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군사쿠데타와 국가폭력에 저항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려 한 의인義人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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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군사쿠데타와 국가폭력에 저항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려 한 의인義人들

편집부

12월 3일 밤 10시 23분경 긴급 브리핑을 연 윤석열은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전국 대상의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국회의사당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당사, 언론사 등 주요 기관에 무장 계엄군을 동원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를 통해 ①국회 및 정당의 정치활동 일체 금지, ②모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③전공의 및 의료인 불복종 시 처단, ④재판 절차나 영장 없는 일방적인 체포, 구금, 압수수색 등 전 국민의 정치적·사회적 기본권을 박탈하는 통제 조치를 공표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조국혁신당 등 야당은 불법 계엄령에 의한 친위 쿠데타이자 전대미문의 국헌문란 행위라 규정하고 유튜브 방송과 SNS를 통해 국회의원과 시민들에게 국회의사당에 모이도록 호소했다. 국회 정문에서 출입을 금지하는 계엄군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당 대표와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해 12월 4일 새벽 1시경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였고 오전 4시 30분 국무회의 의결로 계엄 해제를 선포함으로써 6시간 만에 완전히 종료하였다.

야당은 계엄 해제 즉시 내란 수괴인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다. 국회는 12월 14일(토) 오후 4시 본회의를 열고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윤석열의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고 이제 윤석열에 대한 완전한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손으로 넘겨졌다.

윤석열이 국방부, 방첩사, 수방사, 특전사 등 군 수뇌부와 함께 오래전부터 친위 쿠데타를 치밀하게 모의하고 이를 전격적으로 실행했으나 국회와 시민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와 행동으로써 신속하게 이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 민족사, 세계사에서 유일무이한 일로서 크게 칭송받고 있다. 하루빨리 극악무도한 헌정 파괴 일당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루고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회복의 길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굴곡진 한국현대사에 여러 차례의 비상계엄과 군사쿠데타가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이를 거부하는 수많은 인사들이 국가폭력 앞에서 살해되거나 수감되고 강제 해직을 당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이제 제주 4·3사건, 12·12군사쿠데타, 5·18 광주항쟁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목숨을 걸었던 의로운 다섯 분을 소개하여 그분들의 숭고한 의기(義氣)를 되새기고자 한다.

한강 작가가 12월 7일(현지 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회고했다. 그중에서 5·18 광주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와 관련한 작가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1. 4·3사건 당시 계엄군의 총살 명령을 거부한 ‘한국의 쉰들러’ 문형순 서장

문형순 서장(1897~1966)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다. 해방 전 독립운동가로의 활약상은 잘 드러나 있지 않는데, 「경찰 인사기록」에 의거하여 해방 전 이력을 간략히 정리한다. 1908년 평남 안주군 대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1919년 3월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어 러시아로 이동했고 1921년 고려혁명군에 편입되어 교관으로 복무했다. 1929년 요녕성 흥경에 본부를 둔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에 참여하여 국민중앙보위대 대장을 맡았고 조선혁명당 중앙당부 중앙위원 23명의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1935년 하북성에서 지하공작대로 복무했으며 이후 화북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해방 후 귀국해 동지들을 찾아 서울로 왔다. 광복사업을 위해 일을 찾던 중 선배 신익희의 알선으로 국립경찰에 투신했다.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족청계 자유당의 모씨를 찾아가 “독립군이던 나를 몰라보느냐!”며 울분을 쏟아내자 괘씸죄에 걸려 오지인 제주도로 쫓겨났다고 한다.(「서글픈 昔日의 文將軍, 北滿洲 벌판서 倭兵 무찌른 歷戰 남기고, 宿願 이루어도 지금은 生計暗澹」, 『평화신문』 1960.12.4)

문형순 서장은 1947년 5월 제주도로 건너와 제주경찰청 기동경비대장과 경찰관교습소 교두를 맡았다. 1947년 한림지서장, 세화지서장, 1948년 조천지서장, 한림지서장을 거쳐 그해 12월경 모슬포지서장을 역임했다. 1949년 1월 모슬포지서가 제3구경찰서로 승격, 서장서리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경감으로 승진, 성산포경찰서장에 부임해 1951년 3월 경상남도로 전출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이렇듯 문 서장은 이른바 ‘제주 4·3사건’1의 전 과정을 직접 목도하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사태 수습에 전력을 기울였다.

