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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대법 승소 ‘감격의 눈물’에도 전범기업 사과 못 받고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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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고인 빈소. 장헌권 목사 제공

지난달 27일 101살 나이로 별세
1943년 가마이시 제철소로 동원
2년 고된 노역에도 임금 못 받아
2005년 신일본제철 상대 소송 내
13년 만에 대법 승소 판결 받아내

“역사의 봄은 반드시 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전범 기업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건강 악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역의 한 요양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지난달 27일 101살 나이로 별세했다. 101년 전 태어난 그날 돌아가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해방’과 함께 애절하면서도 비통한 가운데 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필자와의 만남은 2018년부터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자문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고향이 전남 나주군 평동면 용동리 538번지인 고인은 외갓집에 살면서 나주 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7살에 졸업한 뒤 바로 서울 용산구의 한 상업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일제의 노동력 징발 수단이었던 ‘근로 보국대’에 동원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가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광고를 접하고 처음에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야마구치현 서부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일미광유회사 급사로 취직했다. 그러다 1943년 1월17일 일본 이와테현 도시인 가마이시의 제철소로 동원되었다. 거기서 1중대부터 6중대까지 10명에서 15명씩 조를 짜서 데리고 갔다. 군수물자를 만드는 제철소 일은 고됐다. 일본사람이 시키는 대로 철재를 나르다 넘어져 3개월 동안 입원도 못한 채 노역을 했다. 그때 다친 상처는 복부에 커다란 흉터로 남아 있었다. 1945년 1월9일 일본 고베 소재 일본군 8875부대에 배치되어 미군 포로 감시원 생활도 약 7개월 했다.

고인. 장헌권 목사 제공.

해방되던 1945년 많은 조선인이 귀국선을 타고 조선 땅으로 향했지만 고인은 가마이시로 발길을 돌렸다. 제철소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가마이시 제철소는 폭격으로 부서졌으며 제철소 직원도 없었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이춘식 할아버지는 억울하고 원통했다.먼저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들 여운택, 신천수가 1997년 12월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부터 패소했다. 일본 법원은 전범기업 편이었다.

2018년 9월 고인(앞 오른쪽 넷째)과 필자(앞 오른쪽 둘째) 등이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조속한 대법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헌권 목사 제공

2005년 2월28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낼 때 고인도 원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08년과 이듬해 열린 1심과 2심에서 패소했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은 원고승소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신일본제철에 강제 노동 배상책임이 있다며 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신일본제철은 파기환송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대법원의 최종 승소 판결이 나오기까지 무려 5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렇게 지연된 것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30일 할아버지께서는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목도리와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때 발걸음은 역사의 무게만큼 무겁기만 했다. 광주 송정역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 너무 오래 기다리고 기다린 날이었다.

법정에서 재판 시작 10여분 만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주문을 읽을 때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원고가) 나까지 넷인데 혼자 재판받은 게 너무 많이 아프고 눈물도 납니다. 그 사람들이 복이 없었는지 같이 재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야기하셨는데 먹먹하기만 했다. 고인과 여운택, 신천수, 김규수 할아버지 네분이 소송을 냈지만 하나, 둘, 친구들은 세상을 떠났다. 이춘식 할아버지는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도대체 뭐가 감사한지, 할아버지만 알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판결금 등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해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두 네 명은 수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이춘식 할아버지도 일제 강제 동원피해자 지원재단으로부터 배상금과 이자를 수령했다.

이춘식 할아버지께서 매서운 칼바람 부는 겨울에 사죄 한마디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역사의 봄은 반드시 온다.

장헌권/목사·강제동원 시민 모임 자문위원

<2025-02-09> 한겨레

☞기사원문: 대법 승소 ‘감격의 눈물’에도 전범기업 사과 못 받고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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