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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친일했어도 그림만 잘 그리면 되나’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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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 평전] 운보 김기창 기념관 논란과 역사정의실천협의회 활동

[편집자말]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1993년 봄 충북 청주에서는 ‘친일 화가 논쟁’이 거세게 불었다. 청원군 북일면(현재의 청주시 내수읍) 형동리 산 30번지 일대에 김기창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화가 김기창은 북일면 형동리 산 30번지 일대 임야 2만2000평에 청원군의 행정지원과 본인 부담 6억 원을 들여 기념관 및 위락 시설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천재 화가 그리고 친일 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 사진은 툇마루에 앉아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운보 화백. 1984.5.22 ⓒ 연합뉴스

이에 신경득(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친일 화가 김기창이 기념관을 짓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

김기창은 어떤 인물인가? 1913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1920년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는 이때 장티푸스에 걸려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돼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37년 제16회 선전에 <고담>을 출품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이듬해에 <하일(日)>로 총독상을 수상했으며 제18회와 제19회 선전에서 연이어 특선을 수상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1946년 우향 박래현과 결혼 후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을 시작으로 부부 작가로 전시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자유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지냈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시작으로 화단과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1989년 예술원 정회원이 됐다. 장애를 극복한 천재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데 그의 명성 이면에는 친일 화가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김기창의 친일 행위는 1942년부터 1944년 사이로 집중됐다. 이 기간에 김기창은 총독부 전시 문예 정책에 부역했다.

즉 1943년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서는 학도병 자원을 부추기고, 1944년 완전군장의 <총후병사>에서는 결전 의지를 고취하는가 하면, <모임>에서는 후방의 전시지원을 선동했다(정연승,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의 활동과 성과 보고서, 2009).

‘역사 정의 훼손, 친일’ vs. ‘상황에 따라 작품활동, 친일 아냐’

김기창 기념관 건립은 역사 정의를 훼손시킨다는 인식에 따라 지역의 인사들이 모였다. 1993년 6월 5일 청주시 북문로 조선면옥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 발기 준비모임을 가졌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와 허창두(삼항교회 목사), 신경득(경상대 교수), 지용주, 김창규, 윤만용, 정연승, 신동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는 김기창 기념관 건립반대와 더불어 향후 사업으로 정춘수 동상 철거와 단재 신채호 동상 건립 문제도 논의됐다.

1993년 7월 13일, 문화공간 ‘너름새’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정의실천협의회(아래 역실협)’를 발족했다. 이날 같은 장소에서 공청회가 열렸는데, 역실협 측과 김기창 측의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역사정의실천협의회역사정의실천협의회 주요 대표자. 좌측부터 정진동 신경득 허창두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역실협에서는 충북지역 역사 왜곡과 예술계 친일의 실상, 김기창의 친일 행각, 기념관 건립에 따른 충청북도와 청주시 태도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김기창 측에서는 그의 아들 김완이 나와 당시의 상황론을 들어 친일 문제를 희석시키려고 했지만,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이태호(전남대 교수)이 자료화면으로 김기창의 친일 그림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김완 측은 동원했던 청각장애인들을 이끌고 중도에 퇴장했다.

이후 언론매체를 통한 공방은 지속됐다. 역실협에서는 일제강점기 말 김기창의 미술을 통한 친일 행위를 주장했고, 김기창 측은 상황론에 따라 김기창이 확고한 사상에 따라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싸움의 불씨가 엉뚱하게 튀었다. 김기창 측이 역실협의 주장이 장애인 비하라고 한 것. 김기창은 청각장애인으로 살면서 청각장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렇기에 청각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들에게 꿈을 주는 입지전적인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좌절된 사죄, 좌절된 기념관

역실협 대표 신경득 교수는 김기창이 장애를 극복한 천재적인 화가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일했어도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역실협에서는 김기창이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면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김기창 측은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역실협은 언론 기고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중부매일> <충청일보> <대전일보> 등 지역신문과 <한겨레신문>에 기고를 했다. <조선일보>와 지역의 D일보에서는 김기창의 생애 중 장애를 극복한 천재 화가라는 점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 시기에 ‘역실협’의 김기창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은 친일 잔재 청산의 전국적인 핫이슈로 등장했다. 대부분 언론에서 다뤘으며 미술계에도 친일 화가 논쟁이 벌어졌다.

‘역실협’은 한편으로는 언론 기고와 행정기관에 대한 서면 질의를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기창 기념관 건립 저지를 위한 1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93년 8월 7일부터 9월 1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청주우체국 앞에서 시민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역실협’은 1만인 서명지와 건의서를 관계 부처에 발송했다.

1993년 7월 5일 김기창 측이 동원한 한국농아복지회 소속의 청각장애인 100여 명이 청주 상당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역실협’ 준비위원장 신경득 교수의 사창동 자택 대문에 온갖 욕설이 담긴 벽보를 부착했다.

