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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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 동안의 일로 인해 친일파로 규정되고 목숨까지 잃은 흔치 않은 사례가 있다. 헌병보조원 강병일의 이야기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일반 경찰력만으로는 한국 민중과 의병들을 억누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본 헌병대를 한국 치안에 투입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일본 제국의회의 반발을 샀다. 일본 인력과 일본 재정으로 대한제국 현지의 헌병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다시 생각해 낸 것은 대한제국 인력과 재정으로 한국인 ‘폭도'(특히 의병)를 진압하는 헌병보조원 제도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1908년 6월 11일 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을 공포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폭도의 진압”을 위한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일본헌병대에 위탁하는 법령이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헌병보조원 제도의 기원이다. 일본 돈이 아닌 한국 돈으로 한국을 억압한다는 제국주의다운 발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최일선에서 한국인들을 억압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헌병보조원이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은 이들에게 말 못 할 시달림을 당하고 이들 전체를 증오하면서도, 그 지위만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자로 단죄하지는 않는다.
정부수립 직후의 친일파들을 긴장시킨 1948년 9월 22일의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4조 제6호는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반민족행위자(반민자)로 규정했다. 일제 군인이나 경찰이었을 뿐 아니라 악질적인 행위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민족에 해를 끼쳤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친일 군인, 친일 경찰로 인정됐다. 헌병보조원도 마찬가지다.
2004년 3월 22일 제정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6호는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또는 군경의 헌병분대장 이상 또는 경찰 간부로서 주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의 감금·고문·학대 등 탄압에 앞장선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헌병대원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려면, 분대장 이상으로 승진해야 했고 이에 더해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탄압에 앞장섰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오장(伍長)급 이상 헌병으로 활동한 자”를 친일파로 인정한다. 하위직일지라도 간부급이 돼야 친일파에 포함시킨다. 이 사전의 부록인 ‘금단의 역사를 쓰다, 18년간의 대장정’에 따르면, 간부급이 아닌 헌병보조원이 사전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또는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체포하거나 이를 지휘한 자” 또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훈공 또는 포상을 받은 자 중에서 친일행위가 뚜렷한 자” 같은 별도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이런 법규나 기준에서 확인되듯이 단순히 헌병보조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반민법상의 반민족행위자, 위 특별법상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로 단죄되지는 않는다. 헌병보조원이 이런 단죄를 받으려면 세상이 잘 알 수 있도록 악독한 행위를 했어야 한다.
3.1 운동 악랄하게 진압… 사상자 53명
강병일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지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동시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다.
그는 정부수립 직후의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자로 규정되지는 않았다. 이는 반민특위가 그의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1919년 3·1운동 현장에서 죽임을 당해 그를 체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제정한 ‘헌병보조원 규정’에 따르면, 보조원 월급은 침식 제공 없이 7원에서 16원이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알면 1원에서 5원의 특별수당이 지급됐다.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가 1915년부터 제과점에서 받은 월급은 식사 제공에 7~8원이다. 헌병보조원에 대한 대우가 그리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 강병일 편은 평남 강서군이 본적인 그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2년 전인 1892년에 태어났으며, 1916년 4월 1일 평양헌병대 안주헌병대의 헌병보조원이 됐다고 알려준다. 그가 사망한 날은 1919년 3월 4일이다. 봉급이 많지는 않지만 약 3년간 친일 월급을 받으면서 한국인 억압을 최일선에서 수행했던 것이다.
강병일이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친일파로 규정된 것은 친일재산을 축적한 그 3년간의 행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단죄를 받은 결정적 사유는 1919년 3월 4일 하루 동안의 일이다. 3년간 헌병보조원으로 부역한 그는 그날 하루의 일로 인해 ‘악독한 헌병보조원’으로 세상에 각인됐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강병일 편은 그날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양헌병분대 사천주재소에 근무하던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시장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주재소장 사토 상등병의 지휘 아래 출동하여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13명을 사망케 하고 4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강병일은 단 하루 동안에 최소 53명을 사상자로 만들었다. 국가보훈부가 1987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3권 조진탁 편에 따르면, 그날의 시위 군중은 약 3000명이었다. 그중 최소 53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훈부는 조진탁 열사의 공적 개요를 제시하는 글에서 “(시위대의) 행진이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에 가던 중 사천헌병주재소에서 주재소장 좌등 상등병과 보조원 강병일, 동(同) 박애섭, 동 김성규 등이 발포하여 희생자가 생기었다”고 설명한다.
조진탁 열사도 누구의 발포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날 현장에서 총상을 입었다. 그런 몸으로 평안도 순천과 강원도 원산·통천·강릉 등지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1921년 원산역에서 평양경찰서 나카무라 형사에게 체포되고 1922년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평양헌병분대 사천주재소에 근무하던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시장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주재소장 사토 상등병의 지휘 아래 출동하여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13명을 사망케 하고 4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강병일은 단 하루 동안에 최소 53명을 사상자로 만들었다. 국가보훈부가 1987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3권 조진탁 편에 따르면, 그날의 시위 군중은 약 3000명이었다. 그중 최소 53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훈부는 조진탁 열사의 공적 개요를 제시하는 글에서 “(시위대의) 행진이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에 가던 중 사천헌병주재소에서 주재소장 좌등 상등병과 보조원 강병일, 동(同) 박애섭, 동 김성규 등이 발포하여 희생자가 생기었다”고 설명한다.
조진탁 열사도 누구의 발포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날 현장에서 총상을 입었다. 그런 몸으로 평안도 순천과 강원도 원산·통천·강릉 등지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1921년 원산역에서 평양경찰서 나카무라 형사에게 체포되고 1922년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죽은 뒤 일제로부터 훈장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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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4일의 악랄한 진압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친일파의 요건을 충족한 강병일은 바로 그날 목숨을 잃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독립신문> 및 <동아일보> 등을 근거로 강병일이 김성규·박요섭 및 사토와 함께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현장에서 죽었다고 알려준다.
일본은 강병일에게 욱일훈장을 추서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시위민중 다수를 살상하고 시위대에 의해 사망한 것이 공적으로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1919년 9월 11일 훈8등 욱일장을 받음”이라고 기술한다. 일본 정부의 확인 작업이 있었기에 53명 이상을 살상한 사실이 분명해진 듯하다.
그날 강병일의 진압은 한국인이 아닌 제3국인의 눈으로 볼 때도 비인간적 만행이다. 그런 강병일에게 일본제국은 욱일장을 추서했다. 지금의 일본 정부는 그 같은 훈장 추서가 잘못됐다는 반성 위에 서 있지 않다. 과거의 한국 지배가 문제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금 이시바 시게루 내각은 박정희 정권을 굴복시킨 한일협정 60주년인 금년 내에 한일관계의 또 다른 성과를 얻고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을사늑약 120주년인 금년에 일본 정부가 강병일 같은 인물에 대한 훈장 추서가 잘못됐음을 인정하도록, 일제의 반인류 범죄를 계속 비판하는 일이다.
김종성 기자
<2025-02-0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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