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군법회의 판결문으로 진실 규명 뒤집는 진화위
서울시 중구 충무로3가 60-1 남산스퀘어빌딩. 이곳은 옛 일신국민학교 자리이다. 일신국민학교는 1950년 9⸱28 수복 전후 백인엽이 지휘하던 국군 17연대 주둔지 중 하나였다. 1950년 7~8월에 남하하는 전선을 따라 전투를 벌이면서 연기, 공주, 합천, 고령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 17연대는 9월 중순에는 미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고, 9⸱28 전후에 서울로 들어온 뒤 수도 경비 업무를 하면서 부역 혐의자를 학살했다.
1기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보면, 17연대 군인들은 한강 다리 폭파로 인민군 점령기에 서울에 남았던 시민 중 부역 혐의자로 보이는 사람을 끌고 간 뒤 군 주둔지에서 고문하거나 학살하고 부근의 남산에 암매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7연대의 한 장교는 “얼굴이 하얗고 수염이 긴 자는 피난 못 가고 숨어 있던 자로 봤다.”, “당시 분대장 이상에게 총살권이 주어져 적색분자라고 하면 총살했다.”라고 증언했다.
옛 학살터에 자리 잡은 진화위에 지금 무슨 일이
우연일까, 운명일까.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지금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11월 19일 진실화해위 제91차 전체위원회에 기존에 진실규명 결정을 했던 것을 취소하는 안건이 상정된다고 한다. 충남 서천에서 살던 백락정(1919년생)이 그 희생자다. 2기 진실화해위는 백락정이 1950년 7월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고 지난해 11월 28일에 진실규명 결정했다. 그런데 뒤늦게 군법회의 판결문이 발견됐고 거기에 ‘사형’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는 이유로 1년 만에 진실규명 결정을 취소하려 하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에게 군사재판을 한 것이 적법하다고 본 것이다.
만약 2기 진실화해위가 백락정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취소한다면 앞으로 두 가지 점이 우려된다. 첫째, 다른 희생자들도 군법회의 판결문이 있으면, 신청한 사건을 각하하거나 이미 진실규명 결정한 걸 취소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지금 2기 진실화해위는 군법회의 판결문 전수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이 결정이 선례가 되어 다른 사건들도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진실규명 결정한 것을 쉽게 취소할 수 있다.
한국전쟁기 군사재판과 ‘법률적 학살’
과연 한국전쟁기 민간인에 대한 군사재판이 ‘적법’했는가? 내가 만났던 전시 형무소 생존자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재판소라고 해야 널찍한 창고 같은 데였어… 처음에 검사가 내게 사형을 구형하데… 잠깐 쉬었다가 판결이 나는데, 징역 20년을 줘. 군법회의 재판은 그날로 다 해버려. 형식적으로 하지. 검사가 누군지 이름도 모르고 변호사 이름도 몰라. 그렇게 20년 받아서 징역살이했잖아.
– 1952년 7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광주에서 군법회의 재판을 받은 변○○ 증언
나는 1950년 봄에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했어요. 전쟁 나자, 경찰서로 끌려가 7월 10일에 형무소로 넘어가서 7월 말경에 군법 재판을 했어요. 1시간 만에 재판이 모두 끝났고 사형 구형에 10년 형을 선고받았어요. 얼마 뒤 간수가 기결사 재소자들의 번호를 호명했고 호명된 사람은 트럭에 실려 갔어요.
– 1950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구에서 군법회의 재판받은 김○○ 증언
치안대에게 잡혀서 경찰서로 갔다가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갔어. 얼마 있으니까 막 끌어내어 재판했어. 그때는 비상조치령으로 해서 무조건 두들겨 패서 만들었지. ‘앞줄 무기, 뒷줄 사형’ 선고할 때야. 최하가 징역 10년이야. 나는 12월쯤 불러내서 나가니까 징역 15년형을 주더라고. 좀 있으니까 새벽마다 문 철커덕 열고, ‘몇 번, 몇 번 나와!’ 몇 사람씩 불러내더라고. 매일 그렇게 불러내 사형 집행한 거야.
