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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8·15 이후 지금까지 필화가 가장 많은 시대는 윤석열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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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한국 현대 필화사 1> 펴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설가온에서 열린 ‘한국 현대 필화사 1’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의에 답하고 있다.김종성

윤석열 정권의 언론탄압, 블랙리스트 차별을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필화(筆禍)로 규정한다. 2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의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그는 ‘글’로 인한 탄압뿐 아니라 ‘말’과 ‘행위’로 인한 탄압 역시 본질은 다 같다면서 “8·15 이후 지금까지 필화가 가장 많은 시대는 윤석열 정권”이라고 평한다.

문학평론가인 그는 지난달 25일 나온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주요점을 브리핑하는 이 자리에서 필화를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선 말·글·행위에 가해진 국가폭력’으로 넓게 정의했다. 1941년생인 그는 붓이나 펜으로 맞서는 것이나 컴퓨터·유튜브·SNS 등으로 맞서는 것이나 본질은 다 같다고 강조한다. 2024년 지금의 현상 역시 굳이 컴퓨터화(禍) 등으로 표현할 필요 없이 필화의 개념에 넣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관점으로 83년 인생을 조망할 때 필화가 가장 극심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게 그의 인식이다.

임 소장은 이번 책에서 그런 필화의 개념으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했다. 정치의식이 싹트던 10대 초중반에 진보당 조봉암을 관찰하면서 성장한 그는 시리즈 제1권인 이 책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집권기를 집중 분석했다. 출간 예정인 제2권과 제3권은 박정희 집권기와 그 이후를 다루게 된다.

그는 1950년대에 대논쟁을 유발한 정비석 장편소설 <자유부인>에도 필화의 불똥이 떨어졌다고 말한다. 국문과 교수의 부인인 오선영이 남편의 제자인 신춘호와 교제한 일을 소재로 하는 1954년의 이 작품에도 필화의 흔적이 묻어 있다고 말한다.

<서울신문>에 연재된 뒤 단행본으로 출간된 <자유부인>에는 오선영이 대학 동창인 최윤주의 집에 갔다가 가사도우미 소녀가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안방의 화장품을 몰래 바르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놀라 겁먹은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소녀를 보면서 오선영이 마음속으로 했던 생각을 그해 6월 21일의 위 신문은 이렇게 들려준다.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 도장 하나 찍어주고도 수천만 금의 뇌물을 예사로 받아먹는 이 세상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화장품을 잠깐 도용하다가 불시에 나타난 손님에게 겁을 집어먹는 아이라면 그처럼 양심적인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나라의 공무원들이 이 계집아이만큼만 양심적이었다면 오늘의 현실은 훨씬 명랑해졌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오선영의 생각을 신문 독자들은 들었지만 단행본 독자들은 듣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공직사회를 비판하는 이 부분이 필화로 불태워진 채 단행본이 출간됐다.

박완서의 회고

<한국 현대 필화사 1>은 미국에만 의존하면서 자기 국민들을 외면하는 이승만의 지배는 필(筆)의 도전을 부를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준다. 책에서 임헌영 소장은 1970년에 첫 장편소설 <나목>을 펴낸 박완서(1931~2011)의 사례를 언급한다.

임 소장은 박완서가 문학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한국전쟁 때 이승만이 보여준 무책임과 국민 무시 때문이었던 사실을 소개한다. 그는 박완서의 ‘포스트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글쓰기’에 나오는 아랫부분을 자신의 책에 인용한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이런 복수심 때문에 마음만이라도 벌레가 되지 않고 최소한의 자존심이나 지킬 수가 있었다. 문학에는 이런 힘도 있구나.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후에도 이십년이나 지난 뒤였지만 지금까지도 예감만으로 내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버팅겨준 문학의 불가사의함에 감사한다.”

인간 같지도 않은 자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문학의 힘으로 이겨냈다는 박완서의 회고는 필화가 피해의 의미만 띠지 않고 적극적 대항의 의미도 함께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필’을 들어 공격을 가하는 것이므로, 필화는 지배권력에 의한 괴롭힘인 동시에 지배권력에 대한 괴롭힘의 성격도 띠게 됨을 박완서의 회고가 일깨워준다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임헌영 소장은 미군정과 이승만 이후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필화의 공통점을 미국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의 한국 지배에서 찾는다. 이들의 지배이념에 대한 글·말·행위에 의한 저항이 필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그는 반소·반북·반중국에 기초한 미국의 지배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것들이 금지되고 이 금지를 어기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들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고 말한다. 미군정에서 이승만·박정희를 거쳐 윤석열에 이르는 대부분의 한국 위정자들은 한국 고유의 이익보다는 일차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말과 글과 행위를 억눌렀던 것이다.

