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목포 고하도 무화과밭에 남아있는 ‘육지면 발상지지 기념비(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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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4]

목포 고하도 무화과밭에 남아있는
‘육지면 발상지지 기념비(1936년)’
‘남면북양(南棉北羊)’으로 상징되는 면화증산의 식민정책이 남긴 흔적

이순우 특임연구원

농촌진흥(農村振興), 자력갱생(自力更生), 민심작흥(民心作興), 심전개발(心田開發), 산금장려(産金獎勵), 북선개척(北鮮開拓), 전작장려(田作獎勵) …….

이러한 것들은 제6대 조선총독을 지낸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재임 1931.6.17~1936.8.5)의 통치시기에 그가 내세운 대표적인 금간판(金看板, motto)이다. 그리고 이 목록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으로 ‘남면북양(南棉北羊)’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이는 면화증산(棉花增産, 면작증식)과 면양장려(緬羊獎勵)를 통해 목화와 양모의 자급자족을 꾀한 것으로, 여기에는 식민지 조선을 원료공급지(原料供給地) 그 자체로 여긴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깔려 있었다.

우가키 총독의 부임 직후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 9월 18일 발생)으로 촉발된 비상시국이 전개되었으므로, 이 와중에 불안한 대외의존도의 심화를 방지하고 위급한 원료수급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남면북양’을 산업정책의 골간으로 삼는 시기가 한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6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우가키 전 총독 5년간 치적(宇垣 前總督 五年間 治績)(5) 면작증식장려(棉作增殖獎勵) 지방자치완성(地方自治完成)」 제하의 연재기사에는 우가키 재임 시기에 추진된 면화증산의 성과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제3년(第三年, 소화 8년)] 면작장려(棉作獎勵)는 우가키 씨(宇垣氏)의 산업정책중(産業政策中) 또한 중요한 역할을 가진 것이니 소화 8년(1933년) 2월 발표된 면화증식계획(棉花增殖計劃)이 그것이다. 익(翌) 9년(1934년)에 수립한 면양증식계획(緬羊增殖計劃)과 병칭(倂稱)하여 유명한 소위(所謂) 남면북양책(南棉北羊策)이라는 것이다. 내선(內鮮)을 통(通)하여 방적업(紡績業)의 발달에 따라 면화수입은 연년(年年) 격증하여 소화 9년(1934년)에는 실(實)로 7억 3천만 원(圓)에 달하는 현상(現狀)이었으니 이의 자작자급(自作自給)을 도(圖)함은 국가적 견지로 끽긴(喫緊, 매우 긴요)한 일대사업(一大事業)이라고 착안(着眼)한 우가키 씨는 종래의 반당증수(反當增收)를 장려함에 불과하던 것을 소화 8년 이강(以降, 이래) 10년 계획으로 작부면적(作付面積) 25만 정보(町步) 실면생산(實棉生産) 4억 2천만 근(斤)을 목표로 하고, 함남북(咸南北)을 제외한 11도(道)에 산업기사(産業技師)를 연차적으로 배치하는 동시에 면작전임기술관(棉作專任技術官)을 파견하여 최적지인 165군(郡)을 장려군(獎勵郡)으로 지정하고 1군당(一郡當) 4천 3백 원씩(圓式)을 보조하여 지도 장려한 것이요, 그 후 성적이 우량함에 감(鑑)하여 계획도중 변경하여 명(明) 12년도(1937년도)부터는 20개년 계획으로 작부(作付) 70만 정보, 실면생산고 10억 5천만 근(斤)을 목표로 제2차의 증산계획을 확대하였으니 이것은 우가키 씨의 면작장려에 있어 최후(最後)로 남겨놓고 간 선물(膳物)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저 멀리 목포 고하도(木浦 高下島,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 780-18번지)에는 이처럼 ‘남면북양’의 모토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 만들어낸 흔적 하나가 남아있는데, 바닷가 언덕 위 무화과밭 사이로 보이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棉發祥之地)’ 기념비(1936년 8월 21일 제막)가 바로 그것이다. 비석 전면에 새겨진 아홉 글자는 조선총독의 자리에서 막 물러날 찰나에 있던 우가키 카즈시게가 썼으며, 뒷면과 옆면의 비문(碑文)은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 교장 출신인 요시무라 츠라유키(吉村貫之)의 글씨이다.

