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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천에는 친일파 송병준이 소유한 ‘계농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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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행위뿐만아니라 친일 통해 부 쌓은 송병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을사5적, 정미7적, 경술9적2024년 6월 22일 서울 식민지역사박물관 답사때 촬영한 매국노 설명안내판이다. 나라를 팔아먹는 대가로 받은 작위와 은사공채가 인물의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 박종선

송병준(1858-1925)은 이완용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매국노(賣國奴)다. 일제가 표면상으로는 대한제국을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조선의 국권을 일제에 헌납하기 위해 노력한 고위관료들이 많이 존재했었다. 1905년의 을사5적, 1907년의 정미7적, 1910년의 경술9적이 대표적인데, 이 중 송병준은 정미7적에 해당한다.

고종 황제는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 동시에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이 된다. 일제는 이 일을 빌미로 고종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하였으며, 동시에 굴욕적인 정미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미조약의 핵심은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내정을 맡겠다는 것으로 여기에 이완용과 함께 송병준은 대한제국 관료로서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매국의 대가로 돈 요구

송병준은 1910년 8월 강제병합 되기도 전부터 일제에 돈을 요구하였다. 1909년 2월에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에게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1억 엔을 요구한 것이다. 정상적인 대한제국 관료라면 할 수 없는 말인데, 송병준은 이미 정신적으로는 일본인이 다 된 것이었다.

송병준의 돈에 대한 바람은 1910년에 이루어진다. 강제병합이 된 후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1년 8월까지 연수당 1600원을 받았으며,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子爵)의 작위도 받게되었다.

송병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바로 2000년대 초 후손들이 인천 부평구 에 위치한 미군부대 일대 땅 13만 평을 돌려달라며 국가에 소송을 낸 후부터다. 송병준이 100여 년 전에 부평을 비롯한 여러 곳에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통해 송병준의 친일 행위가 다시 전 국가적으로 회자한 것이다. 다행히 소송은 송병준 후손들의 패소로 결론났으며, 그 결과 친일의 행위로 받은 땅들은 국가로 귀속되었다.

송병준의 땅은 부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천에도 있었다. 하지만 부천에 있었던 송병준 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존재가 바로 신문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송병준이 소유한 농원의 이름은 ‘계농원(啓農園)’이며, 부평군(富平郡) 석천면(石川面)에 위치하였다. 이 행정지명은 1914년 이전으로 석천면에는 상리, 중리, 심곡리, 구지리가 있었다. 현재 행정지명으로 전환해 보면 부천시 상동, 중동, 심곡동, 송내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송병준이 소유한 계농원(啓農園)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사1913년 1월 19일 매일신보 기사는 현재의 부천시 상동, 중동, 심곡동, 송내동에 친일파 송병준이 소유한 계농원(啓農園)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박종선

명치38년(1905년) 4월 부평군 석천면 소사에서 송병준 자작 외 내지인 6명의 설립에 관한 계농원(啓農園)은 과수를 재식하야 이익을 획득하는 동시에…
– 1913년 1월 19일 매일신보

과수원으로 돈 번 일본인들

부천은 과거에 복숭아로 유명한 도시였다. 소사복숭아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수원의 딸기와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도 3대 과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관계로 부천시를 상징하는 시목(市木)은 복숭아나무이며, 시꽃(市花)은 복숭아꽃이며, 열매(市果)는 복숭아열매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복숭아 면적이 줄어들어 이제는 추억의 소사복숭아가 되었지만 그 역사는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에도 아픔이 있다. 바로 소사복숭아의 출발이 일본인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알려주는 신문기사가 바로 1913년 1월 30일에 발행된 매일신보이다.

제목 : 소사과원(과수원)의 분투

부평군 소사의 과수재배업은 현하 비상한 형세로써 발달하야 지금은 유수한 과예업으로 저명하게 되었는데 그 경로를 소급하야 조사한 즉 송(宋)자작(子爵)이 경영하기 전 즉 명치36년(1903년)경의 내지인 빈전전병위(濱田傳兵衛) 황목충일(荒木忠一), 죽원농원(竹原農園) 등이 결합하야 과수의 재배를 개시한 것이 동지 과수원의 효시가 되었다더라. 그 후 예기한 성적을 얻지 못함으로 혹 이 세계에 유력한 기술자를 초빙하야 실지에 대하야 조사를 행한 즉 동지는 절대적 과수재배에 불적당하다는 단안을 득하니 이에 공동업은 일시에 대둔좌를 폐하야 참혹한 속명에 빠져 재기치 못할 대창(상처)을 받았으나 공동자의 일인되는 빈전전병위씨는 크게 이를 분개하야 이에 단연분기하야 전래음식을 전망하고 개량비료와 분지에 전심분개를 게으르지 않고 결과로 속히 38년(1905년)에 송자작의 농원이 개시되어 지금은 불적당하다고 지목하던 소사는 일제히 이 업의 융성을 봄에 그 공적이 적지아니하더라.

즉, 송병준이 1905년 계농원을 조성하기 전 1903년 빈전전병위(濱田傳兵衛)와 황목충일(荒木忠一) 그리고 죽원농원(竹原農園)이 소사(素砂)에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과예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유미간지 대부 허가

송병준은 1913년 6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부평군 모월곶면 백석리 땅을 대부 허가 받아 개간하였다. 방조(防潮) 시설을 만들고 논으로 만들어 많은 이득을 챙긴 것이다. 현재의 부천시와는 무관하지만 일제가 변경한 행정구역을 보면 이곳은 부천군 서곶면에 해당한다.

▲부평군 모월곶면 백석리의 국유미간지를 대부허가 받은 송병준송병준은 방조시설을 설치하고 논으로 개간하여 많은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1914년 4월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곳은 부천군 서곶면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 박종선

이처럼 송병준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富)를 쌓았으나 역사에는 친일 매국노라는 이름 석자를 남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부천에는 송병준이 소유한 땅이 <디지털부천문화대전>의 한다농장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었는데, 이 기사를 통해 많은 시민이 알게 되고, 연구도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길 희망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박종선 기자

<2025-01-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부천에는 친일파 송병준이 소유한 ‘계농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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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천의 항일독립운동과 일제잔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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