4·3사건 발발 직후부터 종료 직전까지 제주에 상주하면서 4·3사건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지휘관이었던 최경록 11연대장, 송요찬 9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모두 독립군을 탄압했던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2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제주에서 선량한 양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데 비해 독립군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조금이라고 막기 위해 모슬포 주민들을 보호했고 예비검속자로서 총살 대상이었던 성산포 주민들의 목숨을 구해낸 것이다.

모슬포 ‘자수사건’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아울러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문형순이 지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모슬포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8년 12월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 좌익 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100여 명의 명단을 입수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남원 민보단장과 모슬포교회 조남수 목사는 문형순 서장을 찾아갔다. 그들은 좌익명단에 올려진 100여 명의 사람들은 하모리 마을주민이며 이들에게는 무장대가 된 가족과 이웃들에게 식량과 의복 등을 전달한 죄밖에 없다며 이들을 자수시킬테니 선처해달라고 문 서장에게 호소했다. 문 서장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관련자 100여 명이 자수하러 경찰서로 가자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서북청년단 대원들이었다. 서북청년단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잘 알고 있던 문 서장은 조 목사와 김 단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지를 발휘해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 면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그 덕분에 면서기를 앞에 두고 주민들끼리 말을 맞추고 의논해서 아무런 탈이 없도록 신문조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다. 민보단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별다른 불법 행적이 없자 주민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계엄하에서 일개 지서장(당시 계급은 경위)이 이러한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자기 목숨을 건 용단이나 다름없었다.

“부당하므로 불이행”

성산포경찰서장 위쪽에 “不當하므로 不履行”이라는 문 서장의 자필 글씨가 뚜렷하게 보인다.

문형순 지서장은 1949년 1월 18일 모슬포지서가 제3구경찰서로 승격하면서 서장서리(초대 서장)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1949년 10월 19일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전통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경계의 건」을 발하고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 검속하도록 했다. 제주도경찰국은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1950년 8월 20일 제주도에서 새벽 2시와 5시경 2차에 걸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은 당시 해병대 사령부 소속 모슬포 부대(제3대대)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됐던 347명 중 253명이 육군본부 제주지구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 미육군 소속 첩보부대]에 넘겨지고 그중 252명이 해병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문형순 서장은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보낸 「해정참 제16호 예비구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이란 공문을 접수하였다. 그 요지는 “귀서에 예비구속중인 D급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총살을 집행한 후 그 결과는 9월 6일까지 보고할 것”이었다. 문형순 서장은 공문의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옆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 직접 쓰고 실제로 총살 집행을 끝까지 거부했다. 이 또한 급박한 계엄상황에서 부당한 계엄군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담대한 결단이었다. 그 결과 성산포에서 예비검속으로 처형된 사람은 단 6명뿐이었다.

