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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체포하러 가니… 어느 친일파가 보여준 의외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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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연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 과정은 험난했다. 친일파들이 집권세력을 형성했고 대통령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훼방했기 때문이다.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盧德述, 1899~1968)은 주로 중등학교 학생들을 검거했다. 그는 독립운동권 학생들을 잔혹하게 고문해 순국하게 만들었다. 1949년 2월 19일 자 <서울신문>은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붙들린 스무 살 전후의 유진흥이 “고문 끝에 피를 토하며 ‘노(盧)놈, 노놈’하고 부르짖으며 절명”했다고 전한다.

노덕술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는 애를 먹었다. 서울 효창동의 동화백화점 지배인 집에 은거하는 그의 옆에는 무기와 지프차를 보유한 병력이 있었다. 체포 다음 날 보도된 1949년 1월 26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은 “체포 당시 정복을 입은 경관이 6명이나 권총을 소지하고 그를 보호하고 있는 한편, 찝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민특위 경찰들은 그들의 총부터 압수해야 했다.

반민특위 체포 대상 제2호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이종형(이종영, 1895~1954)은 일제 밀정으로 활약하며 독립투사 250명이 붙들리게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대동신문사 창업주인 그는 1948년에는 서울운동장 반공대회 등을 통해 ‘친일청산은 김일성 앞잡이’ 등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유포하며 친일청산을 훼방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10일 이종형 체포 작전에 나섰다. 그날 저녁 8시 30분쯤 신형식 조사관과 형사들이 지금의 청와대 동남쪽인 그의 소격동 자택을 방문했다. 1977년 6월 20일 자 <경향신문> 5면 특집에 따르면, 한복 차림에 불쾌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온 54세의 이종형은 “무슨 죄가 있길래 잡으러 왔느냐?”며 험상궂게 굴었다. 그러자 신형식은 형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형사들이 달려들자 이종형은 벼란간 육혈포를 품속에서 꺼내 위협”했다고 기사는 말한다. 형사들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고 쇠고랑을 채웠다.

독립군 잡는 친일경찰

▲KBS 인물현대사 최능진편(2003.11.21)에서 친일경찰로 소개된 최연 ©KBS역사저널그날 유튜브 캡처

이들과 달리 친일파 최연(崔燕)에 대한 체포는 정반대였다. 노덕술이 체포된 다음 날인 1949년 1월 26일 저녁 7시경이었다. 반민특위 조사관 김용희가 경찰 3명과 함께 지금의 서울 신당동에 소재한 최연의 집을 방문했다. “반민특위에서 조사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갑시다”라는 김용희의 말에 대한 최연의 반응이 위 <경향신문>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김용희의 공손한 말에 최연은 머리를 숙인 채 한참을 있다가 ‘모든 죄과를 뉘우치면서 잡으러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며 순순히 따라나섰다. 그는 곧바로 특조위에서 신문을 받고 성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위의 진상규명보고서 제4-18권 ‘최연 편’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최령(崔鈴)이라고 알려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령 편’은 “본명은 최창렬이며 1932년 후반경에 최령으로 개명했다가 해방 후 최연으로 다시 개명했다”고 설명한다.

동학혁명 4년 뒤인 1898년에 출생한 최연의 출생지는 함흥 북쪽인 함경남도 신흥이다. 함흥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한 뒤인 1916년에 함흥경찰서 고원(雇員)으로 취직해 사환 비슷한 일을 하던 그가 경찰이 된 것은 2년 뒤다.

순사 재직 중인 1922년에 경부보 시험에 합격해 함남 신포경찰서 경부보가 된 그는 그 뒤 영흥경찰서·혜산경찰서·함경남도경찰부·황해도경찰부·경기도경찰부에 근무하며 경부를 거쳐 경시 계급까지 승진했다. 일제하의 마지막 근무지인 경기도경에서는 경시 계급으로 형사과장을 지냈다.

위 <경향신문>은 친일경찰 30여 명이 반민특위에 검거된 일을 설명한 뒤 “그중에서도 최연의 검거는 경찰에 치명적이었다”라고 평한다. 해방 뒤에 경찰 창설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그가 붙들린 일은 당시 경찰에 충격이 됐다.

