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설립 34년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임헌영(84) 문학평론가는 올해로 23년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 소장을 맡고 있다. 지난달 27일 설립 34년을 맞은 이 단체의 대표적인 성취인 ‘친일인명사전’ 발간(2009)이나 역사다큐 ‘백년전쟁’ 제작(2012), 국정 역사교과서 저지 투쟁(2015) 등이 모두 2003년 3대 소장에 취임한 그의 임기 중 일이다.
“(소장 임기 중)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연구소가 생길 때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친일 청산은 빨갱이와 등식이었어요. 지금도 일부 세력은 그렇게 봅니다. 친일 청산을 앞세우면 기득권 사회는 일단 자기들 영역에서 국외자 취급을 합니다. 공공연하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고, 상을 주거나 이권이 관련되는 일에선 철저히 배제하죠. 심지어 독립운동 단체나 기구들도 상대해선 안 되는 곳으로 우리 단체에 방역선을 쳤어요. 이종찬 회장 들어 달라지긴 했지만 광복회도 일부 임원들이 연구소를 그렇게 대했어요.”
지난 5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연구소에서 만난 임 소장은 이런 말도 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연구소 앞에서 제 화형식도 했죠. 저는 아마 오래 살 겁니다. 허허.”
설립 이후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주력해 온 연구소의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임 소장은 ‘동아시아 평화 정착’이라고 했다. 연구소 후원회원은 현재 1만1천여명, 상근자도 50명 가까이 된다.
연구소는 1966년 문학평론으로 등단한 뒤 언론과 출판계에서도 일해온 임 소장이 가장 오래 몸을 담고 있는 ‘직장’이다. “(연구소는) 제 기질에 맞아요. 제가 하는 문학의 주가 사회 비판과 역사 문학이라서 사회과학까지 포함됩니다. 저는 문학을 통한 한국 현대사의 변혁을 추구하는데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 모든 문제의 핵심이 다 친일로 모입니다.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거로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두 차례 옥고도 치른 임 소장은 해방 뒤 80년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친일파 세상’이라고 했다. 그는 친일파를 ‘악령’(나쁜 영혼)이란 말을 빌려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친일파 하면 일제 때 관리 좀 하고 학병 권유 연설을 한 사람들로만 압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친일파는 그 영혼 자체가 악령화한 인간 사회의 가장 비인간적 존재입니다.” 설명이 이어졌다. “단테 ‘신곡’에 9단계 지옥이 나와요. 가장 죄가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9지옥입니다. 배신자가 거기 갑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도 거기 있더군요. 친일파가 바로 배신자입니다. 민족 반역자이고 남을 속인 사람들이죠.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못할 짓이 없어요. 가족도 형제도 친척도 동창도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반인륜적이고 염치도 없고 거짓말 잘하고 변절도 밥 먹듯 하고. 이완용부터 다 그랬어요. 왕 앞에 가서 폐하와 나라를 위해 일본 천왕을 섬겨야 한다고 했죠. 친일파는 인간사회 악의 근본입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뒤 일화를 들어 ‘친일파 강의’를 이어갔다. “저와 가까운 분이 사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자신의 아버지가 식민지 시기 교장을 했는데 사전에 올랐을 것 같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핸드폰으로 사전을 검색해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고 보여주니 표정이 달라지더군요. 사전에 오른 친일파(4776명)는 모두 자기가 하는 일이 반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인 배신행위고 나쁘다는 걸 알면서 한 사람들입니다.”

왜 지금도 ‘친일파 세상’이냐고 묻자 그는 윤석열 정권이 홍범도 흉상 이전을 시도하고 이른바 뉴라이트 성향 학자와 관리들을 국책연구소 기관장에 임명한 인사를 떠올렸다. “대통령에게 대표적인 친일 악령이 씌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등 역대 어떤 정부도 이렇게는 하지 않았어요. 속으론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감히 못 했죠.”
그는 친일파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데는 미국 영향이 크다고 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했잖아요. 일본도 미국 용인 아래 전쟁 책임이 있는 파시스트들이 (패전 뒤) 집권합니다. 우리는 친일파들이 미국 보호 아래 더 건강해졌어요. 살도 더 찌고 돈도 더 많이 벌고 권력도 더 많이 가지고 부정부패도 더 많이 저지르고 악질적인 고문도 더 많이 저질렀죠. 그 뿌리가 윤석열 정부 검찰로 이어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소장 임기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뭐냐는 말에 그는 바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고 했다. “발간 전까지만 해도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우리 연구소가 빨갱이는 다 빼주고 다른 사람들만 사전에 넣을 거라고 욕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사전이 나온 뒤에는 침묵하더군요. 책이 나온 뒤 오히려 정부 기관이나 사법부 쪽에서 친일파 판단 기준을 묻는 문의를 연구소에 많이 합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이나 친일파 재산 환수 재판 등에 참고한다고요. 사전의 학문적 객관성을 평가해서겠죠.”