이러한 기념비가 만들어질 당시의 상황과 배경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36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면(棉)의 목포(木浦)”에 연주하는 면재(棉栽) 30년 약진보(躍進譜), 27일부터 열리는 기념회(記念會)의 프로그램 정해지다」 제하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광주(光州)] 조선육지면발상의 땅(朝鮮陸地棉發祥の地) “항구(ミナト) 목포(木浦)”에서는 기보(旣報)와 같이 오는 27일 내선지명(內鮮知名)의 인사를 다수 맞이하여 면화장려삼십주년기념식(棉花獎勵三十周年記念式)을 성대히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제1일은 27일 오전 11시 목포소학교 강당(木浦小學校 講堂)에서 30주년기념식을 화려하게 올려 면화재배(棉花栽培)의 공로자(功勞者)로서
– 원(元, 전) 목포영사(木浦領事) 와카마츠 토사부로(若松兎三郞)
– 원(元) 농상무성 기사(農商務省 技師), 현(現) 농림성 니시가하라시험장 장장(農林省 西ケ原試驗場 場長) 안도 히로타로(安藤廣太郞)
– 제국농회 부회장(帝國農會 副會長) 츠키데 토사부로(月出藤三郞)
– 대일본방적연합회장(大日本紡績聯合會長) 쇼다 오토키치(庄田乙吉)
– 원(元) 면화협회 이사(棉花協會 理事), 현(現) 샴정부 고문(シャム政府 顧問) 미하라 신조(三原新三)의 5씨(氏)에 공적장(功績狀) 및 기념품(記念品)을 증정하고, 오후 2시부터 동소(同所)에서 전선면업대회(全鮮棉業大會)를 개최, 본부(本府; 조선총독부를 일컫는 표현)의 남면장려정책(南棉獎勵政策)에 대응하여 크게 기세를 올리는 동시에 목포대안 고하도(木浦對岸 高下島)에서 우가키 전 총독(宇垣 前總督)의 제자(題字)로 된 ‘조선육지면발상의 땅’ 기념비의 건설식(建設式)이 행해지며, 계속하여 제2일인 28일부터 3일간 동소(同所)에서 기념대강연회(記念大講演會)를 개최하는데 강사(講師)는 군부(軍部), 내지실업가(內地實業家), 학자(學者) 등 전부 사계(斯界)의 권위(權威)가 모여 국방, 경제, 기타의 견지에서 국책(國策) 면화의 재배장려를 설파하고 재배법(栽培法)의 지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화지식(棉花知識)의 주입(注入)에 애쓰기로 되었고, 때마침 일호회상(日濠會商)에 직면한 때에 상당한 인기를 부를 것이며, 이밖에 면제품진열회(棉製品陳列會)랑 종방특설(鐘紡特設)의 서비스 스테이션 등이 설치되는데 회기(會期) 4일간은 면의 목포항이 공전(空前)의 활기를 띨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당시의 기념행사 가운데 8월 27일 오후 2시부터 목포공회당(木浦公會堂)에서 열린 조선면업대회(朝鮮棉業大會)에서는 전선면업자(全鮮棉業者) 및 일만면화협회원(日滿棉花協會員)이 출석한 가운데 시사문제(時事問題)에 대해 간담(懇談)을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의(決議)를 행했다고 전해진다.

현하(現下)의 국제정세(國際情勢)는 제국방적원면(帝國紡績原棉)의 수급조절(需給調節)과 국민경제(國民經濟)의 진전상(進展上) 일층(一層) 적극적(積極的)으로 국내면화증산(國內棉花增産)의 요긴절(要緊切)한 것임에 비춰 오인(吾人)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면화증산대계획(棉花增産大計畫)의 방침(方針)을 절대(絶對)로 지지(支持)하고 이것의 대성(大成)이 서둘러지기를 기(期)함.

이 당시 면화장려 30주년기념식장에서 행해진 전라남도지사 마츠모토 이오리(松本伊織, 재임 1936.7.6~1937.7.3)의 고사(告辭)에서도 시국상황의 엄중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한 내용이 등장한다.