그는 친일경찰들의 롤모델이 될 만했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4차례에 걸쳐 훈장 혹은 표창을 받고, 1941년에 이른바 일본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중일전쟁 중인 1940년에는 이 전쟁의 공적이 인정돼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또 1936년에는 상금으로 은사금 70원을 받았다. 1935년에 서울 동대문 밖 회기리의 대창직물회사 제2공장에서는 여성 직공 약 400명이 하루 12시간 노동하고 기숙사 제공에 6원~20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월급을 받았다(<동아일보>1935.4.23.-4면). 상금 70원은 대창직물 숙련노동자의 3개월 보름 월급이었다. 이런 에이스급 친일경찰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순순히 체포됐으니, 친일경찰들의 입장에서는 기운이 빠질 만했다.

최연이 훈장과 포상을 많이 받은 것은 주된 근무지가 함경도였던데 기인한다. 독립군을 자주 접하는 곳이라 위험할 수도 있는 이곳에서 일제가 원하는 성과를 많이 배출했다. 1937년에 최현과 김일성 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이 함북 갑산군 혜산진의 일제 관공서들을 공격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때 그가 “혜산경찰서 서장을 대장으로 하는 토벌대에 소대장으로 참여하여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추격과 토벌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지나사변공적조서>는 보천보전투 혹은 혜산사건으로 불리는 위 전투에서 그가 혜산경찰서장을 보좌하여 800명을 붙잡는 데 기여했다고 알려준다. 백선엽이 독립군 잡는 만주국 군인이었다면, 그는 독립군 잡는 일제 경찰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혜산경찰서 경부로 근무할 당시 주로 중국공산당 등과 연계해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에 대한 공격과 체포에 가담했다”라고 설명한다.

1949년 6월 24일자 <연합신문>에 따르면, 그달 22일 반민특위 재판 결심공판에서 김웅진 검찰관은 “혜산사건의 토벌대장으로 애국지사 박달 씨를 위시하여 수백 명을 검거·투옥하고 이중 사형 4명, 무기 164명의 희생자를 내었으며, 일제 경관의 최고 요직인 경기도경찰부 형사과 과장까지 역임한 것은 가장 충실한 일제의 주구로 볼 것”이라며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그는 한국 민중과 독립군의 연계를 차단하는 데도 관여했다. <지나사변공적조서>는 그가 부락 99곳 등을 돌며 “각종 계층을 집합시키고 좌담회·강연회를 개최하고 시국인식의 앙양, 국방사상의 보급에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는 1918년부터 27년간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이 기간에 축적한 친일재산은 그가 일제를 위해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혜산사건 때 항일군 800명을 검거하는 데 관여한 것은 그 정도 봉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반민족행위였다.

그가 1945년 전에 반성했다면 어땠을까

▲서울 중구의 한 은행 건물 주차장 입구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자리임을 기념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1999년 세운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연의 경찰 경력은 해방 뒤에도 이어진다. 미군정부터 정부수립 직후까지는 종로경찰서장, 경기도경찰부 경찰부장보좌관 겸 경무과장, 중앙경찰청장, 제1경무총감부 고문관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에 의하면, 고문관을 그만둔 것은 1948년 9월이다.

그의 사직은 심경의 변화 때문이었다고 알려졌다. 위 <경향신문>은 “그는 64세(실제는 50세)의 나이로 반민법이 제정되려는 움직임이 있자 수도청 고문 자리를 내놓고 서울 중구 신당동 자기 집에 은거하며 세태를 관망하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그가 경찰을 그만둔 달에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공포(9.22)됐다. 친일청산이 가시화되자 공직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검찰은 징역 10년을 구형했지만, 1949년 7월 6일 반민특위 특별재판부는 공민권 정지 10년 형을 선고했다. 한 달 전인 6월 6일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공격해 친일청산의 동력을 떨어트린 점도 이런 형량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최연은 반민특위의 체포에 순순히 응하고 반성의 뜻을 표시했다. 그 전에 공직도 그만뒀다. 뻔뻔한 여타 친일파들과 대비되지만, 그의 죄과가 너무 크다는 점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무장 독립투사들이 꼭 이민족 일본의 지배가 싫어서보다는 사상 최악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가 싫어서 투쟁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경찰 생활의 대부분을 독립투사 토벌로 보냈다.

그런 인물이 27년간 일본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하면서 이런저런 표창들을 받았다. 반성하는 모습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나왔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공민권 정지 10년 형을 선고받은 날로부터 9년이 좀 안 되는 1958년 11월 14일,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성 기자

<2025-01-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경찰이 체포하러 가니… 어느 친일파가 보여준 의외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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