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신채호 선생 추도사와
순국한 조선혁명군 동지 약력
편집자주 – 이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민족혁명』 제2호(1936.4.15)에 실린 것이다.
[출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7: 조선민족혁명당 및 기타 정당』, 국사편찬위원회, 2009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추도함
진인(震人)
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은 근세 조선민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정치적 선각자의 하나며, 진정 열렬한 혁명가의 하나이며, 단연 인류를 초월한 천재적 사학가이며, 그리고 망인국종(亡人國種)의 가련한 비고(悲苦)를 철두철미하게 비상(備嘗)한 망국 조선민족의 대표적 표본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명칭이 처음으로 조선 전국에 알려지기는 선생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신문기자 시대로부터이었다. 왜적의 침략으로 인하여 4천여 년 조국이 조석에 경복(傾覆)되고 있고, 노예의 철강이 민족의 두상에 박근(迫近)하고 있거늘 부패한 정부와 우매한 민중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봉건적 심몽(深夢)에 방첨(方甛)하고 있던 당시 한말의 정세에 있어서 오직 선각한 선생은 1개의 빈곤한 청년학생으로서 서안(書案)을 일척(一擲)하고 신문기자가 되어서 전국적 궐기에 의한 국가의 구망(救亡)을 절규하였던 것이다.
그 열렬한 애국사상, 명확한 논리, 그리고 사람의 가슴을 짜개고 붇는 듯한 그의 독특한 필치에서 짜서 나오는 신문사설과 논문은 보통의 신문이 아니고 이는 곧 군중을 격동하는 애국의 혈화(血火)이었으며, 간적(奸賊)을 참수하는 정의의 상검(霜劍)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언론이 기재된 신문이 전국에 전파될 때마다 전국의 방방곡곡에서는 기천기만의 애국지사가 용출하고, 의병이 궐기하고, 광범한 군중이 정치적 사상에 각성되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문기자이냐? 선생 이전에 이같은 위대한 신문기자를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고, 선생 이후에 또한 이것을 볼 수 없었다. 아마 전세계를 두고 찾는다 하여도 이같은 위대한 신문기자를 발견하기 곤란할 것이다.
선생의 신문에 의하여 격동한 당시의 지사와 의병과 군중은 마침내 조선은 왜적의 침략에서는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에서 전승된 정신과 기개는 조선이 망한 후에 조선민족의 혁명적 정신이 되고 혼이 되어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수시수처(隨時隨處)의 민족적 투쟁으로서 계속되었으며 또 계속되고 있다.
조선민족의 쇠망에 통심한 선생은 조선민족의 쇠망한 원인을 조선민족 자신의 역사에서 심멱(尋覓)하려 하였다. 선생은 그 쇠망의 법칙의 심멱에 의하여 영구한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사를 연구하게 한 직접의 동기였다.
조선역사의 연구에 있어서의 선생의 천재적 공적은 단연 조선민족의 국보적 자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학단(學壇)의 경이적 존재였다.
그 탁월한 학문적 안광과 군리(羣利)한 과학적 천감(穿鑒)과 해박정밀한 고증은 드디어 조선역사로 하여 누천년 노예적 전거에서 해방하여 병연(炳然)한 민족적 발전의 사적으로서 나타나게 하였으며 동시에 조선민족이 토매(土昧)한 만맥(蠻貊) 종족의 자손이 아니고 4천여 년 민족인 사실을 증명하여 내었다.
