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삼청장과 그 터, 독립운동가 김규식 기념공간으로 만들어 역사교육에 활용해야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3월 “과거 권위주의 시대 밀실정치의 산실이었던 안가를 철거하고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라고 발표하면서 궁정동, 청운동, 삼청동 등에 있는 안가 12채 모두 철거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결과 박정희가 ‘대행사’를 즐기다 암살된 궁정동 안가가 7월 1일 무궁화 동산으로 탈바꿈하여 공원이 되면서 궁정동, 청운동 안가는 사라졌다. 삼청동 안가의 경우 서울시와 협의해 처리하되 기념품 가게까지 만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밝혔다.
하지만 삼청동 안가는 헌법재판소장 공관,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윤석열 일당의 불법 계엄과 내란 모의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다.
서울중앙지검이 작성한 전 국방부장관 김용현의 공소장에는 ‘삼청동 안가’가 네 차례 등장한다. 또한 윤건영 의원은 윤석열 정권 초기 삼청동 안가를 술집 바(bar) 형태로 개조하려 했다는 제보도 공개했다(필자는 현장 답사와 소유관계 등을 미뤄볼 때 술집 바 형태로 개조하려던 공간은 현재 고급 한옥과 마당이 있는 삼청동 145-20번지의 안가로 추측한다).
“대통령 윤석열은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둔 2024. 3. 말 ~ 4. 초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 안가에서 당시 국방부장관 신원식, 국가정보원장 조태용, 국군방첩사령관 여인형 및 피고인(당시 경호처장)과 함께 식사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시국상황이 걱정된다고 하면서 ‘비상대권을 통해 헤쳐 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였다.”
“대통령 윤석열은 2024. 5. ~ 6.경 위 삼청동 안가에서 김용현 및 여인형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중, 시국 걱정을 하면서 ‘비상대권이나 비상조치가 아니면 나라를 정상화할 방법이 없는가’라고 말하였다.”
“대통령 윤석열은 2024. 6. 중순경에도 위 삼청동 안가에서 김용현, 여인형, 곽종근, 이진우 및 합동참모본부 차장 강호필(현 지상작전사령관)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시국상황에 관해 이야기하였고, 김용현은 대통령 윤석열에게 ‘이 4명이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장군’이라고 말하였다.”
“김용현은 2024. 12. 3. 19:20경 대통령 윤석열과 함께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 안가에서 경찰청장 조지호와 서울특별시경찰청장 김봉식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 윤석열은 ‘종북좌파 세력 때문에 나라가 상당히 혼란스럽다’, ‘오늘 밤 22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해야겠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군이 국회 등 여러 장소에 출동할 것이다’, ‘경찰이 나가서 국회 통제를 잘해달라’고 말하였고…”
역대 대통령들의 삼청동 안가 사용법
삼청동 안가가 처음이자 집중적으로 언론에 노출된 때는 전두환 퇴임 직후 5공 비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1988년이었다. 전두환은 퇴임 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자신의 호를 딴 일해재단 설립을 추진하면서 장세동 당시 경호실장을 앞장세워 재벌들에게 598억 5천만 원을 강제로 받아냈다. 이때 재벌들을 불러 모은 곳이 바로 삼청동 안가였다.
노태우는 대통령 당선 뒤 경호상 편의를 위해 연희동 자택에서 삼청동 안가로 이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때까지 상도동 사저에 머물러 삼청동 안가를 임시 숙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김영삼 정권 시절 철거 위기를 모면한 삼청동 안가가 다시 주목을 받은 시기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1998년 1월~2월. 김대중 당선자는 당시 일산 사저와 함께 삼청동 안가를 임시 숙소로 사용하면서 장관 인선, 외부 인사 면담 등 정권 인수 작업을 진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삼청동 안가를 공원으로 바꿔,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로 했지만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이명박도 대통령 당선 이후 가회동 자택을 떠나 삼청동 안가로 옮겼고 대통령 취임 후에도 주말이면 안가에 딸린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를 즐겼다. 이명박은 취임 초부터 뉴라이트 김진홍 목사를 안가로 불러 예배를 본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이후 삼성동 자택에 머물다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인수위원회 시기에는 삼청동 안가에서 자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잇따라 모임을 가지면서 안가 사용이 빈번해졌다. 급기야 2015년 7월 재벌 총수들을 안가로 불러 모은 뒤 774억 원을 강제 모금해 만든 것이 미르·케이(K)스포츠재단이다. 즉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 시작이 바로 삼청동 안가였던 셈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김규식의 삼청장과 그 터
윤석열 정권 들어 관저-집무실 용산 이전과 청와대 개방을 계기로 이곳 삼청동 안가 영역에 존재했던 옛 삼청장을 복원하여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복원하자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으로, 1922년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144명의 각국 대표가 자리했는데, 한국은 가장 많은 수인 56명이 참가하였다. 김규식은 홍범도, 여운형 등이 참여한 이 대회의 한국 대표단장이었다. 해방 정국에서는 김구, 이승만과 더불어 ‘우익 3영수’로 꼽히면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낸 김규식은 남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남북요인회담(4김회담)을 가졌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였으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에 납북되어 그해 12월 10일 서거하였다. 이후 김규식 후손들은 납북자 가족이라는 따가운 시선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그의 독립운동 업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김규식은 납북을 빌미로 서훈조차 받지 못하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그런 탓으로 김구 선생의 사저 경교장, 이승만의 사저 이화장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과 달리 김규식의 삼청장과 그 터는 시민의 접근이 막힌 채 역대 정권의 안가로 쓰이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규식 선생의 손녀인 김수옥 여사(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가 대표로 있는 우사김규식선생연구회는 문재인 정부 들어 여러 차례 ‘삼청장을 복원해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냈지만 복원은커녕 경호상의 이유로 관람조차 할 수 없었다.
역사학자 윤경로, 서중석, 심지연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는 우사김규식선생연구회는 2022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삼청장 복원을 위해 현장 답사, 문헌 연구, 증언 채록, 학술회의 등의 선행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한옥과 양관으로 구성된 삼청장 터는 현재 삼청동 145-6번지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삼청장 위치 비정 작업을 전담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특임연구원은 “삼청동 안가 일대는 원래 고종 시대에 태화궁이 자리하였다가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이윤용과 민규식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의 거처로 사용되는 등 역사의 굴곡이 가득 배어있는 공간이었다”면서 “이러한 흔적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김규식 선생의 활동 근거지였던 삼청장을 복원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고 긴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내란 일당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요즘, 친일과 독재의 잔재로 얼룩진 삼청동 안가를 이번에야말로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삶을 바친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기억할 수 있는 삼청장으로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활짝 열린 역사교육공간으로 만들자.
[참고 자료]
이순우, 「삼청장 구역의 위치고증과 공간변화에 대한 고찰」, 『우사김규식선생연구회 학술회의』, 2024.
임상범, 「대통령 경호처가 관리하는 이 집, 주인들의 계보가 심상치 않다」, SBS 2022. 6. 30.
남수현, 「우사 김규식 살던 삼청장, 청와대 개방 계기로 복원해야」, 중앙일보 2022. 5. 26.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족문제연구소 월간지에도 실립니다.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우사김규식선생연구회 이사이다.
방학진 기자
<2025-01-19>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