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마산정수장 터에 남아있는 사이토 총독의 휘호석판 ‘산명수청(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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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3]

마산정수장 터에 남아있는
사이토 총독의 휘호석판 ‘산명수청(1930년)’
뇌물사건을 일으킨 야마나시 총독의 ‘피운결수(披雲決水)’ 휘호는 폐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마산(馬山), 진해(鎭海), 충무(忠武), 장승포(長承浦), 삼천포(三千浦) …….

이들은 한때 시(市)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했으나 도농복합시의 탄생과 통합창원시의 출범과 더불어 지금은 전면에서 사라진 — 우연찮게도 전부 항구도시이기도 한 — 지역들의 이름이다. 이들 가운데 1899년 5월 1일 이래 개항장이었던 마산은 조선총독부가 공식 출범하던 1910년 10월 1일에 맞춰 ‘종래의 창원부 일원(昌原府 一圓)’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마산부(馬山府)’의 이름으로 처음 전면에 등장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에 이르러서는 각국거류지(各國居留地)와 그 주변을 ‘마산부’로 따로 떼어내고 잔여 지역은 창원군(昌原郡)으로 개편되는 변화가 있었다.

일찍이 일제는 개항과 함께 이곳에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을 두었다가 그 이듬해인 1900년 4월 19일에 ‘마산영사관(馬山領事館)’을 정식으로 개설한 바 있었다. 그 이후 국권침탈과정에서 1906년 2월 1일에는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에 따라 “종전 일본영사관이 담당했던 사무와 관할구역 내 경찰, 재판, 감옥사무 등을 관장하는 통감부의 소속기구”로서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 경상도 서남부 일대를 관할)’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진해항(鎭海港)에 군항(軍港)을 설치한다는 결정이 구체화하면서 진해만(鎭海灣) 일대에서 군용지 수용절차가 착착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1911년 1월 1일에는 제5해군구(第五海軍區;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가 창설되어 대마(對馬, 쓰시마) 및 조선(朝鮮)의 해안해면(海岸海面) 일체가 이곳의 관할로 귀속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새로 구축되는 진해만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저도와 가덕도에 배치되어 있던 포병대(砲兵隊)는 1909년 7월 31일에 마산포에 신축병영이 준공되자 이때 진해만요새사령부(그 후 1913년 12월 19일에 진해 좌천리 신축청사로 재이전)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 처음 터를 잡았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문서과에서 발행하던 총독부 기관지(機關誌)인 『조선(朝鮮)』 1924년 5월호를 뒤지다 보니, 98쪽 부분에 「사이토만(齋藤灣)과 아리요시고개(有吉峙)」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눈에 띈다. 여기에는 해군대신(海軍大臣; 재임 1906.1.7~1914.4.16) 시절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나중에 조선총독)가 진해군항 예정지를 몸소 시찰하였다고 하여 진해 지역에 ‘사이토만’으로 명명된 곳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비풍리(飛風里)에서 진창(鎭昌)으로 통하는 도로는 장복산(長福山) 터널 위를 통과한다. 이 고개는 왼쪽으로 창원평야를 한눈에 거느리고, 오른쪽에는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큰 호수와 흡사한 진해만(鎭海灣)이 내려다보여 고갯마루가 서로 부딪히는 곳이 실로 웅대 신비한 승경(勝景)으로 ‘천하무류(天下無類; 천하에 비할 데 없다)’라고 찬탄하기에 충분한 장소이다. 이곳을 ‘안면치[安眠峙; 안민고개(安民峙)의 잘못]’로 부른 것은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었는데, 올봄에 아리요시 정무총감(有吉 政務總監)이 이곳을 시찰했던 것을 호기(好機)로 하여 이를 기념하고자 ‘아리요시고개(有吉峙)’라고 개칭했다. 진해에는 현 사이토 총독이 해군대신(海軍大臣) 시대의 시찰기념으로 명명했던 ‘사이토만(齋藤灣)’이 있어 지금 또 아리요시고개가 등장한 것은 흥미로운 대조이다. 이 웅대한 경색(景色)은 머지않아 철도의 개통에 따라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선전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탓인지 개항장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마산 지역에는 일제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눈에 띄기도 한다. 마산 가포에 자리한 월영아파트 앞 마산-52호 공원(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707번지)의 배수구 위쪽에 보이는 ‘선통물(善通物)’ 휘호 석판도 이러한 종류의 하나이다. 이곳은 원래 국군통합병원(마산)이 있던 지역이자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산중포병대대(馬山重砲兵大隊)가 있던 공간이며, 지난 1995년에 부지 일체가 매각되면서 지금의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이곳의 실물 편액을 직접 살펴보면 왼쪽 끝에 ‘호당 씀(浩堂書)’이라는 표시가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호당’은 바로 제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호(號)이다. 이 글씨는 마산 자복동(滋福洞, 자복리)에 건설중이던 진해만요새사령부(나중의 마산중포병대대 자리) 구내 돌다리의 홍예(虹蜺) 위쪽에 부착하기 위해 한국주차군사령관 시절(재임 1904.9.8~1908.12.21)의 하세가와가 써서 내려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문신미술관(文信美術館)과 창원시립마산박물관이 나란히 자리한 무학산 자락의 추산근린공원 쪽을 찾아 올라가면 이곳에도 몇 점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다. 박물관 주차장의 화단에 늘어놓은 ‘수덕무강(水德无疆; 물의 덕은 끝이 없어라)’과 ‘산명수청(山明水淸; 산 좋고 물이 맑도다)’ 돌편액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수덕무강’의 석판 좌측에는 “소화 경오년(1930년) 봄, 이타가키 타다지 씀(昭和 庚午春 板垣只二書)”이라는 표시가 남아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타가키 타다지는 그 당시 마산부윤(馬山府尹; 재임 1928. 3. 30 ~ 1930. 10. 1)이던 인물이다.