선생의 조선사에 관한 학설에 대하여 현재 일부분의 후학들이 논란하고 있는 점도 있다고 한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사학의 방법이 또한 발전되어 왔으나 현재에서 본다면 선생의 조선사에 대한 학설에서도 그 방법상 체제에서나 기타의 부문 문제에서나 약간의 관찰의 차이점이 불무(不無)할 것은 필연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선생의 조선사에 관한 천재적 공적의 기초가 없었다면 금일의 문제는 문제로서 발생도 되지 못하고 이들의 후학들은 아직 □□한 고거(古據)에서 막연한 □□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각도에서 본다고 하여도 근세 조선민족에서 산출된 절세의 천재이고 고상위대한 인격자임에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천재의 인격을 구전(俱全)하였으니 비록 그 자신은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의 지지와 응원은 필연히 부수될 현상이겠거늘 그러나 선생이 불행한 조선민족의 1인으로서 산생된 소이는 그 천재와 인격을 위하여 발양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로 그의 일생이 기한(飢寒)과 능욕에서 구박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선생은 본시 빈한한 가정의 출생으로서 유시(幼時)로부터 남루와 지식(紙食)에서 성장하였다. 참담한 고학으로서 겨우 성년이 되던 때는 벌써 그가 혁명가로서 출신하던 그때이니 언제 가정을 알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선생이 해외에 망명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부터의 그의 현실생활의 참고(慘苦)는 실로 형언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생래의 빈곤에서 □ □된 선생은 고난을 □組하는 점에서도 또한 천재이었다. 인생이 감내할 수 있는 생활이라면 선생은 이것으로서 만족할 뿐이었다. 그러나 무정한 현실은 이같이 겸손한 선생에게 대해서 최후의 기한과 능욕의 학대를 가중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선생이 적에게 체포될 그때까지 계속되었었다. 적의 대련감옥에서 7년 형고(刑苦)의 긴 세월 동안 신음하고 있던 선생은 드디어 수월 전에 그 위대한 민족적 포부와 만고의 원한을 가슴속에 품은 채로 바야흐로 그의 열애하는 조선민족의 다사(多事)한 시절을 등에 지고 영원히 이 세계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아 이 얼마나 조선민족을 위하여 비통한 일미여 세깚니류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냐?
절세의 천재 그리고 위대한 혁명가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벌써 이 세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선생이 조선민족에게 남겨준 그 위대한 공적과 고상한 기품은 세계로부터 영원히 무궁할 것이다.
최근 만주에서 전사 순의(殉義)된 동지들의 약력
본지 전호 「만주소식」에서 이미 발표한 바 있거니와 그들의 운동은 그 험악한 난국에서도 일반동지들의 필사적 노력과 백절불굴의 항쟁의 대가로서 장족적 발전과 예상 외의 성과를 얻게 되며 재래 양적 표면운동에서 현하 질적 이면운동에로 또한 산만 무계획적 운동에서 과학적 조직적 운동에로 활발한 보무(步武)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음은 독자 제위 동지와 함께 작약(雀躍)을 마지 않았던 것이다.
여사(如斯)한 혁명적 성과는 여러 동지들의 희생적 선혈의 대가임을 오인은 잘 알고 있다. 하물며 만주와 같이 관국이 어설프고 강적의 창림탄우리(槍林彈雨裏)에서 100척 간두의 최후 일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만큼 가히 무처무적(無處無敵)이오 무일불전(無日不戰)임이 사실이니 그와 같이 장기적 지구전을 계속하는 터에 어찌 다소의 희생이 없기를 바랄 수 있느냐.
재작년 이래 우리의 영용한 기허(幾許)의 중요 동지들의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혁명군 전임 총사령 양하산(梁荷山) 동지 및 동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동지의 비보를 위시하여 해군(該軍) 제2로 사령 장명도(張明道) 동지, 해군 제1로 사령부 참모장 안송(安松) 동지, 동 제2로 사령부 부관장 전응두(田應斗), 동 김광욱(金光旭) 양 동지, 동 제3중 제1대장 정봉길(鄭鳳吉) 동지, 동 제4중대 부관 전응옥(全應玉) 동지 등 30여 명의 중요 동지의 부음을 인접하게 되었고 최근에 이르러 해군 제3로 사령부 참모장 김득해(金得海) 동지가 적에게 피포되어 신음중인바 조만간 취의(就義)될 터이라 하며 해군 총사령 연락위원 엽경산(葉景山) 동지도 적에게 희생되었다는 애보를 접하게 되었다.
고 양하산 및 양세봉 동지의 약력은 이미 발표되었기 때문에 약하려 하며 이상 기타 30여 명 동지들의 약력에는 지면의 제한으로 자세한 역사를 일일이 쓰지 못하고 극히 개괄 서술에 그치려 한다.
