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18]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1)
이명숙 연구실장
2024년 12월 14일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까지 10여 일 이상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행된 촛불집회에는 아이돌 응원봉과 K-pop으로 무장한 ‘청년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누구보다 신명나게 탄핵을 외치며 노래와 춤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 청년들을 보며 일제강점기 항일항쟁 어디든 존재했던 ‘청년’이 떠올랐다. 대일항쟁에서 매 순간 커다란 역할을 해냈던 청년 특히 중일전쟁 이후 항일 선전·예술 활동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청년들에 대해 써보려 한다. 그들의 활동 속에서 활용된 항일노래를 주로 다루고자 한다.
이들 청년은 스스로를 ‘한국청년’으로 명명하며 항일 역사로부터 자신들의 역할을 명백히 자각하고 있었는데, 김구 지도하에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 1936.7. 결성)의 창립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다. “혁명은 반항이다. 투쟁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철권(鐵拳)과 열혈(熱血)을 요구한다. 보라. 혁명의 성패가 오로지 청년에게 달렸다는 것을 호언(豪言)이라 할 수 없나니 3·1운동과 6·10운동, 광주학생운동, 그 외에 내외국의 위대한 혁명운동이 모두 이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혁명청년이다.”라고 시작하는 창립선언 말미에 “일본제국주의를 우리의 철권으로 박멸하자! 내지(內地) 전야(戰野)로 들어가자!”라는 구호로써 ‘일제 박멸을 위한 전쟁’이 최종 목표임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선언 후 불과 1년 만인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곧바로 군무부 관할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위원을 선임해 개전을 준비했다. ‘한국청년’들 또한 독립전쟁의 호기로 생각하며 임시정부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들 대다수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마쳤거나 또는 재학 중이던 상태로 이미 개전에 대한 상당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이어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 등은 독립운동 세력의 합동을 추진하여 미주지역 단체들까지 동참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光復陣線)를 조직했다. ‘한국청년’들도 광복진선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지속적 공세로 인해 임시정부와 그 대가족 부대는 피난과 이동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전쟁을 위한 군장교와 군인 양성 또한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청년’들은 특무공작을 위해 중국 각지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본대에 있을 동안에는 광복진선의 일원으로서 대일항전과 한중연대의 물꼬를 트기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며 각종 선전 활동을 펼쳤다.
1938년 3월 1일 창사(長沙)에서는 광복진선과 창사의 중국 인사들이 참석한 3·1절 기념대회와 야간의 여흥 시간이 진행되었다. 기념대회 식장의 무대 뒤편 정중앙에는 태극기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교차해 걸어놓았고 식장 곳곳에도 태극기를 배치했다. 광복진선의 일원이던 지복영(池復榮)은 자신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민족문제연구소, 2015)에서 이날의 3·1절 기념대회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다. 대회 준비는 당시 가장 음악적 소양이 있던 청년단원의 지도로 진행됐는데, 함께 대회 프로그램을 짜고 노래연습을 했다고 한다.
대회 당일 지복영과 연미당(延薇堂)은 기념식에서 「봉선화」를, 밤의 방송에서 「낙화암(落花巖)」을 불렀고, 여흥 시간에는 연미당이 「장미화」를, 이국영(李國英)이 ‘저 강 건너 공장에는’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외에도 이달(李達)이 「전라도 육자배기」를 불러 대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노래를 부른 인물 중 한 사람인 이국영은 당시 자주 부르던 노래들을 기록한 가사집을 남겼다.
『망향성(望鄕聲)』(사본,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그것인데, 머리글에는 이국영이 ‘임시정부를 따라 장정의 길을 걸으면서 애국청년들이 잃어버린 고국을 그리며 부르던 애창가’를 틈틈이 친필로 기록한 것이라고 전했다. 『망향성』의 수록곡 전체는 158곡(중복 5곡 제외)이며, 이를 <망향편> 69곡과 <애국편> 89곡으로 구분해 놓았다. 대부분 가사만을 기록했지만 숫자보[음계를 숫자로 표현한 악보]와 함께 실린 것도 30곡 정도 되며, 대체로 1910년대부터 해방 직전까지 불렸던 노래들이었다. 『망향성』에 수록된 「낙화암」과 「장미화」는 아래와 같다.
「낙화암」은 신라에 멸망한 백제 최후의 참상을, 「장미화」는 화려한 동산에 자유롭게 핀 장미화가 ‘흉악한 비’에 피해를 입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낙화암」에는 추가 기록이 없어 곡정보 등을 확인할 수 없지만 「장미화」에는 ‘Ch. Gound 作曲’이라 명기되어 있어 구노(Charles Gounod)가 작곡한 곡임을 알 수 있다. 구노의 곡 중 당시 국내에 알려진 노래는 1920년대 중반 윤심덕이 불러 유명해진 「깊은 데 숨은 장미화」(강범형姜範馨 저, 1929, 『신식유행이팔청춘창가집(新式流行二八靑春唱歌集)』, 時潮社)가 확인되었는데, 프랑스 가곡인 원 곡명은 「세레나데(Serenade)」였다. 이 두 곡을 비롯해 「봉선화」(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까지 모두 일제에 나라를 뺏긴 조국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한 노랫말들이다.
