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동식
일본제국주의가 표방한 교육원칙 중 하나는 내선공학(內鮮共學)이다. 내지인과 조선인이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다는 이 원칙은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표방됐지만,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제3차 교육령 시행을 앞두고 일종의 전국장학사회의에 참석하고 임지로 돌아간 다케다 평안남도시학관(視學官)은 개정 교육령의 핵심을 지역 언론인에게 브리핑했다. 1937년 12월 2일 자 <조선일보> 4면 좌중간은 브리핑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금후의 교육에 대한 방침은 황국신민으로서의 교육, 내선일체, 인고의 단련 등 세 가지를 주로 한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소학교·중학교·고등녀학교 등은 명년 신학기부터 내선공학으로 하게 되엇스나 급속히는 할 수 업고 순전히 공학을 하기까지에는 학교조합 관계도 잇서 구체화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터이다.”
한국인과 일본인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공부하는 장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다케다 시학관의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본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선공학 전환을 추진했다. 내선공학의 전제조건인 내선평등이 요원한 상황에서 내선공학 전환부터 본격화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두른 것은 군국주의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까지 도발한 것은 중국을 독식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이는 일본과 서양제국주의 간에 존재했던 협조체제를 금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미국 및 유럽과 충돌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일제는 ‘당신들도 대일본제국 신민이다’라며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내선공학 본격화는 이런 흐름에서 추진됐다.
일제의 ‘내선공학’ 정책 찬성한 교육자
내선공학이 교육적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적극 호응한 교육자가 있다. 지난 11일 남녀공학 전환에 반대하는 서울 동덕여대 학생들에 의해 계란 등을 뒤집어쓴 설립자 흉상의 주인공인 조동식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38년 2월 25일자 <매일신보> 1면에서 그의 사진과 발언을 접할 수 있다.
1면 전체를 도배한 이 기사는 “반도 2천 3백만 민중의 연래(年來)의 열망이 결실하여 조선통치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조선개정교육령에 대한 찬사·송성(頌聲)은 법령 공포를 앞두고 폭풍과 같이 전선(全鮮)을 휩싸고 있는데”라면서 조동식 동덕여고교장 등의 찬성론을 실었다.
이 글에서 조동식은 “내지인 여학생까지라도 입학 지원자가 있는 경우에는 수용해야만 될 것”이라며 일본인 신입생 유치에 기대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어 교과목의 존재가 신입생 유치를 방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내선공학을 우리 학교에서도 시행해야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조선어 과목이 문제일까 합니다”라며 “결국 청산과목으로 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니까 장래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일 공학이 되어 두 민족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려면 다른 조건들도 성취돼야 하지만, 무엇보다 교육비 부담 능력이 어느 정도라도 균형을 이뤄야 했다. 두 민족의 경제력 차이가 현격한 상황에서는 내선공학의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의 저명한 언론인인 고 리영희(1929~2010)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록인 <대화>에서 “경성공립공업학교는 이른바 내선공학이라고 해서 한 반에 일본인 30명, 조선인 10명 정도로 입학했지요”라며 “일본 학생들로서는 비교적 쉽지만 조선인 학생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웠지”라는 말로 한국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내선공학 제도를 회고했다.
비슷한 인식이 위의 다케다 시학관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지만, 당시의 공공연한 불만 표명에서도 확인된다.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은 1938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좌상단에서 “초등학교에는 공학 실시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말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시기에는 초등학교만 다니는 사람들이 허다했으므로, 초등학교 내선공학에 대한 반대는 내선공학제도 전체에 대한 완곡한 반대의 표현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아동과 내지 아동은 그 가정의 환경과 부모들의 언어·지식 정도가 각기 서로 다른 터이므로 만약 한 학교에서 가티 공부를 하게 된다면 만흔 핸듸캡이 엇게 되야 결국 조선 아동들은 그 성적이 떠러져서 기가 죽게 되고 공부에 염증이 나게 될 우려가 잇다”라고 염려했다.
1938년에 51세가 된 조동식은 위 <매일신보>에서 “내선공학이 실현되는 것은 현하(現下) 조선의 정세로 보아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이 발언이 진심이 아니라는 판단을 갖게 할 만하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조동식 편은 “1908년 4월 동원여자의숙을 설립하고 숙장을 맡았다”라고 말한다. 21세 때부터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자로 살았던 그가 내선공학이 현실에 맞지 않음을 몰랐을 리 없다. 친일파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전쟁 협력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 친일 논설까지 썼다
조동식의 친일은 내선공학 찬동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조동식 편은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이렇게 요약한다.
“1942년 3월 동덕고등여학교 교장으로서 <매일신보>에 징병제도의 실시에 부응하여 조선의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전쟁 협력을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여학생 교육을 주장함. 또한 내선일체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총후생활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매일신보> 등의 매체에 지속적으로 발표함.”
조동식은 ‘전쟁 협력을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했다. 이와 관련된 그의 친일 논설이 1942년에 <조광> 제85호에 실렸다. 여기서 그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더 새롭고 더 시국에 적응한 정신을 아이들에게 주입시켜 줄까 하고 노력 중입니다”라고 밝혔다. 자기 학교 학생들을 군국주의에 맞게 개조하고자 무슨 방법으로든지 주입시킬 고민을 하고 있다는 발언이다. 학교 교육을 친일을 위한 세뇌 수단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908년에 동원여자의숙을 설립한 조동식은 1912년에 동덕여학교 교장이 되고 뒤이어 중동야학교 교장을 겸했다. 1926년에는 동덕여학원을 설립하고 이사가 됐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 감사가 됐다. 이처럼 교육 업무로부터 바빴을 그는 친일 현장에서도 맹렬히 뛰어다녔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국민동원총진회·대화동맹 등에도 가담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단체 활동과 강연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 기고” 등의 활동도 했다고 말한다. 학교를 여럿 설립했으니 강연료나 원고료 같은 친일 수익은 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친일재산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도 언급됐듯이 그는 “<매일신보> 등의 매체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또 친일 활동이 학교 운영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학교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상당 부분은 친일재산에 포함시키는 게 맞을 것이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이 잘못됐음이 판명되면 교육자는 교육 무대를 떠나야 마땅하다. 학교 운영 못지않게 일제 찬양에 열성적이었던 조동식은 일제 패망 뒤에 교육계를 떠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945년 해방 뒤에도 어제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동덕여대 학장, 상명학원 이사장, 조선사회교육협회 이사장, 성균관대 이사장, 전국사학재단연합회 회장, 대한문교서적 사장,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유네스코 한국위원장, 대한교육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교육 분야에서 반민족행위를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가는 그를 대한민국은 칭찬했다. 그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받은 대우를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62년 8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69년 12월 25일 사망했다. 같은 달 29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김종성 기자
<2024-11-17>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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