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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52년 백골단의 원조… 전주 친일 부호가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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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백남신

백골단은 이승만 대통령의 퇴임이 임박한 시점에 등장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4년제 대통령에 당선되고 24일 취임식을 가진 이승만의 임기 만료 시점이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상반기에 논란이 됐다. ‘7월 19일이다’, ‘7월 23일이다’와 더불어 ‘정부수립일인 8월 15일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런 시기에 공포심을 조장하며 이승만을 도운 것이 백골단과 땃벌떼·의혈단·민족자결단 등의 극우단체다.

여소야대 때문에 국회 간선제로는 재선이 힘들었던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헌법 절차를 무시한 채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다(발췌개헌·부산정치파동). 전쟁 때문에 선거 실시가 힘들면 현 대통령이 계속 재임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결국 그의 뜻대로 6월 23일 국회에서 ‘현 대통령 임기는 8월 15일까지’, ‘선거 실시가 힘들면 계속 재임’이 결의되고, 7월 4일 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됐다.

백골단 등은 국민들과 이승만 반대파를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5.14)한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5.25)하기 직전인 23일이었다. 다음날 나온 <동아일보> 2면 우상단에 따르면, 천여 명의 극우 시위대가 임시 국회의사당인 경남도청을 포위했다. 마이크가 장착된 택시 4대에서는 선전 방송이 나오고, 청년들을 태운 트럭에서는 삐라가 살포됐다.

그런 가운데 백두건을 두른 청년 약 300명이 ‘반민족 국회의원들'(이승만 반대파)의 이름을 적은 십자가와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이들은 꽹과리도 치고 고함도 질렀다.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며 의사당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사태는 백골단 명의의 사전 예고가 있은 뒤에 일어났다. “데모대가 일대 소동을 일으키기에 앞서 시내 각처에는 소위 반민족 국회의원을 타도하라는 뜻의 각종 벽보가 백골단의 명의로 광범위로 붙여졌다”라고 위 기사는 전한다.

백남신, 한국인의 만세운동 방해한 자성단을 이끌다

▲<친일인명사전> 백남신 편. ©민족문제연구소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을 대하는 방식은 일본제국주의 및 친일파와 흡사했다. 백골단 같은 극우단체를 앞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점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남신의 이력에서도 나타난다.

이 사전 제2권 백남신 편은 그의 이름 바로 밑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설립위원과 더불어 ‘전라북도자성회 회장’이라는 경력을 보여준다. 자성회는 1919년 3·1운동 때 ‘자성하자’, ‘자제하자’ 등을 외치며 한국인들을 위협하고 만세운동을 방해하며 무력 진압에 가담했다. 전북에서 이 조직을 이끈 것이 백남신의 핵심적인 친일 경력이다.

철종 임금 때인 1858년 전주에서 태어나 과거시험 폐지 이후인 1898년에 무관시험을 통과한 백남신은 지방 군대인 전주진위대·청주진위대에서 대대장도 역임하고, 부사관 및 장교 교육기관인 육군연성학교에서 교장도 지냈다. 또 궁내부나 탁지부 등에서 조세·재정 등의 업무도 수행했다. 일제의 착취 기관인 동척 설립위원이 된 것은 이런 이력과 무관치 않다.

식민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한 것이 조선식산은행이다. 백남신은 여기서는 상담역을 지냈다. 그는 동척과 식산은행 등에 가세해 경제·금융 침략을 도우며 화성농장이라는 사업체를 경영했다. 그러던 그가 3·1운동을 목격하고 결심한 것이 자성단(自省團) 결성이다.

자성단은 자제단·자위단·자경단·야경단 등으로도 불렸다. 자기 수양의 의미가 들어간 자성이나 자제 같은 표현이 가장 많이 쓰였지만, 이들의 실체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1919년 4월 28일 자 <매일신보> 4면에 실린 황해자제단 규약에 따르면, 이 단체는 회원 자격 중 하나를 “폭동이 기(起)한 시(時)난 군(郡)·경찰관서·면사무소 등을 원조하야 폭동의 진정에 노력할 자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일제 경찰은 시위대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그런 일제 경찰을 도와야 한다는 규정이 황해자제단 규약에 있었다.