고 장명도 동지 약력
고 장명도 동지의 이름은 세량(世良).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종년(終年) 32세의 청년투사이었다. 성격은 가장 활발 민첩했고 두뇌는 자못 총명 지혜롭고 사무처리의 능률이 비상히 좋았다. 동지는 17세 때부터 약관하여 출세 혁명사업에 종사하였다. 의군부(義軍府) 통의부(統義府)에서 내지의 혁명선전에 대한 호성적이 있었으며 동지 손에 왜적의 머리가 얼마나 날아갔으며 적의 시설도 다수히 파괴되었다. 18세 때에 내지에 들어가 적과 맹렬히 싸우다가 적탄에 동지의 얼굴과 뺨이 분쇄되어 그 상흔은 동지 일생에 못잊을 기념품으로 되어 있던 것이다.
동지는 1개 병사로 10여 년간 영용 투쟁의 적공(績功)으로써 해군 소대장, 중대장, 참모장 등 직을 차례로 역임했고 임종 수개월 전에 조선혁명군 제1로 사령직에 피임되어 시무하다가 1935년 3월 6일 상오 11시에 요녕성 환인현 표자동에서 적에게 포위 습격되어 적탄을 맞고 위병 동지 이영수(李永洙) 군과 함께 순의되었다. 동지 가정에는 아직 30내외의 애처가 있고 강보에서 기어다니는 3형제의 남자아가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만주 산골에서 자친(慈親)의 양육리에 빈궁히 자라나고 있다.
고 정봉길 동지 약력
고 정봉길 동지의 원적은 평안북도 철산군, 종년 28세의 청년투사이었다. 동지의 성격은 침착 묵중하였고 평시 소언(少言) 웃었다. 임사(臨事)에 노성연달(老成練達)하였고 단체 기율을 엄수하는 것과 사명 집행, 상부 명령 복종이 누구보다 선량했던 것이며 가장 용감하여 모험성이 풍부했으며 백발백중하는 선사(善射)의 기술의 특장이 있어 주구 토벌, 적기관 파괴하는 공작에 늘 선봉장 노릇을 맡아두고 했다. 동지 손에 숙청된 주구배가 그 얼마일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동지는 20세 때부터 조선혁명군에 편입한 이래 근 10년간 하루같이 싸웠다. 병사로부터 계급을 밟아 1931년도에 해군 제2중대 제1소대장이 되어 1932년 봄에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흥경현, 청원현 습격에 호성적을 얻어 전공의 성망(聲望)이 한중인 사이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1934년 9월경에 요녕성 관전현 하류하(下流河)에서 왜적과 격전을 56일 계속하다가 부상 피포되어 순의되었다. 동지가 적에게 포로되는 당시에 간활한 왜적은 감언이설로서 투항 귀순하라고 유혹 위협의 정책을 병롱(並弄)해보았으나 동지는 오히려 유창한 일어로 “이것은 혁명자에 대한 모욕이다. 혁명자가 혁명을 하다가 적수에 잡혔으면 죽을 뿐이다. 그런 비열한 수작으로 신성한 혁명자를 농하지 말라!”라고 큰소리로 외쳐 적의 면상에 침을 뱉었었다. 양심이 없는 왜적일망정 동지의 인격을 내심으로 흠패감복(欽佩感服)함을 마지 못했을 것이다. 연이나 적은 동지의 가슴에 창을 놓았다. 동지는 창 맞은 가슴을 움켜쥐고 단풍이 덮인 만주땅 위에 쓰러지며 성공의 웃음을 띠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고 전응두 동지 약력
고 전응두 동지의 이름은 의근(義根), 호는 추정(秋汀). 원적은 평안북도 선천군, 종년은 36세의 청년투사였다. 성격은 활발 화평하여 동지를 대하나 일반민중을 대하나 항상 화평한 웃음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에 ‘화평신(和平神)’이란 아호까지 얻었던 것이다. 동지는 일찍이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를 필업하고 국망신하재(國亡身何在)의 느낌을 가지고 상급학교의 승학도 그만 단념하고 만주로 뛰어 건너와 직접 창을 메고 제일선에 서서 적과 육박 항전을 개시한 것이 우금 15년 전이었고 동지는 소대장으로부터 중대 부관, 심지어 1934년 가을 조선혁명군 제2로 사령부 관장의 직에 임하여 시무하다가 1935년 2월경에 요녕성 집패(輯覇) 왕조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적탄을 받고 순국되었다. 동지의 가정에는 70 백발 노모가 계시고 어린 두 남매를 기르고 있는 젊은 애처가 있다.