이와는 달리 ‘산명수청’의 석판 쪽에는 일자 표기가 없이 “자작 사이토 마코토 씀(子爵齋藤實書)”이라는 표시만 남아있다. 이 글씨들은 모두 마산정수장의 배수지 출입문 양쪽에 부착되어 있었다가 지난 1995년에 따로 떼어낸 것이며, 『경성일보』 1930년4월1일자에수록된「마산수도 통수식(馬山水道 通水式), 30일(日) 성대하게 거행되다」 제하의 기사에 함께 소개된 관련 보도사진을 통해 이것이 마산상수도의 준공 때 사이토 총독이 직접 내려준 글씨라는 사실이 잘 확인된다.

마산 지역에서 상수도 시설이 처음 등장하게 된 배경과 수원지, 여과지, 배수지 등의 건립과정에 대해서는 『조선(朝鮮)』1930년 5월호에 게재된 「휘보(彙報): 마산상수도(馬山上水道) 준성(竣成)」(142~143쪽)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잘 정리되어 있다.

마산항(馬山港)은 조선의 동남해안 항행선박의 중요한 항이며, 또 그 배면(背面)에는 국사 양철도(國私 兩鐵道)가 있어서 해륙(海陸)의 교통이 덧붙어 있음으로써 백화(百貨)가 늘 집산(集散)되고 상세(商勢)도 따라서 은성(殷盛)의 영역으로 나아가니 축차(逐次) 도시제반의 시설정돈과 더불어 장래 익익(益益) 팽창발전의 기운(機運)으로 향하려는 상세(狀勢)이지만, 이 지역은 종래 보건상의 제일요소인 음료수(飮料水)가 결핍하여 매년 여름철에 이르면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정수(井水, 우물물)가 모조리 고갈(枯渴)되어 주민의 곤비(困憊, 지쳐 고단함)가 차마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것은 보건상의 위협일 뿐만 아니라 토지의 번영을 조애(阻碍)함이 심대하므로 위생상의 보안(保安) 및 부세(府勢)의 진전에 이바지하도록 부당국(府當局)은 처음에 일반거주민으로부터 상수도 포설(上水道 布設)의 논의가 제기되자 대정 15년(1926년)에 드디어 이것의 포설과 더불어 지방비 및 국고의 보조를 신청하기에 이르렀으며, 소화 2년(1927년) 3월로써 4개년 계속사업(四箇年 繼續事業)으로서 국고 및 지방비에서 25만 원(圓)의 보조인가(補助認可)를 받았고, 부채(府債) 20만 원을 더하여 45만 원으로써 소화 3년(1928년) 5월 25일 본공사(本工事)를 일으켜 본년(本年, 1930년) 3월 20일로써 완전히 공사의 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수원지(水源地)는 창원군 창원면 반룡산(昌原郡 昌原面 盤龍山)의 계곡을 막아 언제(堰堤)를 쌓고 우수(雨水)를 저류(貯溜)하는 것으로 하였고, 마산지방 다년(多年)의 우수량(雨水量)을 평균하여 유효유출률(有效流出率)을 3할(三割)로 하고 인구(人口) 1인당(一人當)의 음료수를 계산하여 급수부족량(給水不足量)을 저수하는 것으로 했던 것이다. 언제는 조석입 혼응토(粗石入 混凝土, 거친 돌을 넣은 콘크리트)로써 제체(堤體, 댐)를 축조하였고, 그 내외 양면은 할석포적(割石布積, 깬 돌 쌓아올리기)에 몰타르를 사용하였으며 수정(水井), 여과지(濾過池), 배수지(配水池) 등이 유감없이 축조되어 있다.

