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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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19]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2)

이명숙 연구실장

광저우(廣州)에서 항전을 모색하던 광복진선의 ‘한국청년’들은 광저우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직전 탈출해 1938년 연말, 두 달여 만에 류저우(柳州)에 도착했다. 전장으로 가길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류저우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 젊은이들은 일을 해야겠다고 서둘렀다. 그때 일이란 일본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총 들고 일선에 나가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후방에서라도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항전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우선 이런 일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지복영, 『민들레의 비상』, 198쪽)

류저우는 전장과는 상당히 떨어진 후방이었다. 이곳 중국인들은 전장의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황을 알리고 항전의식을 일깨우려는 항전집회가 유후공원(柳候公園)에서 수시로 열렸다. ‘한국청년’도 이곳에서 중국 청년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전시(戰時)의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 무엇일지 또 중국인들에게 한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지를 고민하며 행동에 나선 것이다.

청년공작대와 전지공작대의 조직과 연계

‘한국청년’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39년 2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이하 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 자신들의 정치노선과 행동강령을 검토·논의하는 자리에서 우선 ‘각 당의 청년동지들이 일치결속하여 어떠한 난관이라도 돌파시켜가면서 가장 광명정대하고도 명확한 노선으로 용왕매진하기를 결심’한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결성했으며, 이어 ‘이후의 청년운동은 전부 청년공작대로 집중시킬 뿐만 아니라 단일당 촉성과 통일조직의 완성을 위해서도 적극 분투하기로 결정’했다. 남목청(楠木廳) 사건 발발 등 3당 통합 논의가 무산되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한국청년’의 통일된 모습을 청년공작대를 통해 보이고자 한 것이다.

류저우에서 몇 개월간의 청년공작대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인을 대표한 선전예술 활동이었다. 얼마 후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할 때, 이들이 체감한 선전예술활동의 상당한 성과는 그들이 “장차 나라 찾는 일을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서, 아울러 교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서”라는 목표를 더욱 명확히 하는 자신감과 희망이 되었다. 곧 피난을 위한 이동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1939년 5월경 충칭 인근의 치장(綦江)에 도착한 청년공작대는 부대장 김동수(金東洙) 등 약 18명이 ‘관음암(觀音庵)’이란 곳에서 별도로 합숙하면서 다음 행보를 준비했다. 이 시기 치장에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들이 모두 집결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김구, 김원봉이 같은 5월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공동으로 발표해 전민족적 역량을 집중한 통일조직 건설을 당면의 요구로 천명해 그 기운을 높인 상태에서, 8월 좌우 7개 정당·단체 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통일방안과 최고기구 등의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이를 목도한 청년공작대는 자체적인 활동 방안을 마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의 ‘통일대오’가 형성되기 전이라도 대일항전에 참전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이때 과거 아나키스트였던 청년공작대원 이하유(李何有)를 연결고리로, 당시 중국군에 있던 나월환(羅月煥)과도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뒤이어 박기성(朴基成)을 만나 “우리끼리 우리나라 일을 해보도록 하자”라며 끈질기게 설득해 동참시킨 후, 김구의 장남 김인(金仁)과 이하유가 나서서 새로운 조직 결성과 전장 이동에 따른 지원, 중국군의 공식 협조 등을 받기 위해 김구를 설득해 승인을 받아냈다. 청년공작대의 준비 움직임 속에서 이들이 궁극적으로 목표한 것이 후방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치장 도착 5개월여 만인 1939년 10월, 청년공작대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이하 전지공작대)로 새로이 조직되었다. 대장 나월환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아나키스트 출신이었지만, 부대장 김동수를 비롯한 대원 대부분은 청년공작대원들이었다. 전지공작대는 11월 11일 충칭에서 창립식을 거행한 후 화북(華北) 공작을 목표로 시안(西安)으로 향했다. 한편 청년공작대 대장 고운기를 비롯한 일부 대원들은 임시정부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의 일원이 되어 시안으로 파견되었는데, 전지공작대와 이동을 함께한 것으로 보인다. 1년여 뒤인 1940년 11월 11일 ‘전지공작대 성립 1주년 기념촬영’에도 군사특파단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기존 전지공작대의 활동을 아나키즘적 성격을 주요하게 보았던 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청년공작대로부터 이어진 인적 연계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와의 연계성에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년공작대의 류저우 공연활동

