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숙 작가, 소설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로 석정 윤세주 조명한 까닭
“친일파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이 소설을 외면할 권리는 없다. 아니, 설령 친일파라 할지라도, 이 작품을 다 읽기도 전에 옷깃을 여미며 두 눈을 감게 될 것이다.”
김춘복 소설가가 최필숙 작가의 소설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경상국립대 출판부 기획, 지앤유 간)를 읽고서 보낸 찬사다. ‘독립군 며느리’를 자처하는 최 작가가 펴낸 이번 소설을 읽으며 김 소설가의 말처럼,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책을 손에 잡은 지 며칠만에 독파했다.
이 소설은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로 활약했던 석정(石鼎) 윤세주(1900~1942,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출생과 성장, 항일투쟁, 그리고 죽음까지 그려놓았다.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는 대사로 더 유명한 약산 김원봉(1898~1958) 장군 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인 윤세주의 치열한 독립투쟁기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최필숙 작가가 많은 밀양 독립운동가 가운데 오롯이 쫓은 윤세주는 가장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웅변가이며 이론가였고, 예리한 판단으로 편집‧방송을 맡았으며,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훗날 존경 받는 인물이 된 윤세주는 1919년 밀양 3‧13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그해 11월 만주에서 의열단 창립에 가담했고, 1920년에는 밀양 폭탄 의거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필숙 작가는 우리가 일제강점기 역사의 빈틈을 알지 못하는 속에, 윤세주의 행적을 통해 인물 간 대화를 복기해 놓았다. 석정과 의열단의 항일투쟁기는 그 어떤 소설적 장치보다 강력하게 우리를 역사 속으로 안내한다.
윤세주, 김원봉 그리고 밀양
윤세주의 인생 굽이마다 ‘밀양’이 있다. 윤세주의 업적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史)가 되었다. 밀양을 빼고는 이 소설을 얘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역대 조선 독립운동가 중 가장 높은 현상금의 주인공 김원봉과 밀양의 독립운동가에 주목했다. 밀양이 의열단의 성지가 된 데에는 백민 황상규(1890~1931,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라는 인물과 깨어있는 밀양 학생들이 있었던 덕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했고, 초등학교 때는 일왕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리고 퇴학을 당할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밀양 사람 김원봉의 곁에는 언제나 군말 없이 그를 도운 윤세주가 있었다.
일본군이 중국 대륙을 깊숙이 쳐들어갔을 때 그는 김원봉과 헤어져 조선의용대 병력을 이끌고 화북 지대로 이동해 중국항전에 적극 참가했다. 석정은 치열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타이항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현재 태항산에는 항일 전투에서 희생된 수많은 중국인 사이에 그가 묻혀 있다.
윤세주는 ‘돌석(石)에 솥정(鼎)’을 쓴 아호에 대해 “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굶지 않도록 밥해 주는 돌솥이 될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필숙 작가는 “‘솥’은 곧 민족을 뜻한다”라며 “‘솥 정’자가 아니라 일부에서 ‘바를 정(正)’자로 쓴 것은 잘못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중국 정부도 묘비에 ‘솥 정’으로 표기했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념이 없었다”
최필숙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이념이 없었다. 오직 일제와 싸워 그들을 몰아내겠다는 신념과 희생만 있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이념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최고 이념은 ‘민족의 해방’ 민족주의다. 그들이 찾아준 나라에 살면서 그들의 이념을 지적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며 제자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아는 한 청년이 말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근처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를 기념관 앞에 모셔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저곳에 우리 외할아버지 흉상이 있는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 그 분이 황상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사실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2022년의 일이다.”
<역사> 교사였던 최 작가가 말한 청년은 그의 제자이자 황상규 선생의 외증손자다. 이 이야기를 한 최 작가는 “이념이 무엇이길래? 1931년 생을 마감한 황상규를 그 손녀조차 할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을까. …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으랴”라고 했다.
최 작가는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낸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를 쓴까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역사를 잊으면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된다는 말이 있다. 요즈음의 작태를 보면서 ‘친일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해방 직후 역사의 대가(代價)’라 여긴다. 동시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어 “가족을 볼모로 하는 협박을 누가 견딜 수 있었을까? 가족의 목숨까지 담보해야만 할 수 있었던 것이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것을 망각하고 살고 있다. 당연한 은혜로 생각했다. 선열의 희생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가 된듯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념 갈등’과 관련해 최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살지 않았던 나는 당시 독립운동가를 이념으로 재단할 자격이 없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그들을 재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고향 밀양에는 그 이념의 굴레가 아직도 건재하다”라고 했다.
“그 굴레는 약산 김원봉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활동하다 희생당하신 분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한다. 6.25전쟁 당시 겪었던 학살의 기억은 그들을 움츠러 들게 하였다. 저 역시도 외부인과의 접촉을 경계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이런 밀양에 단비가 내렸다. ‘암살’이라는 영화가 단비가 되어 밀양땅을 적셨고,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영화 속에서 툭 던져진 한마디. ‘가 선생께 전하시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이 말은 밀양의 역사를 바꾸었다. 숨겨야 했던 약산 김원봉은 물론 그 그늘에 가려진 많은 독립운동가가 재조명되었고, 밀양인의 마음에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워한다.”
“을사늑약 120년… 여전히 우리는 겨울 속에 산다”
최 작가는 “올해 을사년은 일제가 늑약으로 우리의 주권인 외교권을 앗아간 지 120년이 되는 해이고, 그 사슬에서 해방된 지 80년이 되는 해이다”라며 “해방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우리는 겨울 속에 산다”라고 했다.
윤세주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던 최 작가는 “2006년, 태항산 자락에 누운 석정 윤세주를 만났다. 약산 김원봉의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 속에 누워 있는 그를 직접 만났다. 그의 죽음은 곳곳에 있었다. 실제 묘소인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능원에서, 석문촌에 있는 초장지에서, 그가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흑룡동굴에서, 실제 죽음을 맞은 장자령 다락밭에서, 호가장 전투가 있었던 호숙영의 집에서, 한글 표어가 쓰여진 운두저촌에서. 나는 수많은 곳에서 석정을 만났다”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내 맘에는 석정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숙제가 생겼다. 소설로 쓰인 것도 읽었고, 학술적인 저서들도 읽었다. 그러다 이 숙제를 내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 ‘실패의 반대말은 도전이다’는 말에 용기를 얻고 자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석정 할아버지(나는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라 부릅니다)와 석정과 인연 있는 사람을 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최 작가는 “이 책엔 석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교사였던 나는 우리 근대의 시작이 동학농민전쟁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부터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라며 “마흔 둘에 생의 끈을 놓았던 백민 황상규의 심적 고통, 의열단을 기획하고 직접 만든 사람, 의열투쟁으로 죽어가는 동지를 보며 아팠을 백민, 동지의 희생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자책했을 약산, 밀고자에 의해 일이 실패로 돌아간 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그래서 서로를 의심해야 했던 의열단원의 마음을 소설이라는 요소를 통해 공감해보고 싶었다”라고 했다.
“책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능력이 부족하여 담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에 내놓았다. 공감해주실 분들이 계실 것이라 믿어서이다. 태항산 자락에서 석정을 만난 무수한 사람과 나라를 찾아준 독립운동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과감해졌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그의 성정은 까칠하다. 흐트러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그가 석정을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으로 보답해야 할 사람’으로 표현하였을 때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석정 윤세주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윤성효 기자
<2025-01-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원봉과 함께 기억해야 할 ‘밀양사람’ 윤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