– 1950년 12월 범죄처벌특조령 위반 혐의로 서울에서 민간재판을 받은 한○○ 증언
위의 증언을 보면 당시의 재판은 군사재판이든, 민간재판이든 재판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 제대로 된 재판을 했다고 볼 수 없다. 민간인들이 제대로 변호도 받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단심으로 재판받은 것이다. 그나마 위의 증언자들은 그렇게 재판도 아닌 “뭔가”를 거치고 구사일생으로 생존했지만, 수많은 민간인이 이런 과정을 거쳐 학살됐다. 이처럼 사법 절차의 외피를 쓴 채 국가가 민간인에게 행사한 국가폭력을 학계와 법조계에서는 ‘법률적 학살’이라고 한다.
전시 ‘법률적 학살’에 국방경비법 가장 많이 활용돼
1기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주로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하 범죄처벌특조령) 위반 혐의가 적용된 사람이 한국전쟁기 형무소에서 학살됐다.
① 국방경비법 : 조선경비대를 규율하기 위해 만든 군형법이다. 군인과 군속에게만 적용하게 돼 있으나, 이 법 제32조(이적죄)·제33조(간첩죄)에 포함된 ‘여하(如何)한 자든지’라는 문구를 근거로 제주 4.3 때부터 민간인을 학살할 때 적용했다. 법의 제정 주체와 제정 경위가 불분명하고 제대로 공포된 적이 없어 위헌적인 ‘유령법’이라고 여러 차례 문제 제기됐다. 오죽하면 한홍구 교수는 국방경비법을 “처음부터 법이 아니었던 ‘거시기'”, “태생조차 알 수 없는 ‘살인 무기'”라고 불렀을까.
② 국가보안법 :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제정됐다. 이승만 정권이 좌익 세력 색출을 명분으로 국민들의 ‘행위’뿐만 아니라 ‘사상’까지 통제하고자 했던 법이다. 국가보안법으로 1949년 한 해 동안 총 11만 8,621명이 체포됐고, 1950년 초 4개월 동안 총 3만 2,018명이 체포됐다. 1949년 말 형무소 전체 수감자의 80%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였다.
③ 범죄처벌특조령 :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제정됐다. 살인, 방화뿐만 아니라 절도 등 사소한 범죄 행위도 최고 사형부터 최소 징역 10년까지 처하는 ‘엄중 처벌’의 원칙을 내세웠다. 처벌 방법도 ‘신속, 졸속, 약식 처벌 원칙’에 따랐다. 재판을 단심으로 하도록 했고 증거재판주의를 무시했다. 1973년 내무부 치안국 집계에 따르면 한국전쟁기 1만 3,703명이 범죄처벌특조령으로 재판받았다.
①, ②, ③의 법령 중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판결의 형량이 가장 무겁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62년 사이 국방경비법으로 처벌받은 사람 중 1만 4,454명(94.6%)이 1950~1953년 한국전쟁기에 집중됐고, 이 중 31%(4,462명)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특히, 1950년 10월 4일부터 김창룡 주도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활동한 7개월 동안 국방경비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7,895명에 달했다. 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체포한 사람을 심사해 죄가 무거우면 군법회의에서 처리하고, 비교적 가벼우면 민간 법원에 넘겨 범죄처벌특별조치령에 의해 처리했다.
군법회의 : 재판이 아닌 ‘살인 무기’
사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등 민간인을 별다른 절차 없이 마구 학살했다. 그러다가 계엄을 전국에 확대 선포하면서부터 재판하는 흉내를 내어 학살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26일에는 계엄선포 지역에서 군사재판을 신속하고 간략하게 진행하기 위해 대통령 긴급명령 제5호로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이하 군사재판특조령)을 공포했다.
군사재판특조령이 공포되면서 판사가 군법무관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검사와 군검찰관 양자가 군법회의 기소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또한 판사 또는 검사가 변호인도 할 수 있고 예심 조사를 생략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군이 전시 사법체계를 장악해 민간재판과 군사재판 간의 경계를 허물고, 군법회의가 민간 법원보다 압도적 지위를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피고가 제대로 변호 받기 어렵게 해,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신속하고 쉽게 받도록 했다.
그런데 1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보고서>를 보면 전시에 군사재판특조령조차 지키지 않은 채 군법회의가 불법으로 운영된 점이 확인된다.
① 마산지구 계엄고등군법회의의 경우 군사재판특조령에서 규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운영됐다. 심판관은 1명(규정에는 심판관 5명 이상)이었으며, 변호인은 선임되지 않았다. 또한 검찰관 1명이 하루에 159명을 심리해 141명을 사형으로 판결했고 수사나 공소 절차도 생략한 채 곧바로 군법회의에 넘겨 민간인을 처형했다.