고 김광욱 동지 약력
고 김광욱 동지의 이름은 우민(友民),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종년 27세의 청년투사였다. 성격은 가장 뚝뚝하고 과단성이 많았다. 유시(幼時)부터 중국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중국어에 유창하여 혁명선에 참가한 후로부터 중국동지와 연결하는 공작에 많은 공헌이 있었다. 20세 때부터 조선혁명군에 편입하여 해군 사령부 위대(衛隊) 대장, 그 후 해군 총사령부 부관의 직에 임하여 시무하다가 1935년 2월경에 해군 제2로 사령부 부관장이 되어 동년 5월경에 부하 80명을 이끌고 요녕성 집안현 패왕조가를 야간에 진공하다가 적의 비탄에 명중되어 현장에서 순국되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지는 중국어에 능함으로 의용군 수령 당취호(唐聚五) 당시에 해 당군 총사령 선전대대장이 되어 만주 동변 각지에 답행하면서 한중 민중에 대한 혁명적 선전에 많은 성적을 내었으며 중국의용군의 우리교포에 대한 오해를 이해시켜 우리 교포의 무리한 학살을 면케 한 공적이 있다. 동지의 가정에는 70 넘으신 조부모 두 분이 계시고 20 내외의 애처가 남아있다.
고 안송 동지 약력
고 안송 동지의 이름은 은송(隱松), 자는 효당(曉堂), 원적은 황해도 해주군, 종년 40세의 장년투사였다. 동지의 성격은 침묵 평화했고 가장 충후장자(忠厚長者)의 풍모가 풍부했었다. 그러나 공사에 임하여 과감 단행하여 사무 취급에 공정 무자비했다. 동지는 일찍이 내지에서 중학교를 필업하고 만주로 건너와 통화현 금두벌 방면과 흥경현 지방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교민동포의 자제를 가르침에 있어 10년간에 많은 성적을 내었으며 더구나 1925년경에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정의부(正義府) 흥화지방공소 집행위원이 되어 다년간 재무 책임을 지고 일했고 그 후 해 공소 검무감직(檢務監職)에 종사하다가 1930년에 국민부(國民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어 해 중앙재무부장 책임에 당했고 1935년 1월부터 조선혁명군 제2로 사령부 참모장의 직에 당하여 복무하다가 동 11월 15일에 부하 6명 동지를 영솔하고 요녕성 흥경현 석인구에 공간(公幹)으로 출장했다가 일만군(日滿軍) 30여 명에게 포위되어 습격을 받던 중, 기타 6명에 동지는 다행히 무사히 퇴각했고 안송 동지는 본래 다년간 위병으로 신체가 건전치 못하던 관계로 미처 퇴각치 못하여 적수에 피로수해(被虜受害)되었다. 동지는 그렇게 건전한 신체의 소유자도 못되면서 빙천설지인 만주에서 매일 산중생활을 하며 악전고투하다가 40세의 한많은 일생을 일기로 하고 영원히 오지 못할 불귀(不歸)의 객이 된 것이다. 동지의 가정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20 남은 장성한 아들과 자부가 있고 10세 미만의 두 남매가 자라고 있다.
고 김응옥 동지 약력
고 김응옥 동지의 원적은 평북 강계군, 종년 38세의 장년투사였다. 1933년에 조선혁명군에 편입되어 해군 제4중대 부관으로 시무하다가 1934년 12월경에 요녕성 통화현 강산령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불행히 적탄을 받고 순국한 것이다(193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