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윤덕영
아베 신조(3188일)보다는 짧지만 당시로서는 최장수 총리 재임 기록(2720일)의 보유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된 뒤, 일제와 친일세력은 계엄령 상태에서 대한제국 죽이기에 착수했다. 이 계엄은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일본 땅이 됐다.
그때 맹활약한 인물이 윤덕영(1873~1940)이다. 그의 기여도가 이완용에 뒤지지 않는다고 일본 정부는 평했다. 내각 상훈국이 1940년에 펴낸 <쇼와 15년 공문잡찬>은 윤덕영의 공적을 정리하면서 “위 사람은 조선 굴지의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 뒤 “한국 병합은 일면 이완용 후작의 활동에 의해 성사되었지만, 다른 한 측면은 윤 자작이 내부에서 활동한 결과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윤덕영의 숨은 공로가 이완용의 드러난 공로에 뒤지지 않는다고 봤다.
1910년 경술국치를 주도한 경술국적 윤덕영이 그런 활약을 펼친 데는 계엄령이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그해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되기 전에 한국통감부는 한국인들을 겁주고 억누를 목적으로 계엄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지금의 서울 용산이 가장 분주해졌다.
2021년에 <유관순 연구> 제26권 제2호가 실은 김종호 호서대 교수의 논문 ‘일제의 한국 침략과 국가책임’은 1910년 5월 30일 취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한국통감이 “통감유고(統監諭告)를 발하여 조선 전역에 계엄 태세를 발령하였다”라고 말한다. 논문에 따르면, 1910년판 ‘서울의 밤’ 당시의 계엄군은 이런 지침을 받았다.
“기병 제2연대 본부병 중대를 용산으로 초치하고, 보병에 대해서는 총계 15개 중대를 모을 것.”
“극비 중에 준비를 갖추라.”
“각 부대의 이동 시각을 정확히 지정하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한밤중에 큰 길을 지나가지 않고 용산에 도착시킬 것.”
논문은 “각 성문, 요충, 각 왕궁·통감부·사령관저·각원저(閣員邸) 등은 삼엄한 경비를” 했다고 기술한다. 내각 성원의 저택까지 삼엄하게 경비하는 속에서 병합조약이 강제됐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다. “계엄 태세 안에서의 조인은 폭력적 강제”였다고 논문은 지적한다.
그런 험악한 상태에서 윤덕영은 황제를 압박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5권에 수록된 위의 <쇼와 15년 공문잡찬>은 데라우치 통감으로부터 황제 설득 책임을 부여받은 게 윤덕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윤덕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해서 폐하의 윤허를 얻어”냈다고 기술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성스레 윤허를 받아냈다는 것은 일본 측이 볼 때 그랬다는 의미다. 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1권 윤덕영 편은 “1910년 8월 16일부터 한일합병조약을 조인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린 22일 사이에 한일합병 조약 조인에 대해 모의하였으며 순종을 강압하고 국쇄를 강취하여 일제에 넘기는 등 한일합병을 주도”했다고 설명한다.
군주제 국가에서 국새(국쇄)를 함부로 건드리는 행위는 대의제 민주주의국가에서 의사당 본회의장에 난입하는 것만큼 중대한 범법이었다. 그런 무모함을 연출하면서까지 대한제국 죽이기에 가담했으니, 총독부가 윤덕영의 공과 이완용의 공을 저울질할 만했던 것이다. 윤덕영이 그런 일을 주저 없이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통감부가 계엄상태를 조성해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놓았던 데도 기인한다.
윤덕영의 친일 행위
윤덕영은 일본 군함이 도발한 강화도사건 2년 전인 1873년에 윤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가문은 훗날 순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를 배출했다. 윤덕영은 이 황후의 백부다.
윤덕영은 21세 때인 1894년에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강압적인 갑오경장(갑오개혁)을 시행한 그해에 과거시험이 폐지됐다. 과거시험 막차를 탔던 것이다.
다음 해에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1896년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이 된 그는 1897년에 황제 수석비서관인 비서원승이 되고 1900년에 비서실장인 비서원경이 됐다. 여타 관직들을 거친 뒤인 1903년에도 비서원경이 됐다.
1904년에는 비서 업무에 더해 세미나 업무 등도 맡는 시종원경이 됐고, 다른 관직들을 거쳐 1908년에 다시 시종원경이 되어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 발효 시점까지 근무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황제를 보좌했던 황실 사돈이 국새를 빼앗는 어이없는 행위를 범했던 것이다.
윤덕영의 친일 행위는 이 외에도 매우 허다하다. 일일이 열거하면 끝이 없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의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는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이런 행위들을 열거한다.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일본제국주의회의 귀족원 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계엄령에 편승하기는 했지만 국새를 탈취하는 무모함을 보여준 윤덕영의 친일 행각은 두고두고 일제의 칭송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윤덕영 편은 일본 귀족인 자작 작위를 받은 그가 1911년에 국채의 일종인 5만원권 은사공채를 받고 그 뒤 금배·은배 등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은사공채를 받은 해에 헌병보조원 월급이 7~16원이었다. 5만 원은 헌병보조원 3125~7143명을 1개월간 고용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 돈을 금융기관에 넣어두고 연리 5% 이자를 수령하는 권리를 받았다.
또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직을 1925년부터 15년간 역임하면서 연봉 3000원을 받고, 사망한 해인 1940년에 부의장이 되면서 연봉 3500원을 받게 됐다. 제국의회 의원을 포함한 여타 직책들도 역임했으므로 친일재산 규모는 훨씬 컸다.
윤덕영이 보여준 계엄과 친일의 함수관계
순종의 국새에 손을 든 윤덕영은 그 뒤 고종 암살설에도 연루됐다. 계엄에 힘입어 군주를 협박한 그가 그 뒤에는 한층 대담한 인물로 세상에 비쳐졌던 것이다.
한국통감부와 친일파 윤덕영 등이 정착시킨 계엄령은 해방 뒤에도 원형을 유지했다. 만약 이 계엄이 실패했다면, 그 뒤에는 함부로 계엄령을 발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윤덕영은 일본의 계엄령이 한국 땅에 이식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2009년에 <법학논총> 제33권 제1호에 실린 백윤철 대구사이버대 교수의 논문 ‘계엄법에 관한 연구’는 “계엄이라는 용어는 일본인이 만든 용어”라고 지적한다. 그런 다음, 일본에서 계엄령이 등장하는 과정을 소개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계엄령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 칙령 제283호 ‘조선에 시행하는 법률에 관한 건’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적용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일본의 계엄령은 미군정 법령 제11호에 의하여 미군정 하에서 의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8. 7. 17에 공포 시행된 제헌헌법 제64조의 규정으로 계엄권의 근거를 두고 동법 제100조에 의하여 잠정조치로서 적용되었다.”
12·3 내란 이전까지 한국 땅에서 계엄 상태를 조성한 공권력은 일제와 미군정과 이승만·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사망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의 계엄도 박 정권의 잔존세력에게서 나왔다. 일제를 제외한 나머지 셋의 공통점은 친일 세력을 비호하고 친일 청산을 방해했다는 점이다.
미군정 때는 군정청이 친일 세력인 한민당과 손잡았고, 이승만 때는 국가기구가 친일파에 장악됐고, 박정희 때는 청와대가 친일파의 집이 됐다. 이런 세력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일본의 가치 질서를 유지·보존하는 도구로 계엄령을 활용했다. 윤덕영은 계엄과 친일의 그 같은 함수관계를 국새 탈취라는 인상적 행동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줬다.
김종성 기자
<2024-12-1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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