청년공작대의 구성원들 대부분은 임시정부나 각 당 주요 인사들의 가족인 독립운동가 2세였고, 10대부터 30대까지를 아우르는 가운데 20대가 주축이었다. 조직 결성 전부터 항일 벽보와 전단, 대폭(大幅)만화 등의 선전활동으로 류저우 주민들에게 큰 관심과 신뢰를 얻었던 청년공작대는 한국을 대표해 공연활동을 펼쳤다. 1939년 3월 1일 용성중학(龍城中學) 강당에서 열린 ‘3·1절 제20주년 기념공연(이하 기념공연)’과 3월 4일 오후 7시와 3월 5일 오후 1시 곡원(曲園)극장 무대에서 진행된 ‘중국 부상병 위문 모금공연(이하 모금공연)’이 그것이다. 모금공연은 청년공작대와 류저우의 당·정·군 기관 및 각종 예술단체, 항적후원회(抗敵後援會)가 함께 회의를 진행하며 준비했고, 예행연습 차원에서 기념공연이 앞서 진행되었다. 청년공작대를 주축으로 광복진선의 여러 인사들이 참여해 진행한 모금공연에는 중국 측에서도 참가했다. 공연 형식면에서도 한중연대의 모양 새를 갖추고 있다.

『柳州日報』 1939년 3월 3∼5일, 8일자에서 청년공작대의 모금공연과 내용, 후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모금공연에서는 청년공작대 합창조가 「애국가」, 「船夫之歌(사공의 노래)」, 「加愛的江南(그리운 강남)」, 「청년행진곡」, 「구국행진곡」, 「구국군가」, 「신중국」 등을 불렀고, 아동부가 「慰勞傷兵歌(부상병 위로의 노래)」 외에 율동(곡 「반달」)과 무용을, 연극조가 「국경의 밤」, 「부상병의 친구」를 상연했다. 또 「장미화」, 「FRA DIAVOLO(디아볼로)」, 「유랑자」 독창이 있었고, 마술, 바이올린 합주 등도 공연되었다.

청년공작대원 이국영의 필사 가사집인 『망향성』의 수록곡으로 공연곡을 살펴보면, 「장미화」는 (1)편에서 소개한 “깊은데 숨은 장미화”로 시작하는 프랑스 구노의 작품이다. 관객들 반응이 가장 좋았던 아동부의 율동곡은 「반달」(윤극영 작사·작곡)인데, 첫 가사인 「푸른하날」로 수록되어 있다. 「청년행진곡」의 가사는 “백두산이 높이솟아 길이지키고 東海물과 황해수 둘러있는곳 ∼ 우리들은 삼천만의 대중앞에서 힘차게 걷고있는 先鋒隊이다”이다. 말미의 가사 ‘선봉대’로 인해 곡명도 「선봉대」, 「선봉대가」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던 이두산(李斗山)이 1938년경 작사·작곡한 후 조선의용대에서 널리 불리다가 중국인들 사이에도 크게 유행했다. 이를 광복진선 측에서도 즐겨 부른 것이어서 독립운동세력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속에서도 음악적 교류는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요 「可愛的江南」은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로 시작하는 「그리운 강남」(김석송金石松 작사, 안기영安基永 작곡)을 중국어로 번역한 제목으로 보인다. 이 곡은 국내에서 크게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곡 자체가 전통 선율을 활용해 민족적 정서가 짙게 배어있어 1929년 발표 이래로 해외 동포사회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특히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부분에서 민요 「아리랑」 구절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민요’라 별기한 것으로 보인다.

모금공연에는 음악 외에 두 편의 연극이 상연되었는데, 모두 청년공작대원 송면수(宋冕秀)가 극본과 연출을 담당했다. 항전극 「국경의 밤」과 「부상병의 친구」가 그것인데, 앞서 중국 가두극의 짧지만 효과적인 선전 방식을 체감한 뒤 주제의식을 명확히 한 단막극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국경의 밤」은 만주 국경지대의 눈 내리는 밤, 일본군에 붙잡힌 한국 의용군을 구하려던 다른 한국 의용군이 총상을 입자 중국 의용군까지 합세해 한중연합군의 이름으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을 무찌르고 한중연합군 깃발을 날린다는 것이어서 한중연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전지공작대의 항일가극 아리랑

「국경의 밤」은 전지공작대도 무대에 올리는 주요 연극의 하나였다. 이외 중국 가두극인 「삼강호(三江好)」 등도 자신들의 공연으로 흡수해 상연했는데, 무엇보다 중국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나아가 한중연대의식을 고양해 ‘한국청년’이 항일항쟁의 한 주체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시안에 도착한 후 중국군 제34집단군 호종남(胡宗南) 부대의 원조를 받아 시안 이부가(二府街)의 구 법원 청사 건물에 본부를 두고, 우선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中央戰時幹部訓練團 第4團, 약칭 간사단)에서 3개월간 훈련을 받은 후 중국군 소위 계급을 받고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간사단의 음악교관이 바로 한형석(韓亨錫, 한유한韓悠韓)이었다. 전지공작대장 나월환은 그에게 전지공작대 합류를 적극 권유해 1939년 12월 예술조장으로 합류했다.