경찰을 도우라는 조항이 없는 대구자제단 규약의 제2조에는 “본 단원은 금회 소요를 진제(鎭制)하고 불령한 도(徒)를 배제하기를 무(務)함”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경찰과의 공조 여부와 관계없이 소요 진압과 불온세력 배제에 힘쓰라는 규약 역시 단원들을 험악한 상황으로 내몰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성단의 운영 경비는 자체 조달해야 했으므로, 이런 조직을 이끌려면 재력이 필요했다. 백남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897년부터 1905년까지 약 7년 동안 전주진위대 향관으로서 궁내부·탁지부·내장원 등의 관련 직무를 겸임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라고 말한다.

그는 대한제국의 재정 사무를 처리하면서 부정 축재를 일삼았다. 이를 기반으로 대한제국 말기부터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에 따라 일본인을 채용해 화성농장과 그 지점을 운영했다. 위 사전은 “이러한 농장 경영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면서 또한 최대”였다고 말한다. 1911년 7월 28일자 <매일신보> 2면은 “오십만 원 이상의 자산가는 전국에 1천 18명인데 기중(其中) 조선인은 전국에 32명이라”라면서 “전주의 백남신”을 언급한다.

일제에 보인 충성심

▲조선식산은행의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1911년에 친일귀족 일부가 받은 포상금(은사공채) 5만 원의 2009년 현재 가치를 10억에서 50억 원 정도로 추산한다. 1911년에 50만 원 이상인 백남신의 재산은 2009년 가치로 100억 원 이상 혹은 500억 원 이상에 해당한다. 이것이 자성단(자제단) 단장 취임의 재정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친일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결정적 고비 때마다 일본의 영향력 팽창을 앞장서 도왔다는 점이다. 한국 강점 2년 전인 1908년에는 동척 전북설립위원이 되어 “회사 설립의 당위성을 전파함으로써 일본의 척식이민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제국주의 진영의 세계 착취에 비상등이 켜지자,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을 통해 소련 진영을 견제했다. 이때 백남신은 거금을 선뜻 쾌척해 일제를 놀라게 만들었다.

1918년 8월 27일 자 <매일신보> 3면은 “이번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하야 크게 감동하고 그 저장한 벼 4천 석 시가 6만 원을 군용미로 바치기를 결정”한 백남신의 헌납 사실을 소개한 뒤 “이는 실로 근래에 처음 보는 일이며 이번 출병을 당하야 군용미를 헌납함은 내선(內鮮)인을 물론하고 동씨(同氏)로서 처음이라”고 칭송했다.

조선인은 물론이고 내지인들과 비교해도 백남신이 처음이었다고 보도됐다. 일본 부자들보다도 한발 앞서 충성심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런 충성심을 다시금 증명한 것이 전북 자성단 결성이었다.

백남신은 3·1운동 진압을 위해 자성단도 운용하고, 일제의 영향력 팽창을 위해 여론 선전전에도 참여하고 기부도 많이 했다. 그만한 돈을 모은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주미상(米商)조합장·전주수형조합장 등의 지위를 얻은 것도 재산 축적에 기여했다.

그렇게 모은 친일재산이 일제강점기판 백골단 운용의 밑바탕이 됐다. 일본은 백남신을 포함한 자성단 관계자들의 노력을 높이 평했다. 2017년도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에 실린 역사학자 이양희의 논문 ‘3·1운동기 일제의 한국인 자위단체 조직과 운용’은 “일제는 만세운동 진압 및 회유에 있어서 한국인 자위단체가 확실한 효력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고 말한다.

일제는 백남신의 친일을 칭찬했다. 그에게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수여하고 목배(木杯)를 하사했다. 일제강점기판 백골단의 선례를 만드는 데 참여한 백남신은 목배를 받은 지 1년 뒤인 1920년 3월 16일 사망했다.

김종성 기자

<2025-01-1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52년 백골단의 원조… 전주 친일 부호가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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