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를 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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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를 쓴 까닭

저자 최필숙

역사를 잊으면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의 작태를 보면서 ‘친일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해방 직후 역사의 대가(代價)’라 여깁니다. 동시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생각합니다. 가족을 볼모로 하는 협박을 누가 견딜 수 있었을까요? 가족의 목숨까지 담보해야만 할 수 있었던 것이 민족해방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것을 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선열의 희생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가 된 듯 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살지 않았던 나는 당시 독립운동가를 이념으로 재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그들을 재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 고향 밀양에는 그 이념의 굴레가 아직도 건재합니다.

그 굴레는 약산 김원봉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활동하다 희생당하신 분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6·25전쟁 당시 겪었던 학살의 기억은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외부인과의 접촉을 경계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이런 밀양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암살’이라는 영화가 단비가 되어 밀양 땅을 적셨고,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툭 던져진 한마디

“가 선생께 전하시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이 말은 밀양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숨겨야 했던 약산 김원봉은 물론 그 그늘에 가려진 많은 독립운동가가 재조명되었고, 밀양인의 마음에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한 청년은 어머니로부터 백민 황상규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옆 흉상으로 만들어진 외할아버지를 보고팠던 그녀는 아들에게 그곳으로 데려달라 하였으나, 백민이 누군인지 아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청년은 백민을 알지 못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들어도 그가 자신의 외증조부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보도연맹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2024년 말, 외할아버지의 억울함이 풀려 국가 배상이 확정되어서도 여전히 남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청년은 나의 제자입니다. 이 책을 쓴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밀양인은 기대에 찼습니다. 약산이 드디어 훈장을 추서받고 민족해방가로 자리매김하겠구나! 약산을 흠모한 모든 이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진행되었던 ‘약산 서훈 관련 학술회’에 참석했던 나는 참여자 없이, 기자만 가득 찬 학술회를 보았습니다. 그 긴 과정의 끝자락에 시간을 얻어 말했습니다.

“이 상황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약산이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누가 훈장을 달라하였느냐? 이런 훈장은 받지 않겠다고 하실 것이다. 차라리 남과 북의 대표자 둘의 이름이 새겨진 한 장의 종이자락이 더 나을 수 있다. 이런 논의 자체가 후손들을 분노케 할 것이다.”

올 을사년은 일제가 늑약으로 우리의 주권인 외교권을 앗아간 지 120년이 되는 해이고, 그 사슬에서 해방된 지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방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우리는 겨울 속에 삽니다.

나는 2006년, 태항산 자락에 누운 석정 윤세주를 만났습니다. 약산 김원봉의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 속에 누워 있는 그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곳곳에 있었습니다. 실제 묘소인 한단시 열사능원에서, 석문촌에 있는 초장지에서, 그가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흑룡동굴에서(나는 중국의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조선의용대 정치위원에 대한 예우였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석정이 죽음을 맞이하는 당시에 이곳까지 올 수 없었다는 부하의 증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죽음을 맞은 장자령 다락밭에서, 호가장 전투가 있었던 호숙영의 집에서, 한글 표어가 쓰여진 운두저촌에서 나는 수많은 곳에서 석정을 만났습니다. 이후 진행된 중국 답사. 처음 갔을 당시 근무하고 있던 밀양여고 학생들과 함께였고, 이후 고등학생, 대학생, 역사교사, 일반인 등과 동행하였습니다. 지원해주신 단체가 석정과 약산의 후손들이 운영한 것이었고, 나는 또 그들에게 빚을 지며 태항산 자락을 찾았습니다.

언젠가부터 내 맘에는 석정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숙제가 생겼습니다. 소설로 쓰여진 것도 읽었고, 학술적인 저서들도 읽었습니다. 그러다 이 숙제를 내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습니다. 밀양사람인 내가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나, 언제나 생업에 쫓기는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정년 4년을 앞두고 학교부터 그만두었으나, 과로사한다는 백수처럼 나날을 보냈습니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다 ‘실패의 반대말은 도전이다.’는 말에 용기를 얻고 자판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석정 할아버지(나는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라 부릅니다)와 석정과 인연 있는 사람을 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전국에서 찾아오시는 분들께 의열기념관을 안내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이 창단 단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어렸던 강세우는 어떻게 죽었을까?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어느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성우는 고향 함경도가 아닌 밀양에서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있었을까? 서상락은 왜 독일에서 죽음을 맞았을까? 누구도 묻지 않는 그 질문이 내면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역사책이 아닌 다른 글로 써야겠다는 결심이 오늘의 무모함을 낳았습니다.

단 한 번도 소설을 써보지 않은 내가,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는 내가, 감히 석정 할아버지를 소설 속으로 모셨습니다. 역사적 사건에 생긴 빈 공간과 내면에 느꼈을 수많은 감정을 내 상상력으로 보태면 역사소설이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이 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자판이 저절로 움직이는 경험도 있었고, 눈물로 인해 화면을 보지 못해 멈추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하니 글 쓰는 순간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석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교사였던 나는 우리 근대의 시작이 동학농민전쟁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부터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흔둘에 생의 끈을 놓았던 백민 황상규의 심적 고통, 의열단을 기획하고 직접 만든 사람! 의열투쟁으로 죽어가는 동지를 보며 아팠을 백민, 동지의 희생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자책했을 약산 김원봉, 밀고자에 의해 일이 실패로 돌아간 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그래서 서로를 의심해야 했던 의열단원의 마음을 소설이라는 요소를 통해 공감해보고 싶었습니다.

의열단장은 늘 용감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백이라는 자리를 수락한 뒤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였을까요?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담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공감해주실 분들이 계실 것이라 믿어서입니다. 태항산 자락에서 석정을 만난 무수한 사람과 나라를 찾아준 독립운동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과감해졌습니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지 이육사! 그의 성정은 까칠합니다. 흐트러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그가 석정을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으로 보답해야 할 사람’으로 표현하였을 때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석정 윤세주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요?

이 책에 나타난 석정 윤세주의 매력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어, 또 감히 이렇게 글을 씁니다.

글에 대한 그 어떤 평가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나의 숙제가 끝났으니, 다음 숙제를 위한 단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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