원 3125명 내지 7143명의 월급에 해당하는 은사공채가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또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직을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역임하면서 연봉 1600원을 수령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중추원 고문을 재차 역임하는 동안에는 연봉이 3000원이었다. 이 외에도 역사교과서 왜곡을 위한 조선사편찬위원회에도 가담하는 등등의 활동이 있었으니, 여기저기서 친일 수익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 정도의 대가를 받은 일반 친일파들과 달리 을사오적은 자손들까지 먹고 살 정도의 대가와 보증을 받았다.
박제순은 1916년에 사망하고, 이근택은 1919년에, 이완용은 1926년에, 이지용은 1928년에 죽었다. 권중현이 죽은 것은 1934년이다. 죽기 전까지 중추원 고문 일을 했으므로 을사오적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애프터서비스를 한 셈이다. <친일인명사전>은 “1934년 3월 19일 사망”했다며 “작위는 1934년 5월 양자 권태환이 물려받았다”라고 말한다.
김종성 기자
<2024-11-10>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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