사실 당시 김기창은 역사적 사죄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신경득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기창이 자신의 화집에 사죄문을 수록하려고 했다. 그런데 K시인이 만류해 좌절됐다”고 한다. K시인은 “선생님이 사죄하면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야 한다”라며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김기창이 자신의 친일 행위를 사죄했으면 김기창 기념관은 정상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보다도 친일 행위에 대한 당사자의 사죄가 사회적 문화로 정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김기창 기념관은 좌절됐다.

목에 일장기 걸린 동상의 최후

▲쓰러진 동상쓰러진 정춘수 동상. ⓒ 충북인뉴스관

1996년 2월 8일 오후 2시 청주 3.1공원에는 청주시청 공무원 600여 명과 시민·대학생 200여 명이 모였다.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상임의장 정진동) 주관으로 정춘수 동상 철거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2월 8일은 1919년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기념일을 상징하는 날이었다.

정춘수 동상의 목에 일장기가 걸렸다. 이어서 목에 밧줄이 걸렸다. 사회자 신동명이 “정춘수 동상 철거를 진행하겠습니다. 하나둘 셋 하면 밧줄을 잡아당겨 주세요”라면서 셋을 외친 순간 밧줄이 당겨졌다. 동상의 목이 떨어졌다. 뒤늦었지만 친일 잔재 청산이 시민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정춘수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러한 불명예(?)를 당했을까? 청원군 강내면 출신의 정춘수(1873~1953)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 조선 청년들을 일본 군대로 내모는 연설과 언론 기고를 앞장서서 했다.

<동양지광> 1942년 1월호에 ‘응징의 이유 세 가지’라는 글을 실어 영국과 미국은 “그리스도 정신을 모독하고 있고, 우리 제국(日本)을 모독하고 있으며, 인도상(上) 전 인류의 적이기 때문에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2년 2월 감리교 각 교구장에게 ‘황군 위문 및 철물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과 철책은 물론 교회 종도 헌납하여 성전 완수에 협력한 것을 요구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보안부대 수사관도 끄덕인 친일파

1996년 2월 8일 3·1공원에서의 동상 철거 운동은 원래 1995년 3월 1일 정춘수 동상 목에 일장기를 걸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공청회를 진행하고 충청북도와 청주시에 동상 철거를 요구했다. 청주시는 충청북도 철거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했다.

결국 충북도지사가 철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피력했지만 철거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1996년 2월 8일 3.1 공원에서의 철거식 때 청주시와 충청북도에 다시 한번 철거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행사가 시작되면서 동상 철거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동상에 걸린 밧줄을 잡아당기는 순간 동상 목이 쉽게 떨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연대회의 지도부와 철거식을 주도한 단체 간의 불화로 이어졌다.

철거 후 청주시는 정진동과 박영호(연대회의 집행위원장), 신동명(충북사회발전연구원 부소장), 신영교·박완희·박선규·박형백 학생을 공익건조물 손괴 혐의로 고소했다. 정진동을 포함한 피고소인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95년도에 충북대 총학생회장을 한 박완희는 1996년 정춘수 동상 철거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충북총련(충북지역총학생회연합)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수배를 받게 됐다. 거기에 정춘수 동상 철거 문제로 공공기물 파손죄가 추가됐다. 총 6개 항목의 혐의를 받고 수배됐다. 1996년 10월 검거된 그는 국군기무사령부(현재의 국군방첩사령부)로 연행됐다.

“정춘수 동상 철거는 왜 했냐?”는 질문에 박완희는 정춘수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한참 듣던 수사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친일파 맞구만!” 더 이상 정춘수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보안부대 수사관도 정춘수가 친일파이고, 동상 철거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시민 성금으로 역사 정의 세워

▲친일파 관련 기사. ⓒ 한겨레신문

‘역실협’은 신채호 동상 건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친일 잔재 청산과 더불어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취지였다. 1995년 5월 13일 충북대학교에서 200여 명이 모여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추진위원회에서는 1만인 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즉 시민 1만 명에게 1만 원씩을 모금해 동상을 건립한다는 계획이었다. 기금 모금에는 전국의 수많은 시민이 동참했다. 특히 청주에서는 가족 단위로 참여한 시민도 많았다. 8개월 만에 8148명이 참여해 9750만1750원이 모금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견 차이가 노정됐다.

순수하게 시민들의 성금으로만 하자는 측과 충청북도와 청주시의 기부를 받자는 측의 의견 충돌이었다. 정진동과 역실협 측은 추진위원에 반역사적인 인물이 포함됐음을 지적하고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시민들의 성금과 지자체의 후원으로 1997년 2월 21일 청주예술의 전당 광장에 신채호 동상이 세워졌다. 정진동은 ‘역실협’ 제5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역실협 실무공간은 청주산선이었다.

▲신채호청주예술의 전당에 건립된 단재 신채호 동상. ⓒ 박만순

박만순 기자

<2025-02-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했어도 그림만 잘 그리면 되나’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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