이에 따라 1928년 5월 25일에는 자산동 정수지(玆山洞 淨水地)에서 마산신사(馬山神社)의 신관(神官)에 의해 수불식(修祓式)이 거행된 것을 시작으로 이타가키 마산부윤(板垣 馬山府尹)과 마츠이 분스케 창원군수(松井文輔 昌原郡守) 등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수도 부설공사 기공식이 성대하게 열리게 되었다. 곧이어 공사청부입찰(工事請負入札)을 통해 송수선로 축조를 위한 철관부설 굴착 및 매설공사는 오쿠보 텐키치(大久保傳吉)가, 수원지 언제공사(水源池 堰堤工事, 1928.10.31~1930.3.20)는 혼다 츠치고로(本田槌五郞)가, 그리고 정수장의 정수지(淨水池) 및 배수지(配水池) 설치공사(1929.7.30~1929.11.13)는 조선토목공업사(朝鮮土木工業社, 용산)가 각각 나눠 맡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0년 3월 30일에 이르러 상수도의 공급 개시를 알리는 ‘통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매일신보』 1930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공사기(工事期)를 단축(短縮)하여 마산상수도(馬山上水道) 준공(竣工), 25일에 검사까지 마치고 30일에 통수식(通水式) 거행(擧行)」 제하의 기사에는 그간의 공사진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산(馬山)] 수십 년을 두고 요망하였던 마산부 상수도 부설공사는 필경(畢竟) 기운(機運)의 도래함을 따라 소화 2년(1927년) 2월부터 공비(工費) 45만 원 내(內) 국고(國庫) 22만 5천 원, 지방보조(地方補助) 7만 5천 원, 부채(府債) 15만 원으로써 4개년간 계획리(計劃裡)에서 공사에 착수하였던 바 일반부민은 공사의 완성을 급촉(急促)함으로 인(因)하여 연도할(年度割)을 1년간 단축하고 수원저수지 언제(水源貯水池 堰堤), 정수장(淨水場) 및 송수철관(送水鐵管)의 부설공사(敷設工事)를 진척중이던 바 정수철관 인입공사를 제하고 수원저수지 언제축조공사가 다소 지연(多少 遲延)되었는데 본월 19일 준공계출(竣工屆出)에 의(依)하여 낙성검사(落成檢査)한 결과 약간의 불충분한 곳이 있으므로 지난 25일 한(限)하고 개수(改修)함을 따라 검사를 종료하였다는데 오는 30일은 자산동 정수장(玆山洞 淨水場)에서 통수식을 거행하기로 예정하고 준비중인데 당일(當日)은 사이토 총독 대리(齋藤總督代理), 코다마 정무총감 대리(兒玉政務總監代理), 토목국 관계자 및 본도지사, 내무부장, 토목과장, 도내유지, 마산부 공직자 및 은행 회사 주뇌자(主腦者), 정동총대(町洞總代) 등을 초대하여 성대한 통수식을 거행하리라 한다.

