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팔근
일본은 한국인 2만 1000여 명을 억류하고 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강제동원됐다가 전사한 이 희생자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공범이자 일왕의 충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일본은 그들이 일왕을 위한 전쟁에서 전사했다며, 위패를 안치해 놓고 신(神)으로 추앙한다. 그들이 약 246만의 전체 전사자들과 더불어 하나의 신으로 승화됐다면서, 전체를 합쳐 제사 지내는 합사(合祀)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불명예스럽고 모욕적인 합사에 맞서 한국인 후손들은 위패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인 합사자 유족 27명이 제기한 합사취소소송을 배상책임 기간인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유족들이 가장 중시한 것은 합사 철회다. 이와 더불어 사과 및 유골 양도와 손해배상액 ‘1엔’도 청구했다. 최고재판소가 기각한 것은 1엔 배상이다. 합사가 정당한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합사가 옳지 못하다는 점은 이런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인들은 자기 조상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돼 희생된 것에도 억울해하지만, 그렇게 희생된 조상이 야스쿠니신사에서 신으로 추앙되는 것에도 억울해한다. 한국인들이 이런 한을 갖게 된 것은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 묻힐 것’이라며 한국인들을 자신들의 전쟁터로 끌고 간 일본제국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제를 돕겠다며 한국인들의 참전을 부추긴 친일파들 때문이기도 하다. 가수 최팔근도 그런 부역자 중 하나다.
최팔근의 나니와부시가 미친 악영향
최팔근은 일종의 J-팝 가수다. 판소리와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 나니와부시(浪花節)가 그의 장르다. 2017년도 <동아시아문화연구> 제69집에 수록된 박영산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연구원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어 나니와부시에 대한 고찰’은 “나니와부시는 일본제국주의가 국민국가를 성립시키는 단계에서 떠올랐다”라며 “일본 전통예능을 석권하고 근대를 대표하는 대중의 소리문화로 활약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오락이며 예능이었다”라고 평한다.
식민지 한국에서 연예인 생활을 했던 최팔근은 일본에 갔다 돌아온 뒤 나니와부시 가수로 활약했다. 그의 인적 사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위 논문은 “생년월일도 알 수 없고, 태어난 곳도 부산 또는 대구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다. 그의 사진과 함께 실린 1940년 3월 15일 자 <조선일보> 4면 우중단 기사는 “동경에 일본낭곡(浪曲)학교를 설립하여 이 방면에서 상당한 활략을 하고 잇던 최영조 씨는 이번(에) 낭곡을 조선민중에게도 보급시킬 목적을 가지고 조선방송협회와 조선총독부의 의촉을 바더 조선 출생의 낭곡가로 명성 잇는 최팔근 씨와 함께 수일 전 입경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사진 좌측 인물인 최영조는 나이가 들었고, 우측인 최팔근은 그보다 젊다. 경험 있는 기획자와 젊은 가수의 조합이었다. 이 둘이 총독부의 개입하에 민중 보급의 임무를 띠고 입국했다. 총독부가 어떤 콘텐츠를 보급하고자 했는지는 최팔근의 국내 공연이 증명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팔근 편은 “1940년 12월에 부민관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고 매일신보사가 후원해 열린 ‘국민총력의 밤’에 출연해 나니와부시를 불렀다”고 알려준다. 귀국한 그해 12월에 지금의 서울시청 옆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최대 관변단체가 주최하고 총독부 기관지 발행사가 후원하는 행사에 출연했다. 전쟁 분위기를 부추기는 행사에 투입됐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조선 각지의 일본군 부대와 육군병원을 돌며 위문공연을 했다. “러일전쟁 때 뤼순 공격을 지휘하고 메이지 대장(大葬) 때 순사한 노기 마레스케를 주제로 만든 나니와부시 등을 공연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노기 마레스케는 1912년에 무스히토(메이지) 일왕이 죽자 할복자살을 통해 충성을 표시하며 사실상 순장의 길을 택했다. 그런 노기 장군을 찬미하는 공연에도 참여했던 것이다.
최팔근은 육군의 날 공연도 벌였다. 1942년에는 일본군 기지가 있는 서울 용산의 육군병원에서 제37회 육군의 날(3.8) 위문공연을 하고 “찬사를 받았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이처럼 그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나니와부시라는 장르를 갖고 들어와 일본군국주의를 퍼트리는 데 투입됐다. 일제가 그를 내세운 것은 새로운 장르로 한국인들의 의식을 개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노래는 라디오에서도 흘러나왔다. 일례로, 귀국 이틀 뒤 보도된 1940년 3월 17일 자 <조선일보> 4면 하단의 라디오 편성표는 오전 7시 50분에 동쪽 일왕(천황)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과 낮 12시 5분에 최팔근의 나니와부시 공연이 있다는 것 등을 예고했다.
