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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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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을 지낸 유학자 출신 박제봉

▲역곡동 고택의 풍경2021년 6월 20일 역곡동 벌응절리에서 촬영한 역곡동 고택의 모습, 역곡동고택은 춘덕산을 배경으로 동향을 하고 있다. 6월 무성하게 자란 나무에 의해 그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 박종선

2021년 부천을 뜨겁게 달궜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역곡동 고택에 대한 부천시 향토문화재 심사였다. 2019년 12월 역곡동과 춘의동 일대가 ‘부천역곡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택에 대한 보존 유무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역곡동 고택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은 2020년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도에 경기도 지정문화재 지정을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2020년 11월 26일에 열린 제7차 유형문화재분과 회의에서 변형으로 인해 문화재 지정가치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지정에 탈락한 것이다.

이어 부천시 향토문화재에 신청하였다. 하지만 부천 지역 내에서는 이 집이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라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다수의 언론에서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 고택을 보존해야한다는 기사를 보낼 뿐이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이하 부천지부)는 2021년 3월 23일 부천시에 친일파 박제봉의 집 앞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시민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부천시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시청과 중앙공원 그리고 부천시청역에서 1인 시위를 하였다. 1인 시위는 5월 17일 시작하여 7월 3일까지 총 33회 진행하였으며, 특히 이 기간에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였는데도 많은 회원이 참여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회원인 정한교씨의 1인 시위부천지부는 부천시청, 중앙공원, 부천시청역 부근에서 1인 시위를 5월 17일부터 7월 3일까지 총33회 진행하였다. 1인 시위를 통해 역곡동 고택이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 박종선

부천지부는 왜 성명을 발표하고 1인 시위를 했을까

부천지부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부천에서는 친일파 박제봉에 대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영원히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을 것이다. 즉, 시민들은 친일파 박제봉에 대한 존재를 모르고 그의 행적도 몰랐을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에도 그 어떠한 단죄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단죄받을 계기를 마련하였다.

만약 심의를 통과하였다면 그 후유증은 더 컸을 것이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 고택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시민들은 친일파가 살았던 집에 시민들의 세금을 넣어 보존 관리하는 데 반대했을 것이다.

친일파 박제봉(1892~1964)의 행적

그렇다면 박제봉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그의 인생은 크게 네단계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다.

첫번째, 부훈도, 훈도, 교유

1916년부터 1927년까지 학교에서 부훈도, 훈도, 교유 등으로 근무하였다. 1916년 10월부터 1917년까지 경성 수하동공립보통학교 부훈도를 지냈으며, 1918년에 는경성 매동공립간이실업학교 훈도 겸 매동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근무하였다. 이외에도 경성 수하동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로 그리고 경성상업학교에서 교유로 근무하였다.

두번째,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 촉탁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에서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촉탁은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일제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 보조적 수단으로 채용하는 임시직으로서 주로 역사, 음악 등 학술분야에서 많았다. 박제봉은 여기에 근무하며 1937년 8월에 국방헌금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문서과에 1000원을 헌납하였다. 월 수당이 90원이었는데 무려 1000원을 헌납해 매일신보 뿐만아니라 동아일보, 경성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친일파 박제봉의 천원 국방헌금 기사친일파 박제봉은 학무과에 근무하여 1937년 8월에 국방헌금으로 천원을 헌납하였다. 이 내용은 1937년 8월 19일 매일신보에 미담으로 실리게 된다. ⓒ 박종선

세번째,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참사

조선유도연합회는 전국의 유림(유학자)을 연합해 만든 친일단체로,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섰다. 박제봉은 여기에서 참사를 담당하였다.

네번째, 1941년 이후 경학원 사성(司成)

경학원(經學院)은 조선총독부가 성균관의 기능을 식민 지배 정책과 이념을 홍보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 설립한 직속 기구다. 사성은 경학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책임자로서 자발적 친일 의지가 없었으면 오를 수 없는 고위직이다. 그 자체로 친일파로 규정되는 것이다.

박제봉은 경학원 사성으로 있으면서 1941년 10월 중견 지도자로 선발된 조선유림성지순배단의 간사로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메이지(明治)신궁을 비롯한 성지·유적을 순례하였다. 1942년에는 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정무총감 오노(大野)가 이임하는 것을 전별하며 시를 지었는데, 특히 총독 미나미를 살아있는 부처라고 칭송하였다.

네 단계의 인생 중 세번째와 네번째가 친일 행위에 해당이 된다. 박제봉은 해방 이후에 국회사무처 후생과장과 도서실장, 성균관고문, 대한유도회 총본부 고문, 전국 죽산박씨 대종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제봉은 1964년까지 살았는데 그의 무덤은 그가 태어났던 그 집의 뒷산에 있다.

역곡동 공공주택사업은 2028년 6월 준공예정이다. 역곡동 고택은 사라지겠지만 그 집 근처에 부천시 주관으로 단죄비가 세워지길 바라본다. 부천시의회는 2021년에 ‘부천시 일제잔재 청산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으므로 그 법적 근거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박종선 기자

<2025-01-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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