그런데 마산상수도의 통수식과 관련한 신문기사 등을 정리하다보니 마산상수도 수원지(즉, 봉암저수지)에는 애당초 야마나시 총독이 쓴 편액이 달려 있었던 흔적이 드러난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신문』 1930년 2월 8일자에 수록된 「문제가 된 야마나시 전총독(山梨 前總督)의 글씨, 마산상수도수원지(馬山上水道水源地)에 더럽다고 취체(取替, 교체)한다」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마산(馬山)] 야마나시 전 조선총독에 얽힌 의옥사건(疑獄事件) 발생 이래 야마나시 대장(山梨大將)의 위신(威信)이 땅에 떨어져 이런저런 비평(批評)이 있는데 동(同) 대장의 휘호(揮毫)에까지 누를 끼치게 되어, 이번에 마산에서는 학교, 기타에 걸린 액면(額面)까지 취외(取外, 떼어냄)하라고 매도(駡倒)하는 것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대구모의원(大邱某醫院)에서도 위와 같은 야마나시 대장이 휘호한 액면에 대해 실례(失禮)를 저질렀지 않은가 하는 소문도 있었지만, 마산에서는 또 다시 야마나시 대장의 액면에 관해 물의(物議)를 일으킨 모양으로 마산수도계(馬山水道係)에서는 상수도수원지(上水道水源池)에 있는 동(同) 대장의 휘호인 ‘피운결수(披雲決水)’의 넉자는 더럽다는 비평(批評)이 있는 탓에 이 편액을 취체(取替)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지난 6일부로써 현임(現任) 사이토 총독(齋藤 總督)의 휘호를 청하여 다시 교체하도록 곤도 비서(近藤 秘書) 앞으로 의뢰장(依賴狀)을 보냈다고 하니.

여기에 나오는 ‘피운결수’는 “구름을 헤쳐 물이 넘치도다”라는 정도의 의미인 듯하다. 제4대 조선총독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재임 1927.12.10~1929.8.17)는 원래부터 이른바 ‘배금장군(拜金將軍)’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다가 결국에 부산, 군산, 대구 등 세 곳의 취인소 설립인가(取引所 設立認可)와 동래온천 토지불하(東萊溫川 土地拂下)와 관련한 수회사건(收賄事件, 수뢰사건)을 일으켜 총독의 자리에서 경질된 이후 독직(瀆職) 혐의로 불구속 기소까지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마산 지역에서는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와 소학교(小學校)에 걸린 야마니시 전 총독의 휘호와 관련된 편액은 “아동교육상에 있어서 재미없으므로 이를 떼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는 학교조합의원(學校組合議員)도 나타났다. 모르긴 해도 제아무리 총독일지라도 행적이 추악한 작자의 글씨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마산상수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창원군 창원면 반룡산(昌原郡 昌原面 盤龍山; 팔용산)에 세운 것으로 소개되어 있는 마산상수도 수원지는 통칭 ‘봉암저수지’라고도 하는데, 지난 2005년 9월 14일자로 ‘마산 봉암수원지(馬山 鳳岩水源池,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산88번지)’라는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199호로 등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현재 이곳의 수문 상단에는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라고 쓴 활자체 임시 간판이 겉에 덧대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토목사업지(朝鮮土木事業誌, 소화3년도까지)』(1937)를 보면 1178쪽에 마산수원지 언제(堰堤, 댐)의 전경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그 안쪽에 부착되어 있던 — ‘피운결수’와는 글자 모양이 다르게 보이는 — 원래의 편액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포착되어 있다. 아마도 야마나시 총독이 쓴 편액을 떼어내고 새로 만든 대체품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면 이것 역시 사이토 총독의 글씨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이 글씨가 정확하게 무슨 내용인지 그것이 자꾸만 궁금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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