②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한 뒤, 사후에 문서를 조작해 승인받기도 했다. 관련 문서에 대부분 군법회의가 열린 장소가 명시되지 않아 실제로 군법회의가 열렸는지 확실하지 않다. 관련 문서에 기소와 판결 사유도 적혀 있지 않았다.
③ 전쟁 전에 재판받아 징역 3년 이하 실형을 선고받은 기결수 중 일부를 다시 재판해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했다.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군법회의 재판은 집단학살을 위한 요식행위이자 또 다른 ‘살인 무기’였다.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 사법부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군법회의 재판을 받고 학살된 희생자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경우, 무죄 선고를 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여러 차례 재심을 통해 희생자 다수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 마산 보도연맹 사건, 부산 보도연맹 사건과 최능진 사건 등 관련사건 희생자들도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제주 4·3의 경우, 4·3 특별법을 개정해 희생자와 생존자의 특별재심과 직권재심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거꾸로 가는 2기 진실화해위는 대한민국 입법부와 사법부조차 재심 대상으로 보는 군법회의 재판의 판결을 ‘적법’하다고 보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도 ‘법률적 학살’을 되풀이할까
11월 15일. 국회 의원회관 제5간담회실에서 ‘한국전쟁 당시 법률적 학살에 대한 구제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도 군법회의 사형 판결문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진실규명 취소 위기에 처한 희생자 백락정의 조카 백남식(75) 씨가 군법회의 판결문을 들어 보이며 “진실화해위는 빨갱이 사냥을 멈추라”고 말했다. “저 같은 피해자가 상당히 많다. 국회와 법률가들이 ‘국방경비법 피해자 법률구조 합동지원단’을 꾸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에서 받은 백락정의 군법회의 판결문에는 ‘사형’이라는 주문과 ‘이적행위 사건’이라는 설명 외에 판결 이유는 공란으로 비어 있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제2조에는 다음 조항이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
제2조(진실규명의 범위)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진실규명 범위에 해당하는 사건이라도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한다. 다만, 제3조의 규정에 의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의결로 민사소송법 및 형사소송법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하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해도 형사소송법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하는 사건은 진실규명 대상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2기 진실화해위가 11월 19일 전체위원회에서 ‘전시 민간인 살인 무기’였던 군법회의 재판을 ‘적법’하다고 인정한다면, 70여 년 전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법률적 학살’을 지금 윤석열 정권이 되풀이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지금 기로에 섰다. 이승만의 원죄를 되풀이해 피해 유족에게 고통을 줬던 기관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과거 정권의 과오를 철저히 밝혀 치유와 화해의 길을 선도했던 기관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아마 11월 19일에는 남산스퀘어빌딩 자리에서 국군 17연대에 학살됐던 원혼들도 진실화해위원회의 이 회의를 지켜볼 것이다.
<참고문헌>
구술 증언 자료.
1기 진실화해위,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희생 사건 보고서」
1기 진실화해위,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보고서」
김득중(2009), “한국전쟁 전후 정치범 관련 법제의 성립과 운용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자료를 중심으로, 『사림』 제33호.
김윤경(2017), “국방경비법과 재심 ―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법학』 제25권 제3호.
이임하(2010), “한국전쟁기 부역자 처벌”, 『사림』 제26호.
한인섭(2000), “한국전쟁과 형사법 ―부역자 처벌 및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법학』 제41권 2호.
고경태, “‘단심’ 군법회의 사형 판결문 근거로…진실화해위, 진실규명 취소 시도”, <한겨레> 2024.11.15.
한홍구,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태생조차 알 수 없는 ‘살인무기’ 국방경비법… 법관님들에게는 ‘관습적으로’ 법이더라”, <한겨레21> 제533호, 2004.11.4.
* 이 글은 11월 15일 국회 의원회관 제5간담회실에서 열린 ‘한국전쟁 당시 법률적 학살에 대한 구제 방안’ 토론회에 필자가 발표한 토론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 글쓴이 김상숙은 1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다.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국가에 의한 젠더폭력 과거청산’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10월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돌베개, 2016), <민주노조, 노학연대, 그리고 변혁>(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공저),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푸른역사, 2019, 공저),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사>(선인, 2020, 공저) 등이 있다.
김상숙 기자
<2024-11-1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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