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김학규 장군의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백파 김학규 장군이 집필한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獨立運動實話) 파데강반(江畔)』이다. 한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김학규 장군이 이러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점이 놀랍기도 한데,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등 각종 인명사전에 김장군이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을 집필했다는 내용이 전혀 기술되지 않은 점이 더 한층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김학규 장군에 대한 심층적인 학술 연구가 미흡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백파 김학규(1900~1967)는 평안남도 숙천 태생이다. 1919년 겨울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견습사관으로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서 활동했다. 1920년 경신참변 후 중국 고급학교에서 6년간 수학한 후 동명중학교 교원 및 교장을 지냈다. 1931년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 1935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1937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중국지역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대리, 광복군 제2지대장 겸임, 산동지역 광복군 초모위원장, 1945년 4월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도 한국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 부처장으로 만주지역 조선동포의 귀환을 위해 힘썼다.
1948년 4월 귀국하여 김구 휘하의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했다. 1949년 6월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26일 김구 선생 피살 사건시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 소개시켰다는 이유로 김구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작 살인범인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이듬해 풀려나 육군 소위로 복직했으나, 김학규 장군은 1960년 4·19 직후 허정 정부에서의 석방 때까지 12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아내 오광심 여사(1910~1976)도 광복군으로 활약한 공로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은 『호남신문』에 1949년 3월 22일부터 연재가 시작되어 6월 7일까지 총 65차례 게재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의 『호남신문』이 전부 남아 있지 않아 현재 36회 연재분만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집필자인 김학규 장군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평안남도 숙천 출신의 ‘차대장’이다. 이른 시기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장교로 활동하기 시작해 1930년경 조선혁명군의 중견 간부로서 대일항전에 나서는 인물이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는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이라는 점과 1930년대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의 활동을 파악하게 해주는 역사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발굴에 발맞추어 백파 김학규 장군에 대한 학술 연구와 대중적인 관심이 더욱 높아지길 기대해본다. 끝으로 이 소설의 소제목을 부기해 소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 엮은이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목차
만주와 파데강/밤길 걷는 나그네들/싸전사거리의 혁명군 총소리/싸류허 바닥에 쓰러진 무두군장 김창선/장영감댁 아랫목/왜적과 주구놈들/차대장의 혈서/만주땅 개척과 신흥학교/신출귀몰하는 독립군의 유격전/재생의 독립군들/하늘이 미워하는 일본주구 황규청 총살/김달성 부인의 순절/양하산 선생과 작별/혁명군 부대
「편집자의 말」 (『호남신문』 1949.3.17)
일제 지배하의 36년간 우리 독립운동의 청사(靑史)는 수많은 우국열사의 피로써 물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이 선열의 피로써 얻은 것이요, 끊임없는 항쟁으로써 획득한 승리일 것입니다. 이 피의 기록, 투쟁의 역사야말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이요, 유구 5천년 맥맥히 흐르는 기백(氣魄)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배우지 않으면 안될 참다운 정신은 정열을 쏟아 주먹을 쥐어야 할 기백. 그것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 있는가. 미국에도 소련에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선조가 만들어놓은 그 역사를 배움으로써 찾을 수 있을 것이요, 그 정신 그 기백을 향상 발전시킴으로써 나라의 융성과 민족의 흥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본지가 김학규(金學奎) 선생의 귀중한 옥고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을 연재하게 된 것도 그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선생이 일생을 해외에서 분노와 항거 가운데 만고풍상(萬古風霜)과 싸우면서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흉악한 왜놈과 싸우다 마침내 해방을 맞아 귀국한 선생은 특별히 본지를 애호하신 마음으로 만주 벌판에 있어서의 우리 독립군 혈투의 실지를 써주셨습니다. 독자 제현은 많은 기대를 가지시기 바라는 동시에 김학규 선생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만주와 파데강(1)
만주땅은 우리 배달겨레의 피묻은 역사의 땅이다. 아득한 옛날을 두고 보더라도 우리 옛나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살고 이 땅에서 말을 달렸다. 지금도 이 땅에는 우리 겨레가 수백만이 살고있고 앞날에도 살고있을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빼앗으매 허다한 애국지사와 혁명가들이 그들의 정든 옛 땅을 등지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거친 이 땅 만주를 근거로 우리 원수 왜적과 피로써 싸웠다. 이 반세기의 빛나는 피의 역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찬란한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만주는 어느 모로 보든지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뗄 수 없는 곳이다. 파데강은 남만주 서간도 산골짜기로 흐르는 한 개의 조그마한 시내이다. 그리 크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리 이름난 강도 못 된다.