…… 지금이야말로 우리나라(즉, 일본)는 내외로 다사다단(多事多端)한 비상시국(非常時局)에 제회(際會)하여 각종 산업의 진흥은 끽다(喫緊)한 중요사(重要事)에 속하는 것입니다만, 특히 면사업(綿絲業)의 소장(消長)은 국가경제의 융체(隆替)에 영향(影響)하는 바 극히 큰 것일 뿐만 아니라 대외무역품(對外貿易品)으로서 이것의 수출 증진은 국제대차개선상(國際貸借改善上) 최긴요(最緊要)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하(現下)의 국제정세는 제국방적원면(帝國紡績原棉)의 수급조절상 일층 적극적으로 국내면화(國內棉花)의 증산을 꾀함이 요절(要切)하다는 것에 비춰 본부(本府)에 있어서는 소화 8년(1933년) 면화증산계획을 수립시켜 본도(本道) 또한 이에 순응하여 실면(實棉) 1억 1천 2백만 근(斤)의 증산계획을 세움으로써 남면북양(南棉北羊)의 중요국책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하고 있는 것은 각위(各位)가 이미 숙지하는 바입니다. (하략)

이렇게 본다면 ‘조선육지면발상지지 기념비’는 단지 면화재배 30주년을 기리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비상시국과 국제정세에 떠밀려 ‘남면북양’이라는 모토 아래에 면화증산에 한창 박차를 가해야 했던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경제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를 통해 방적 및 면직공업의 원활한 운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원료가 되는 목화의 공급확대를 독려하고 자급자족의 기반확보에 더욱 분발을 촉구하려고 했던 식민통치자들의 저의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보다 훨씬 앞서 1916년에 이미 ‘재면기념비(栽棉紀念碑, 현재는 멸실상태)’란 것이 조성되어 있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이 비석이 건립된 장소는 송도신사(松島神社, 목포부 송도정 1번지)의 경내이며, 이 해가 바로 ‘육지면 재배 10주년’에 해당한다는 뜻에 따라 이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이 비석의 전액(篆額)은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글씨이며, 비문(碑文)은 총독부 농상공부장관이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짓고 중추원부찬의 정병조(鄭丙朝)가 썼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비석 자체에는 “대정 5년(1916년) 병진년(丙辰年) 8월”에 세운 것으로 적혀 있으나, 이와는 다르게 『목포부사(木浦府史)』(1930), 399~400쪽에는 해를 바꿔 “대정 6년(1917년) 5월 13일 경내(境內)에 재면기념비를 건설”했다고 하는 구절이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20년 간격으로 ‘육지면 재배’와 관련한 기념비가 잇달아 건립된 셈인데, 이처럼 동일한 주제의 기념행사를 놓고 — 그것도 동일한 지역 내에서 — 두 차례나 비석을 세운 것은 일제강점기의 여타 사례들을 통틀어 살펴보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간주된다. 그런데 듣자 하니 현재 이 기념비는 지난 2012년 5월 21일자로 목포시 문화 유산 제6호(‘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비’)로 지정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조선총독의 이름까지 버젓이 새겨져 있는 일제의 기념물을 문화재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암만 봐도 지나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제작 배포한 ‘시정기념엽서(始政紀念葉書)’ 시리즈 가운데 ‘시정 5주년기념엽서(1915년 10월 1일 발행)’를 보면, 벼이삭과 목화송이를 묘사한 그림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다 군산항(群山港)의 미곡집적상황(米穀集積狀況; 쌀가마니)과 목포항(木浦港)의 면화집적상황(棉花集積狀況; 솜포대)을 담은 사진자료를 배치한 도안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이 등장하는 까닭은 식민통치의 치적을 드러내어 이를 과시하려는 의도라고 해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미(米, 쌀)의 군산’이라거나 ‘면(棉, 목화)의 목포’라거나 ‘전남(全南)의 삼백(三白; 쌀, 누에고치, 목화)’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어처럼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구태여 이런 표현들의 존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목포항의 부두에 산더미처럼 쌓인 저러한 면화포대야말로 그 자체가 곧 전형적인 식민지 수탈경제의 상징이라는 점은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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