창사 3·1절 기념행사를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 이날 함께 준비하고 공연한 이들이 남긴 전체 기념사진이 있다. ‘제19주 3·1절 유흥조 전체배우 기념촬영(第十九週三一節遊興組全體演員記念撮影)’이란 작은 플래카드를 들고 찍은 사진 속 인물들은 아이들 포함 총 28명이다. 어른들은 김동수 안춘생(安椿生) 김철(金澈) 유해준(兪海濬) 노태준(盧泰俊) 진춘호(陳春浩) 한도명(韓道明) 조경한(趙擎韓) 민영주(閔泳珠) 이달 신순호(申順浩) 민영숙(閔泳淑) 연미당 방순희(方順熙) 오광심(吳光心) 김효숙(金孝淑) 이지일(李志一) 엄도해(嚴道海) 고시복(高時福) 송면수(宋冕秀)였다.
플래카드 속 ‘배우’라는 표현으로 노래 말고도 극을 공연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사진 속 인물 중 분장용 수염인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인물이 있어 더욱 확신이 들게 한다. 악기 외에도 커다란 장검이 보이는데 이 또한 공연 소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연극 공연은 이 시기 이전에도 임시정부나 기타 재중동포 사회에서 3·1절 기념식, 8·29 국치기념식 등에서 진행된 것이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3·1절 기념식은 아니지만 지복영의 회고록에서 국치기념일 진행된 연극이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아버지를 찾아서 어린 아들 형제도 집을 떠난다.’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창사 3·1절 기념행사에서 공연된 연극도 독립운동과 관련한 내용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중국도 일제와 항전을 시작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께 피난 중인 중국인들을 위로하면서도 시급히 한중연대를 실현해 함께 싸워나갈 것을 공연을 통해 알리고자 했을 것이다. 피난 상황의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인들도 익히 잘 아는 한국인들의 거족적 항일투쟁 즉 3·1운동을 기념하면서 여전한 우리의 항일의지를 보이는 한편 임시정부와 한국인이 대일 공동항전의 한 주체임을 각인시켜 중국 측의 적극적인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했을 것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5월에 3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남목청(楠木廳)의 조선혁명당 당사에서 갑작스레 돌입한 이운환(李雲煥)이 권총을 발사해 김구·현익철(玄益哲)·유동열(柳東說)이 중상, 지청천(池靑天)이 경상을 입었고 현익철은 끝내 사망하는 일명 ‘남목청 사건’이 발생했다. 임시정부를 통한 적극적인 대일항전 전개가 여의찮은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의 총결집에 균열이 생긴 상황에서 일부 청년들은 일종의 회의와 실망을 느끼고 광복진선을 이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광복진선 청년들은 7월 7일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창사 시민 각 기관·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거행한 항전 1주년 기념식에 한국을 대표해 참석했다.
얼마 후 일본군의 공세로 광복진선 전원은 창사를 떠나 다시 피난길을 나섰고 같은 달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특무공작을 나갔던 이재현(李在賢, 이명 이해평李海平) 외에 김인(金仁), 김동수, 아나키스트 이하유(李何有) 등도 홍콩 등에서 광저우로 집결했다. 그러나 광저우의 상황도 불안해져 9월에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은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대가족 부대는 10월에 광저우를 떠났다.
광복진선의 청년들은 ‘임시정부를 따라 깊숙한 후방인 충칭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전시 공작대를 조직해 일선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주축으로 한 일단의 청년들은 광저우에 남아 항전 참여를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습과 진격으로 광저우에서의 활동은 불가능했다. 이들은 광저우가 일본군에 함락되던 10월 22일 포화 속을 뚫고 탈출을 감행했다. 월한철로(粤漢鐵路)를 따라 헝양(衡陽)과 구이린(桂林)을 거쳐 임시정부의 대가족이 머무는 류저우(柳州)에 도착한 것은 1938년 연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일조할 수 있는 일 즉 후방에서라도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항전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곧바로 개시했다. 먼저 시작한 일은 항일 벽보와 전단을 격일로 만들어 붙이거나 배포하고, 만화 등의 선전그림을 그려 거리에 붙이는 것이었다. 주요 내용은 라디오를 통해 중국, 영국, 러시아, 일본 등 각국의 주요 뉴스를 수집해 정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뉴스는 류저우의 신문보다 신속하고 정통해서 류저우의 각 기관과 언론사도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유후공원(柳候公園) 등에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선전 준비의 일환으로 항전가요를 연습할 때에 한 중국청년단 단장을 만나 중국의 항일가요 「타작가(打禾歌)」, 「장성요(長城謠)」 등을 배우게 됐고, 우리 청년들은 민요 「아리랑」과 「흥타령」을 가르쳐 주는 등의 교류가 진행되기도 했다. 당시 유후공원에서는 매일 항전집회가 열렸는데, 중국 청년들이 벌였던 가두극이 짧지만 빠른 극 전개로 장소적 제약이 있는 야외에서도 항일선전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됐다. 「너의 채찍을 놓아라(放下你的鞭子)」, 「삼강호(三江好)」 등의 대표적 가두극을 본 ‘한국청년’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활동 방법으로 항일공연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인들을 상대로 그들에게 익숙하면서 전시 선전활동에 효과적인 가두극을 활용해 대일항전과 한중연대의 필요성을 알려내기로 한 것이다.
더불어 중국 측과 교류하게 되면서 당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도 계속했다. 1939년 1월 9일 중국국민당 제4전구 사령장관 사령부 전지공작대 제5대의 주관으로 열린 부상병 위문과 난민구제를 위한 모금공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바이올린 연주를 진행했다. 한국 측을 대표해 ‘한국청년단’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후 류저우에서 벌인 ‘한국청년’의 활동은 다음 편에 이어 쓰겠다.
[참고자료]
李國英 編, 『望鄕聲』(필사본)
지복영, 『민들레의 비상』, 민족문제연구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