그러나 이 강이 백두산 줄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여 우리 국경선인 압록강에 들어왔다는 것과 이 강을 중심으로 우리 선조가 발상했고 우리 선열들의 피가 많이 흘렀다는 데서 그 의미가 자못 심장한 것이다.
파데강은 백두산 서록(西麓)으로부터 흐르기 시작하여 번화한 통화(通化)를 감돌아 집안현경(輯安縣境)을 거쳐서 삼각지대인 환인(桓仁)을 싸고돌아 환인의 동남 문호인 사진자(沙鎭子)를 지나 관전현경(寬甸縣境)으로 해서 리차거우, 외차거우의 작고 큰 물들을 합쳐 우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백두산 서록에서 압록강까지 멀고 먼 천리 길이다. 바위틈과 산모퉁이를 뚫고 돌아 좁은 산골짜기와 넓은 뜰을 거쳐 양의 창자와도 같이 오불꼬불 흘러내려 통화까지 와서는 제법 큰 내를 이루었다. 만주의 우기(雨期)가 되면 장맛물이 합하여 큰 강을 이룬다. 백두산 장백산 울창한 나무 뗏목도 이 우기를 타서 이 수면을 덮어 안동(安東)으로 신의주로 내려 밀린다. 파데강물은 언제든지 맑고 새파랗다. 달 밝은 가을밤 물소리 구슬프고 우거진 숲 사이 우짖는 새소리 파데의 풍경을 노래하고 북국에 봄이 오면 이름 모를 꽃들이 울긋불긋 피어 파데의 긴 언덕을 수놓는다.
‘파데강’이란 어느 족속의 말인지 그 언근(言根)조차 알 수 없다. 파시(婆是)와 파저(把猪)라고 한자로 되어있고 중국사람들은 혼강(渾江)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파데강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평안북도 사투리로 불려지는 듯 싶다.
그런데 이 강언덕에는 우리의 옛 자취가 너무도 많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덕비가 이 강 언덕 패왕조(霸王朝)라는 곳에 우뚝 서있어 사학자들의 붓머리에 오르내리고 있고, 우리 선조들이 진 치고 말 달려 싸움하던 옛 산성이 이 강을 에워싼 산봉우리에 군데군데 쌓여있으니 이를 가리켜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부른다. 이 골목 저 골목 이 산모퉁이 저 산모퉁이에 우리 선조가 묻힌 석묘 곧 고려묘(高麗墓)들이 우리의 옛 자취로 남아있다.
백두산 위에 달이 밝고 압록강에 궂은 비 내릴 때 파데강 물소리는 더욱 목이 메어 옛날의 구슬픈 회포를 자아낼 뿐이다. 이것이 우리 선조 선열의 영(靈)의 애끓는 목소리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구태여 안타까운 아득한 옛날의 역사를 추억하려 하지 않는다. 빈터에 방초가 우거지고 옛 강산에 두견이 슬피 울 뿐이니 차마 더 말하여 무엇하랴!!(『호남신문』 1949.3.22)
만주땅 개척과 신흥학교(1)
당시 만주땅 서간도에는 우리 차대장 같이 젊은 애국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보통 민중도 매일같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이들의 가슴에는 망국노(亡國奴)가 되기 싫고 자유민이 되어 보겠다는 꼭 같은 심장이 약동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진시황을 (내리칠) 박랑사 장량(博浪沙 張良)의 철퇴가 번쩍였다. 그들의 입에서는 “북풍기혜 역수한 장부일거혜 불부환(北風起兮 易水寒 丈夫一去兮 不復還)”이란 형가(荊軻)의 역수가(易水歌)가 읊어졌을 뿐이다.
그때 만주는 청나라 만주족의 발상지로서 만주족속은 중원에 한족 명나라를 정복하고 자기 발상지인 만주땅을 비어두고 온통 산해관(山海關) 안으로 들어가 벼슬살이에 취하여 만주는 인적이 없는 삼림 황무지로 변하고 인연(人煙)이 드물었다. 그것은 토지가 비옥하고 인품이 순후할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고 또 전략적으로 보아 과연 용무(勇武)할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때마침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해외의 독립운동기지를 찾던 터라 국내의 운동단체로서 가장 힘있는 신민회(新民會)로부터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鎭洙)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동만과 서간도를 답사케 한바 이동녕 등은 서간도에 와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자리를 잡고 서울에 있는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3형제와 여준(呂準) 양규열(梁奎烈) 이장녕(李章寧) 윤기섭(尹基燮) 김창환(金昌煥) 등과 정주의 이탁(李鐸), 삼남의 이석룡(李石龍—이상룡李相龍의 오기) 등이 만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만주가 너무 황무지요 인연이 희소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다. 만주에서 일하려면 반드시 국내에 있는 민중을 많이 끌어들여 민중의 토대를 닦아놓아야 하게 되었다.