퇴직 후 영락했던 삶과 ‘올해의 경찰 영웅’ 선정

문형순 서장은 1951년 3월 경상남도로 전출했다가 1952년 4월 다시 제주도로 발령이 나서 제주경찰군 보안과 방호계장으로 있다가 1953년 9월 퇴임했다. 이후 제주시에서 가게를 운영하거나 경찰 쌀배급소 직원, 제주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 매표원 등등 전전하여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1960년경 아는 동지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서 살다가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후손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평화일보』 1960년 12월 4일자의 인터뷰 기사에는 당시 궁핍했던 서울 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중 여기 이름없이 시들어가는 이는 독립군 의혈단장 홍범도 장군의 직속부관이었던 문형순(64) 장군이다. 시내 서대문구 홍은동 뒷산터 어느 판잣집 단칸방에서 지난날의 생생한 독립군의 투쟁혈사를 되씹고 있는 그는 지금 육십 고개를 넘어 노쇠하여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건만 아직도 칠척 장구의 건장한 모습은 지난날 독립군 장교의 기상을 말해주는 풍채 그대로였다. (중략)
그러나 목메어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아 고국에 돌아온 이들 독립투사들은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때보다도 오히려 비참한 생애를 보내고 있는 인사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문장군으로 지금은 인생낙조의 서글픈 정경 속에서 판잣집 단칸방에 엄동을 맞으면서 그래도 생을 이어보자는 의욕 아래 중부서(中部署) 구내매점이나 하나 얻어볼까 하고 경찰서문을 차고 애수 섞인 하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문형순 서장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이 전정택 제주평안도민회장에 의해 진행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국민부 국민중앙보위대 대장,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등 독립운동 경력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의 국가보훈처는 입증자료 부족을 이유로 불허했고 2010년 제주보훈청장 직권으로 재심사를 요청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경찰청에서 2018년 10월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찰관 5명 중 1인으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편 경찰청은 매년 경찰 정신에 귀감이 되는 전사·순직 경찰관 1~2명을 선정해 추모 흉상을 건립하고 있는데 2018년 8월에 위원회를 열어 문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고 그해 11월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문형순 서장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또한 경찰청이 2023년 7월 문 서장이 6·25전쟁 당시 경찰관으로서 지리산전투사령부에 복무한 경력을 근거로 삼아 참전유공자를 신청했는데 그해 12월 참전유공자 등록을 마쳤다고 국가보훈부가 통보했다고 한다.

2. 12·12군사쿠데타에 맞섰던 참군인 장태완 정병주 김오랑

10·26사태와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의 대두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처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저격했다. 이때 안가 별채에는 김재규의 초청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대기해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 저격 사실을 숨긴 채 정승화를 대동하고 육군본부로 이동했다. 하지만 김재규가 범인임이 곧바로 발각되어 몇 시간 후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사건 직후 최규하 국무총리 등은 비상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은 십수 년 동안 유지되어왔던 독재정치에 커다란 권력 공백 상황을 야기했다. 과연 과도기적 상황에서 민주적인 절차로 권력 이양이 될 수 있는가는 한국정치의 중차대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틈새를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에 취임한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교묘히 파고들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소규모로 시작된 하나회는 육사 기수마다 대략 10여 명의 장교들을 회원으로 확보하며 세를 지속적으로 불려나갔다. 하나회는 대부분 영남 출신 장교들로 채워졌으며, 윤필용, 유학성 등 육사 11기보다 윗 기수의 선배 장교들을 후원자로 확보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하나회는 박정희의 친위 조직을 자임했으며, 국군특전사령부(특전사),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등 군내 핵심 기구의 주요 보직을 독점하면서 군 내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9년 당시 하나회 구성원은 보안사를 비롯한 군 내 첩보기구, 청와대 외곽을 방어하는 수경사 30·33 경비단, 9사단 등 서울 근교의 전투부대, 공수여단 등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12·12 군사쿠데타 성공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했다.

12월 12일 군사쿠데타에 대한 진압군의 대응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겸임)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목적으로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보안사, 수경사, 육군본부 및 국방부, 사단·여단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세력 규합에 나섰다. 반란군 수뇌부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계획을 세우고 12월 12일을 D데이로 삼았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노태우, 최세창 등 동조세력을 경복궁 내 위치한 수경사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서울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했다.

오후 6시에 전두환은 총리공관을 방문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안을 재가받으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허삼수 등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들이닥쳐 경비대를 제압한 후 정 총장을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오후 8시 20분 하나회 핵심 맴버인 고명승 대령이 최규하 대통령이 있는 총리공관을 포위해 압도적인 무력으로 공관 병력을 무장해제시키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13일 0시부터 오전 6시 30분 사이 육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장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에 둘러싸인 최규하 대통령은 두 차례의 반려 끝에 노재현 국방장관의 권유에 따라 결국 13일 새벽 5시,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서명함으로써 정승화 연행에 관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사실상 12·12 군사쿠데타는 종결되었고 신군부 세력에 의한 권력 찬탈의 제일보가 내디딘 것이다.

신군부의 반란 사태에 대한 장태완 수경사령관(1931~2010), 정병주 특전사령관(1926~1989), 김오랑 소령(1944~1979) 등 진압군의 대응은 어떠했나.