전지공작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초모(招募)활동이었는데, 1940년 초반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로 파견된 것이 처음이었다. 첫 임무에서 젊은 대원 40∼50명을 초모하는 성과를 거뒀고, 이어 한인 청년의 초모 인원이 계속 늘어나자 간사단 내에 한국청년훈련반(약칭 한청반)을 별도로 설치할 정도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모든 전지공작대원이 곧바로 초모활동이나 전투에 투입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안 본부에 잔류하는 대원의 수가 상당했다. 이들은 “지금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기에 골몰하여,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공연을 통해 성금을 모금하여 전방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사들의 하복을 마련하기로 하였다.”(『한국청년』 제1기, 1940.7.15) 중국 측에 한중연대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이를 통해 당시 임시정부와 ‘한국청년’의 숙원이던 한국광복군 창설을 이뤄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지공작대의 『아리랑』이 기획되었다. 총연출은 중국군 및 중국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한 한형석이 맡아 약 4개월여의 편극 준비를 마치고 2개월여의 공연 연습을 진행해 무대에 올렸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전지공작대원 외에 중국 문화예술계 인사들이었다. 1940년 5월 21일부터 10일간 시안의 남원문(南院門) 실험극장(實驗劇場)에서 진행된 공연 전체 명칭이 『아리랑』이며, 연극 「국경의 밤」·「한국의 한 용사」와 가극 「아리랑」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처음 극화된 「한국의 한 용사」는 일본군을 탈출해 전지공작대원이 된 박동운(朴東雲)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특히 항일가극 「아리랑」은 노래와 춤이 어우러져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을 선보여 “‘위대’하다는 평을 듣기에 충분한 가극”, “연극이면서 또한 모든 항전예술선전의 영혼”이라는 소감이 나올 정도로 공연예술 자체로도 크게 인정받았다.

항일가극 「아리랑」의 주인공까지 자신이 맡아 활약한 한형석은 주요 곡들도 직접 창작해 가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도입뿐만 아니라 항일노래 자체로도 기존 곡의 전승 또는 ‘가사 바꿔 부르기’를 탈피해 완전히 새로운 항일노래를 창작해냈다.

『망향성』에 수록된 곡들로 위 곡들을 살펴보면, 우선 한국 민간가곡 「봄이 왔네」는 「봄이 와」로 실려 있는 1930년대 신민요 「처녀총각」이다. 「고향생각」은 당시의 대중가요로 유명했던 「타향살이」와 「눈물진 두만강」을 엮어서 만들었다. 1917년부터 중국에서 아버지 한흥교(韓興敎)의 독립운동을 돕고 베이징에서 수학한 뒤 상하이에서 조성환(曺成煥)을 만나 예술구국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중국에서 꾸준히 활동한 한형석임에도 국내에서 크게 유행한 대중가요를 섭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 「한국강산삼천리 승기가」는 일명 「승기가」로 불리는 「국기가」로 작사자가 이범석(李範錫)이며, 이후 한형석이 편찬을 주관한 『광복군가집』에 수록되어 대표적인 광복군가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상 두 공작대의 공연에서 활용된 음악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주요 관객인 중국군·민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유명 서양 가곡이나 항전가요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는 민요와 가곡 등을 적절히 포함시켜 무대를 꾸몄음을 알 수 있다. 「그리운 강남」, 「반달」, 「선봉대(청년행진곡)」, 「국기가(승기가)」 등은 항일노래로서 현재에까지 잘 알려진 곡들이다.

글을 마치며

광복진선 시기부터 한국광복군 창설을 준비하던 1937년∼1940년 시기의 ‘한국청년’은 시시각각 변하던 전세와 상황에 대응해 차례로 청년공작대와 전지공작대를 자발적으로 조직했으며, 독립전쟁 참전을 목표로 내적으로는 통일대오 수립과 외적으로는 중국과의 한중연대 실현을 위해 실천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두 공작대를 이어 지속한 항일 선전예술 활동과 초모 활동의 성과는 중국군·민뿐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세력에도 ‘한국청년’의 내재된 역량을 증명해 보인 것이었다. 다만 개별 명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두 공작대 모두 한국광복군의 창설 배경 또는 전사로 주목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한국청년’의 등장은 새로운 2세대 독립운동가의 출현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성공적 활동은 임시정부와 함께 이동했던 가족부대에게도 큰 활력이 되었을 것이고, 임시정부 간부 등 1세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자료]
이국영 편, 『망향성』(필사본)
지복영, 『민들레의 비상』, 민족문제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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