정치 안광(眼光)이 원대한 그들은 우선 국내로부터 민중을 끌어내 가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반도강산에 갇혀 있는 민중은 그때 쇄국정치에 눈이 은폐되어 조선 천하만을 천하로 알고 조선 밖에는 또 다른 천하가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향토관념이 강한 조선사람은 쓸쓸한 만주땅으로 갈 생각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이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치에 총명한 그들은 자기네 이민정책을 실현하는 데는 먼저 선전이 필요하다 하여 만주가 어떻게 좋고 어떻게 살 수 있다는 대대적 선전을 했다.
“만주에는 주인 없는 땅이 많다. 옥야천리(沃野千里)의 쑥대밭이 사람의 안계(眼界)가 모자라리만치 넓게 펼쳐져 있는데 누구나 가서 내 땅이라고 금을 긋고 말뚝만 박아놓으면 내 땅이 된다. 그 쑥대를 베고 그곳에 콩을 심으면 콩이 큰 나무와 같이 자라 그 콩깍대기로 지팡이를 해 짚는다. 강냉이(옥수수)를 심으면 강냉이 이삭이 너무 커서 지게다리에 걸쳐 놓인다. 조는 심으면 조 이삭이 사람의 허리에 띄고도 남아서 코를 내어 맨다. 돼지를 치면 한집 식구가 1년 먹고도 남는다. 나무를 찍어 넘기면 그 찍은 나무그루에 10여 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한 사람이 벌면 열 식구 스무 식구가 먹고도 남는다. 누구나 만주만 가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호남신문』 1949.4.23)
만주땅 개척과 신흥학교(3)
이것이 필담의 요지였다. 그들이 이 필담을 듣고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추병진(鄒炳辰)은 삼원포에서 손꼽는 부자요 또 지방에 세력도 있었다. 그는 삼원포 취관의 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추취관이라고 불러주었다. 취관이란 직은 우리 조선으로 말하면 면장쯤은 된다. 우리나라 면장은 군사가 없지만 중국의 취관은 무장한 경찰과 보안대까지 가지고 있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추취관은 그리 유식한 사람은 못 되나 그 대신에 의협심과 동정심이 많았다. 추취관은 우리 선배들의 필담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걱정 마시오. 내 집에 땅도 많고 집도 많소. 내 집과 내 땅을 가지고 학교도 세우고 농사도 지으시오. 모든 일은 내가 담당할게요. 우리 ‘중한(中韓)’은 한집과 같소. 일본은 우리 공동의 원수요!”
이와 같이 열정 있는 동정의 말씀을 토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우리 선배들은 너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취관은 이제 말한 것과 같이 자기네 집과 땅을 내주었다. 우리 선배들은 그 땅 위에 집도 짓고 농사도 하고 학교도 설립했다. 학교 이름은 신흥학교(新興學校)라고 하고 가르치는 과정은 보통과정이 있는 동시에 군사학 과정을 추가하였다.
얼마 후에 신흥학교를 하미허[哈泥河]라는 곳으로 옮겼다. 하미허라는 곳은 통화현 땅인데 삼원포에서 75리 되는 삼림 속이었다. 좌우에는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파데강 맑은 물이 굽이쳐 흘렀다. 목메어 우는 희미한 파데강 물소리는 이 땅에 새 조선의 일군들을 부르는 듯 하였다. 울창한 만주땅 삼림 속에 낮이면 밭을 갈고 밤이면 병서를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렸다. 이것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신흥학교이었다. 이 신흥학교야말로 만주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 그 공로를 빼놓을 수 없는 바이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낮이면 산에 올라 밭도 갈고 나무도 찍고 진을 치고 싸움하는 야외연습도 하였고 밤이면 등잔불을 켜놓고 글도 읽고 신도 삼고 떨어진 의복과 양말도 꿰맸다. 물질은 곤란하나 정신을 통쾌하였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악전고투하여 길러놓은 수천 명의 간부 인재는 당시 우리 만주독립운동에 있어 골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지방의 간부와 각 학교의 교원들이 전부 이들이었고 만주의 농한기가 되면 하기(夏期)에는 하기 강습, 동기(冬期)에는 동기 강습, 밤이면 야학을 하여 계몽운동에 적극 노력했다. 이야말로 만주의 신흥 기분을 빚어내는 총 본부였던 것이다.