D데이에 앞서 신군부 세력은 비(非) 하나회 계열의 장성인 정병주, 김진기, 장태완을 술자리에 초대해 발을 묶는 계략을 꾸몄다. 12월 12일 정병주는 김진기, 장태완 등과 술자리를 같이하다가 정승화 참모총장이 신군부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각기 특전사, 육군본부, 수경사로 돌아가 진압군과 반란군의 전력 상황을 파악했다. 이미 휘하 부대 중 하나회와 연관이 있는 다수 부대가 상관을 배신하고 신군부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역시 특전사령부의 직속 부하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그리고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이 반란군 편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을 시켜 1공수여단의 출동을 막으려 했다. 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지금 병력 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믿을 수 있는 병력이 현재 없다.”라고 전화하자 정병주는 “나에게는 9공수가 있다. 9공수라도 빨리 출동시키겠네.”라고 응답했다. 그리고는 9공수여단 윤흥기 준장에게 보안사와 경복궁에 있는 30경비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공격 명령은 군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던 보안사가 탐지하여 신군부에 보고되었고 전두환은 제3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최세창은 자기 상관인 정병주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예하 부대 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전사령부 사령관실이 3공수여단 내에 있었고 특전사령관 직속 전투병력이 없어서 박종규와 15대대 체포조는 용이하게 사령관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때 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은 신군부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신으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령관실로 정병주를 피신시켰다. 반란군들이 특전사령관실에 들이닥치자 김오랑 소령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교전하던 중 6발의 흉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정병주 사령관 역시 팔에 총상을 입은 채 반란군에게 체포당하고 말았다.

한편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수경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전세가 이미 반란군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 자신을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 “너희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고 일갈하고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장태완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육군본부에서 피해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했다. 당시 수경사의 핵심 전력이자 전차중대가 존재한 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편이어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로 운용 가능한 33경비단의 전차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을 쓸어낼 구상을 하기도 하였다.

장태완은 포병대와 연락해서 30경비단과 보안사에 포를 겨누고 지시가 오면 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여기서 진압군은 최대 실책을 저질렀다. 반란군은, 양군이 서울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면 인명 재산 피해가 심대할 터이니 반란군의 1, 3공수와 진압군의 9공수를 동시에 회군시키자는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진압군이 이에 응해 반란군을 유일하게 저지할 수 있었던 9공수을 본대로 회군시켰다. 그 틈을 타 반란군은 바로 1공수로 하여금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했고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를 체포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최후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 명과 남은 전차중대 4대를 소집하여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차부대가 배신하면 병사들마저 전멸한다는 장교들의 설득, 노재현 국방장관의 투항 지시, 끝으로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에 들이닥치자 장태완은 속수무책으로 신윤희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신군부에 의한 강제 예편과 기구한 생애

1979년 12월 24일 신군부 세력은, 국방부 명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가담하여 인신 구속했고 이하 신군부에 대항한 진압군의 수뇌부를 체포하여 각각의 죄상에 맞게 처리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김재규의 내란방조죄로 24일 구속했다. 합수본부는 이날 정 전총장이 김재규의 내란음모에 가담 방조했다는 확증을 잡아 구속, 앞으로 법정수사기일인 20일 동안의 조사과정을 거쳐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넘길 것이라고 밝혔다.(중략)
또 정 전총장을 도와 ‘12·12사건’ 때 병력을 동원했던 전 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전 합참본부장 문홍구, 전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 4명의 장성들에 대해서는 죄상에 따라 각각 적절히 처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경향신문』 1979.12.24.1면)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신군부에 체포된 후 서빙고에서 45일간의 조사를 받았다. 1980년 2월초에 수사관이 예편서를 쓰라고 요구해 장태완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쳤다. 장태완은 1993년에 펴낸 저서 『12·12 쿠데타와 나』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6·25 전쟁 발발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군문에 투신하여 3년 전쟁 동안 무수한 사선을 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군 생활을, 명예롭기는커녕 12·12의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충의 죄인이 되어 반란 주모자들의 강압에 의해 30년 동안 몸담아 왔던 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서운한 생각이 억장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보안사로 끌려간 직후 혹독한 고문을 당해 그때 생각만 하면 피가 역류한다고 술회했다. 조사 중 과다출혈로 쇼크 현상을 보여 국군통합병원에 이송됐고, 거기서 수술을 받고 치료받던 중 1980년 1월 강제 예편하고 3월 초 퇴원했다. 퇴역 후 늘상 12·12 쿠데타의 부당성을 언론을 통해 주장하던 정병주는 1988년 행방불명되고 그 이듬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고 김오랑 소령은 1980년 2월 28일 서울현충원 제29묘역에 안장되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은 김 소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힘썼고 하나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다가 1991년 의문사를 당했다. 김 소령은 1990년 중령으로 특진하고 2014년 보국훈장 삼일장에 추서되었다. 2014년 6월 7일 김해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고인의 모교인 김해 삼성초등학교 앞 공원에 고인을 추모하는 흉상을 세웠다. 추모비에는 “12월 12일 사태 때 상관을 지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 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히 대항하여 정의를 수호하다 장렬히 순직”이라고 적혀 있다.