그의 귀국을 보도한 위의 <조선일보> 기사는 향후 그가 “조선 전래의 춘향전·심청전 등을 랑곡화해서 방송”하고 “무대 실연까지 하게 되리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그가 주로 공연한 것은 침략전쟁 선전작품이다.
한국인들을 야스쿠니신사로 몰아간 최팔근
<친일인명사전>은 ‘백제의 칼’, ‘장렬 이인석 상등병’, ‘칠복의 출세’, ‘설중매’, ‘부평초’ 같은 그의 음반을 열거한 뒤, “이 가운데 ‘백제의 칼’은 ‘내선일체의 이념을 예술화한 단연 신기록의 절창’으로 선전”됐다고 말한다. 또 침략전쟁에 동원됐다가 한국인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을 다룬 ‘장렬 이인석 상등병’은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와 함께 선전됐다고 한다.
“지원병의 충렬혼! 나니와부시로 읊어진 충의병정의 기록 앨범.”
“소화 12년(1937) 이후 조선의 동포는 지원병을 전선으로 보냈다. 대동아의 인재 이인석의 충혼은 드디어 원반 예술로 출현.”
이 작품은 한국 청년들에게 이인석의 길을 따라나설 것을 부추긴다. 2022년에 <동아시아문화연구> 제89집에 실린 박영산 인하대 강사의 논문 “일제강점기 애국 로쿄쿠(浪曲) ‘장렬 이인석 상등병’에 대한 음반 연구”에 따르면, 이인석이 군중의 환송을 받으며 출정하는 대목에서 “이 같이 전송받아 전장에 나가, 큰 공을 못 세우고 돌아오겠나”라며 “일곱 번 죽어서 다시 살망정 나라에 바친 충성이 변할 것이냐”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런 뒤 이런 대사가 이어진다.
<이때에 수많은 군중을 헤치고 나온 사람이 있으니, 그는 이인석 부인 유씨였으니
아내: 아가! 아버지가 멀리 떠나신다. 안녕히 가시라고 해라.
이인석: 으음 정숙이냐, 아버지 얼굴을 꼭 봐두어라.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일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할 때에는 너는 엄마를 따라 동경 구단(九段) 정국신사(靖國神社)에 와서 애비를 찾으라.>
아내는 딸에게 “잘 다녀오시라고 해”라고 하지 않고 “안녕히 가시라고 해”라고 일러준다. 이인석은 딸에게 “야스쿠니신사에 와서 애비를 찾으라”고 말한다. “야스쿠니신사에 가서”도 아니고 “와서”다. 전쟁터에 나가면 당연히 죽어야 하고, 죽으면 야스쿠니에서 영원히 살게 되며, 야스쿠니는 우리 곁에 있다는 암시를 담은 작품이었다.
최팔근 같은 친일파들이 이런 선동을 하는 가운데, 수많은 한국인이 강제징병이나 강제징용의 형식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 뒤 일본은 그들의 위패를 야스쿠니에 안치해 놓고 ‘천황을 위해 죽으면 이렇게 보답받는다’는 메시지를 주입시켰다. 자신들에게 이용당해 죽임을 당한 한국인들을 그런 식으로 재활용한 것이다. 우리 아버지 위패를 빼달라는 한국인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일본은 한국인 희생자들을 계속 이용하고 있다.
최팔근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친일 행위의 결과물인 출연료와 음반 수입 등으로 생활했다. “정국신사에 와서 애비를 찾으라”는 내용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그런 친일재산을 챙겼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야스쿠니신사로 몰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는 수익만 챙겼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 60주년인 금년 2025년을 한일관계 도약의 해로 만들겠다며 벌써부터 벼르고 있다. 을사년인 금년은 한일협정 60주년인 동시에 을사늑약 120주년이다. 금년에 해야 할 일은 일본의 의도대로 한일관계를 확실히 묻어두는 게 아니라, 강제징용·위안부 문제 등의 해결과 더불어 야스쿠니 합사를 취소하도록 압박하는 일이다. 일제와 최팔근 등의 합작으로 이뤄진 한국인 야스쿠니 합사를 철회시키는 것은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에서 좀 더 확실하게 벗어나는 길이다.
<2025-02-02>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