신흥학교를 말하려면 반드시 이 학교의 창설자이신 성재(省齋) 이시영 선생과 또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고생하며 채를 잡아주신 규운(虯雲) 윤기섭 선생을 필두로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당시 이 학교를 경영한 단체로서는 경학사(耕學社) 부민단(扶民團) 한족회(韓族會)였는데 이 3개 단체는 1910년으로부터 1920년까지 만주에 있어 우리 자치기관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편단심 애국열정을 가슴속 깊이 품고 사랑하는 젊은 아내를 뿌리쳐 버리고 숙천 정거장 북향 급행열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 봉천역에 내려 무인지경 삼림을 헤치고 혁명원지를 찾아온 우리 차동지는 위에서 말한 하미허 신흥학교에 와서 상투리 깎고 학생의복을 입고 학생이 되었다. 장차 독립군의 장교가 될 사관학교 학생이 되었다.
밤이면 병서를 읽고 낮이면 운동장에서 교련도 하고 산과 들에 나가서 야외연습도 하고 밤에 가서 밭도 갈고 김도 맸다. 신흥학교를 필업(畢業)하고나서는 좀더 산골인 쏘베차[小北岔]라는 곳에 가서 백서농장(白西農場)이라는 농장을 설립하고 또 다시 주경야독을 하여 자체 수양에 힘썼다.(『호남신문』 1949.4.26)
신출귀몰하는 독립군의 유격전(1)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운동이 파도같이 일어나자 백두산 밑 파데강반에서 10년 동안이나 칼을 갈고 말을 먹이던 애국용사들은 시호부재래(時乎不再來)라 하고 드디어 풍기운용(風起雲湧)2하였다. 이때 우리 차대장도 산골짜기를 벗어나 들판으로 나왔다. 이 소위 맹호출림(猛虎出林)이었다. 이때부터 차대장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가하여 정식으로 독립군이 되었다. 어깨에는 모젤식 목갑권총이 메어있고 그의 손에는 칼과 폭탄이 쥐어졌다. 이 총과 칼과 폭탄으로써 우리 원수 왜놈과 주구 한간배(漢奸輩)들을 실컷 무찔렀다. 차대장은 조선 국내에 있는 왜놈 경찰서와 기타 시설을 부수기 위하여 또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만주로부터 많은 무장동지를 영솔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들어갔다.
우리 차대장의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섰다는 정보를 들은 왜놈 경찰서에서는 두 눈에 쌍불이 올랐다. 사냥개(정탐군)들을 사방에 널어놓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들은 낮이면 산에 올라 포풀러 나무숲 사이에 까투리와 같이 숨어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밤이면 주린 호랑이와 같이 나와서 헤매어 휘둘렀다. 동쪽에 가서 불을 지르고 서쪽에 가서 총을 놓았다. 은행을 치고 경찰서를 부수고 교통망을 깨뜨리고 왜놈 괴수를 암살하고 주구배를 청산하고 … 이와 같이 열렬한 투쟁을 했다. 왜놈들은 눈이 빨개서 동쪽으로 찾고 서쪽으로 쫓고 닭 쫓는 강아지 모양으로 할딱거리며 헤맸지만 간 곳마다 허탕이었다. 하나도 잡지 못하였다.
성동격서(聲東擊西) 화정위영(化整爲零) 이것은 게릴라 유격전술의 요령이다. 동쪽에 가서 불소리를 내고 서쪽을 치고 서쪽에 가서 불소리를 내고 동쪽을 치며 어느 한 곳을 진공(進攻)할 때에는 군사를 집중시켜 큰 것으로 적은 것을 소멸시키고 또 우리보다 강한 적이 올 때에는 군사를 사방으로 헤쳐버려 적의 예봉을 피한다. 우리 독립군은 언제나 이러한 유격전술을 썼다. 왜적은 우리에 대한 전투 중심을 잡지 못하여 도로무공(徒勞無功)으로 허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왜놈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대병을 움직여 못견디게 굴면 우리들은 귀찮다는 듯이 슬그머니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으로 몸을 피한다.