3. 5·18 광주항쟁 때 계엄군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도경국장

10·26 사태 후 민주화 실현에 대한 전국민적 열망이 높아졌다. 시민사회 원로들은 최규화 대통령에게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선거를 요구했고, 여야 정치인들은 1980년 5월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반해 12·12 군사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980년 1월 반대파 장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하고 4월에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임해 핵심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자 1980년 봄부터 대학생들이 계엄령 상황임에도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의도를 규탄하고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모든 정치활동이 정지되고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등 정치인들이 체포 구금되거나 가택 연금되었다. 전국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군부대가 투입되어 모든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였다.

안병하 도경국장의 온건한 대처

5월 18일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반발해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자 전남대학교 등 주요 대학과 관공서에 배치된 공수부대가 시위 학생뿐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 폭행하였다. 이에 분개한 광주 시민들도 시위에 가담해 격렬한 저항을 펼쳤다. 공수부대는 5월 21일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하였고 광주 외곽도로를 봉쇄해 외부 지역과의 통행을 틀어막았다.

이 무렵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1928~1988)은 계엄군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일선 경찰에게 지시하였다. 특히 계엄군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일선 경찰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할 것을 지시해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항쟁 기간 내내 전남 및 광주 지역의 경찰들은 시민들과 큰 충돌 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오히려 5월 20일 광주 금남로 1가에서 공수부대가 경찰 간부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며 나주경찰서장을 질질 끌고 가기도 했다. 어떤 전남도 경찰과장은 공수부대의 과격한 시위진압에 항의하다가 병사들에게 구타당한 일도 있었다.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종환 내무부 장관, 소준열 전투교육사령관 등이 동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최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안 국장에게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명령하였다. 안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이를 거절했다.

계엄사령부는 5월 27일 안병하 경무관을 광주소요사태에 대한 지휘권 포기 등 직무유기 혐의로 직위해제하고 치안본부 대기발령을 냈다. 이후 계엄사령부가 있는 서울의 보안사령부로 연행해 갔다. 계엄사령부에 체포당한 안병하는 8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결국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하고 풀려나게 되었다.

40년 만에 이뤄진 명예회복

계엄사령부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안병하는 몸과 마음 모두 만신창이 상태였다. 정신적 충격과 고문 후유증으로 고혈압과 당뇨, 신부전증까지 발병해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였다. 5·18 관련 증인으로 나서기 직전인 1988년 10월 10일 내과의원에서 혈액 투석을 받던 중 사망했다. 그의 사후 유족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치안본부를 포함한 여러 국가기관을 찾아다녔으나 아무 데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3년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고 2005년 11월 국립서울현충원 9묘역에 이장되었으며 2015년 8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한편 경찰청은 2017년 11월 안병하 경무관을 ‘제1호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고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그리고 광주항쟁으로부터 40년 만인 2020년 5월 신군부에 맞서 시민들을 보호했던 안병하 치안감과 경찰관 21명에 대한 부당한 징계가 취소되어 드디어 명예회복이 되었다. 2022년 3월에는 1980년 6월 의원면직을 취소하고 1981년 6월 치안감에 추서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임명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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