미군정기 필화의 가장 혹독한 희생자

▲<한국 현대 필화사 1> – 필화의 문학 사회사소명출판

이로 인해 역대급 필화를 입었으면서도 지금은 기억도 되지 않는 인물 중 하나가 임 소장의 책에 나오는 작가 강용흘(1903~1972)이다. “함남 흥원 출신인 그는 함흥영생중학교를 졸업, 항일운동으로 중국-일본-캐나다를 거쳐 미 보스턴대학에서 의학, 하버드대학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한 후 정착”했다면서 “미국과 유럽에 걸쳐 왕성한 문학연구 활약으로 일약 유명”했고 “펄 벅과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책은 소개한다.

책은 “재미교민문학 1세대로 매우 서정적인 탁월한 소설가로만 기억하는 그가 8·15 후 미군정의 출판부장을 거쳐 1947~1948년간 주한미군 제24군단 민간정보부대 정치분석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강용흘이 미군정을 상대로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아 필화를 겪게 된 사실을 소개한다.

강용흘은 이승만과 친일 경찰을 축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파 성향을 가진 백범 김구도 약화시켜야 한다면서 김규식을 비롯한 양심적 중도파를 지지해야 한다고 미군정에 건의했다. 책은 그가 미군정을 상대로 “한국의 지도자로 김규식을 지지할 것을 강조하며, 한국인 관리를 교체하고 특히 경찰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한다.

강용흘은 이승만·김구뿐 아니라 한국 지배이데올로기의 정점에 있는 미군정에 대해서도 비판의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미군정은 이미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국제적 책임을 저버린 채 분단 고착화의 정책을 위해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암살과 탄압을 강행하고 있음을 적시”했다고 책은 알려준다. 자기에게 월급을 주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도 할 말은 했던 것이다.

강용흘의 ‘필’도 ‘화’를 불러일으켰다. 책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정면 비판하다가 귀국 조치당한 후 공산주의자란 혐의를 받아 후버 FBI 국장의 직접 지휘로 정밀 수사를 받았으나 어떤 혐의도 못 찾았지만 강용흘은 대학을 비롯한 모든 직제에서 배제당한 채 만년에는 불우하고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고 말한다. “아마 미군정기 필화의 가장 혹독한 희생자는 바로 강용흘일 것”이라고 책은 말한다.

이승만을 올바로 알게 되기를

필화는 피해자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그에 대한 망각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필화의 여파로 세상에서 잊혀지는 일은 강용흘뿐 아니라 오기영(1909~?)에게도 있었다.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전쟁 이전의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오기영을 거명한 임헌영 소장은 그의 사상이 함석헌과 리영희로 이어졌다면서 그가 이승만 정권 초반에 핍박을 받은 것은 미국도 소련도 아닌 우리 민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책에서 임 소장은 오기영의 대표작인 <민족의 비원> 서문을 근거로 그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에게는 사상은 두 가지가 있으나 조국은 하나뿐이다. 어떠한 사상이거나 그것이 하나의 조국을 위하여 진실된 조선인의, 조선민족의 사상이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중략) ··· 그러므로 아무리 미국을 위하여 좋은 사상일지라도, 소련을 위하여 좋은 사상일지라도 우리가 곧장 미국인이 아니요 소련인이 아닌 바에 ‘미’나 ‘소’의 사상이 그대로 조선민족의 사상일 수는 없어야 마땅하다.”

오기영도 강용흘처럼 중도 노선을 지향했다. 그래서 “좌우파로부터 다 공격을 당했다”고 책은 말한다. 지배권력뿐 아니라 좌우가 다 가하는 압박은 그가 1949월 6월 황해도 배천으로 떠나는 원인이 됐다. 남한에서는 이를 월북이나 북행으로 불렀지만, 그곳이 고향인 그의 입장에서는 귀향이었다. 오기영에게 발생한 필화는 그가 남한 독자들을 잃게 되는 원인이 됐다. 강용흘의 사례와 더불어 이 사례는 좌파에 비해 중도파가 필화에 더 취약한 현실을 보여준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필화의 관점에서 이승만 집권기를 조명한 이번 책을 이승만을 좋아하는 국민분들께서 꼭 좀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간담회에서 피력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을 올바로 알게 되기를 그는 희망했다. 이 같은 그의 ‘유혹’에 빠져 이 책을 읽게 되면 1950년에 박완서가 느낀 충동을 이 책 독자들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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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8·15 이후 지금까지 필화가 가장 많은 시대는 윤석열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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