압록강을 건너는 유일한 교통기구는 나뭇궁이배(통나무로 파서 배를 만든 것)들이었다. 우리 독립군들은 누구나 ‘궁이배’를 저을 줄 안다. 모두 압록강의 뱃사공들이었다. 어느 해 여름 우리 차대장은 동지들을 철마산 숲 사이에 잠복해두고 봄에는 허술한 농부 의복을 입고 동지 한 명을 데리고 의복 속에 권총을 감추어 채우고 지방 정형을 시찰하기 위하여 백주 대낮에 큰길에 나섰다. 탄탄한 신작로 길을 나섰다. 일생을 밤길만 걷던 나그네들이 별안간 태양빛 아래 선명한 낮길을 걷게 되니 마치 부엉이나 박쥐가 낮을 만난 것 같고 산길만 숨어서 다니던 산짐승이 뻔뻔한 들판에 나선 듯 몸이 호젓하고 마음이 무시무시한 감이 없지 않았다.(『호남신문』 1949.4.27)
혁명군 부대(4)
홍대장은 먼강 건너편에 서서 우리가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 “참모장 각하! 무사하십니까? 양하산 선생님과 박대호 선생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 소리는 모기소리만큼 적게 들려왔다. 양하산, 박대호, 김경근 그리고 다른 여러 동지들은 아직 쓰도거우 장영감 댁에서 왜적에게 포위되어 탈출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다고 소리 잘 지르는 번쾌상 등을 통하여 홍대장에게 전달해주었다. 아직 대부분 동지들이 왜적의 포위 중에서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4중대 동지들은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홍대장의 ‘앞으로’ 구령과 전진호 나팔소리는 연거푸 요란스럽게 터져 나왔다.
파데강을 경계로 하여 일본군과 조선혁명군 양쪽의 봉화는 드디어 부딪혔다. 내 꽁무니에 기관총을 퍼붓던 왜놈들의 총부리는 파데강 건너편 우리 4중대 산개선(散開線)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내게로 쏟아져 오던 총알은 좀 완화된 셈이다. 양군의 전투는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소총소리 기관총소리 대포소리……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 거기다가 우렁찬 혁명군의 나팔소리, 양군의 포화소리에 파데강 산골짜기는 그야말로 떠나가는 듯 요란하였다. 이윽고 화약연기는 자욱하게 파데강을 덮고 또 파데강 양안의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하늘을 가렸다. 파데강 언덕 산기슭에 깃들이고 살던 뭇 새떼와 까마귀 독수리떼는 총소리 대포소리에 놀라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 어디로인지 지향 없이 멀리멀리 날아가버린다.
화약연기가 자욱한 파데강 좌우 언덕에는 “앞으로! 뒤로” 이는 우리 홍대장의 우렁찬 구령소리요, “마에— 우로!” 이것은 왜병대장의 여무진 구령소리였다. 넓이가 약 500미터가량 되는 눈덮인 파데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톱질하듯이 밀고 당기고 이렇게 단병 육박전을 계속하는 동안에 쌍방의 희생자도 이미 적잖게 냈다. 파데강 두껍게 덮인 흰눈 위에는 이국전사(異國戰死)의 시체들이 질서 없이 산같이 널려있다. 그들의 뜨거운 심장을 뚫고 내뿜는 선혈은 파데강 흰눈에 꽃 놓아 물들인다. 아침부터 시작된 싸움이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었건만 아직도 그칠 줄을 몰랐다. 산봉우리에서 나와 함께 있던 번쾌상 등의 눈에는 벌건 눈실이 또 몇 줄기 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급급한 가슴에는 화가 펄펄 일어나는 모양이다.
“저보세요! 우리 동지들이 벌써 몇 사람 저놈들의 총에 맞아 넘어졌습니다그려! 저것을 보고야 어떻게 가만히 참고있어요? 우리도 당장 내려가서 저놈들의 꽁무니에 총부리를 대고 쇠통소를 불지요! (총을 쏘자는 말) 흥 그까지꺼 내 총으로 저놈들을 한꺼번에 100명을 쏘아죽이지 못하면 죽어버리고 말지요. 이러고서야 거져 살아있으면 뭘해요!”
번쾌상 등은 목갑을 빼어들고 고락 머리를 지른다. 불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붉은 눈방울을 내어 굴렸다. 이마에 굵은 핏대가 두드러져 올랐다. 흰눈이 깔린 파데강 바닥에는 꺼먼 이국전사의 시체가 문드러져 가로누웠다. 솥뚜껑 같은 억센 번쾌상 등의 발로써 썩어진 소나무둥지를 차넘겼다. 발에 채인 등나무는 중둥이 부러져 와지끈 퉁탕 소리를 내면서 큰 돌멩이를 안고 뒤넘어져 파데강 밑바닥까지 휩쓸려 내려갔다. 그리고 번쾌상 등은 제성에 걸터서 소리를 지르며 왕왕 울었다.(마지막 편(未完). 『호남신문』 1949.6.7.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