23년째 소장으로 연구소 이끌어
가장 큰 보람, 친일인명사전 발간
“자기 이익 위해 못할 일 없었던
반인륜적 존재가 친일파의 본질
현 정부 뉴라이트 기관장 기용은
친일악령 씌지 않았다면 상상 못 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은 고 리영희
“인간 본질 안 변한다는 말 늘 새겨”
그는 사전 출간 때 어려움도 많았지만 동시에 위안도 받았단다. “조상을 사전에서 빼달라는 후손들 로비에 저를 포함해 사전 편찬진이 많이 시달렸어요. 그걸 보며 이들도 조상 행위가 떳떳하지 못하고 잘못이라는 걸 아는구나 생각하니 위안이 많이 되었죠.”
그는 이어 “친일인명사전은 학술상을 받아야 할 업적이지만 아직껏 기득권 사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사전의 박정희 항목을 보면 박정희 연구 참고자료가 다 들어 있어요. 인물의 경력을 객관적으로 기술했어요. 사전은 그간 학술연구의 총화로 학문적으로 엄청난 성과입니다. 그런데도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주는 상만 받았지 독립운동이나 학술 관련 단체 상은 받지 못했어요.”
사전 개정판은 언제 나오는지 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선정 원칙은 변함없다”며 덧붙였다. “적지 않은 수가 새로 추가될 것 같습니다. 초판 때는 자료가 없어 빠졌지만 새로 자료가 발굴된 이들이 많아요.”
화제를 돌려 현 정부 들어 대립이 격화하는 남북 관계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묻자 그는 성조기를 흔들고 여전히 빨갱이 타령을 하는 윤석열 내란 옹호자들에게서 “친일파의 재생”을 떠올린다며 비유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후기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지옥에 있어야 할 악령들이 탈출해 성업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비유합니다. 이 악령들은 변신술과 거짓 조작에 능해요. 남을 속여야 장사가 잘 되니까요. 그들이 애용하는 기법의 하나는 종교적으로 표현해, ‘가상의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가상의 적을 없애기 위해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죠. 이를 위해선 못할 짓이 없어요. 친일파를 닮지 않았나요? 한국에서 가상의 적은 빨갱이입니다. 그 대표가 북한이죠. 요즘은 중국과 러시아도 포함하더군요. 러시아는 사실 빨갱이도 아닌데 그렇게 만들어요. 가상의 적이니까요.”
윤석열 집권 이후 보수 논객 조갑제씨 영상을 즐겨 본다는 임 소장은 윤석열 내란 지지 보수는 ‘가짜 보수’라는 조씨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윤석열 내란 지지자들에 대해 일부에서 파시즘이란 말을 붙이던데요.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미국과 유럽 파시즘은 ‘나 그리고 나의 사회, 나의 나라 이익 중심의 독재 체제’를 꿈꾸지만 한국은 오히려 성조기를 들고 시위하잖아요. 그들은 파시즘도 못 되는 ‘친일파 악령’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수는 생각만큼 많지 않아요. 인구의 1~2%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자 그는 “휴머니즘과 인문주의 진보사상으로 ‘친일파 악령’들이 인간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해줘야 한다.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그것밖에 약이 없다”고 답했다.
임 소장은 1970년대부터 월간 ‘다리’와 ‘한길문학’ 등의 주간을 맡아 한국 사회의 숱한 정치인, 지식인, 문인 등과 교류해왔다. 2005년엔 리영희 선생과의 대담을 엮은 책 ‘대화’를 내기도 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을 궁금해하자 그는 바로 리영희라고 했다. “인공위성은 지구 전체를 다 볼 수 있잖아요. 지성도 고도 몇 미터 위로 올라가느냐에 따라 관찰력이나 안목이 달라집니다. 리 선생은 제가 만난 지식인 중 가장 ‘고공비행’을 한 분입니다. 제가 만난 분들 중 그분과의 대화가 제일 재밌었죠.” 예를 하나 들려줬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제가 좋아한 선배 학자들이 이명박은 실용주의자여서 남북관계는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낙관했어요. 평화는 깨지지 않을 거라고요. 리 선생에게 전했더니 ‘임형, 두고 보시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라며 저를 강하게 질타하더군요. 그때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어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 한마디는 이후 제가 어떤 사태나 인간을 평가할 때 반드시 떠올리는 말이 되었죠. 윤석열이 집권했을 때 저는 동네 불량배처럼 품위 없이 걷는 그의 걸음걸이부터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임기를 채우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탄핵을 당해도, 징역을 살아도 윤석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요. 리영희 선생의 이런 혜안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아 민주화 도정에서 실패도 겪었다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오늘날 한국문학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한국문학의) 기교는 세계적 수준입니다. 하지만 문학 사상은 빈약해요. 사상이 빈곤하니 대중이 원하는 걸 잘 그려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12·3 내란’ 이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우린 그 사건을 다룬 멋진 풍자시나 콩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4월 혁명이나 6월항쟁, 촛불 혁명을 제대로 다룬 대하소설도 없어요. 슬프지 않나요? (이런 소설을) 작가들이 쓸 능력도 의욕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철학의 빈곤이죠. 저는 작가들은 적어도 근대 철학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헤겔이나 그다음엔 마르크스라든가 이 정도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장단점과 그 역사를 파헤칠 수 있는 거시적인 분석력과 전망 능력이 나오는데 그게 없는 거죠. 에이아이 시대가 될수록 통섭이 더 절박해지잖아요. 이럴수록 작가나 지식인들이 다방면에 걸쳐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나 인간 사회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이는 좌든 우든 상관없어요.”
최고로 생각하는 작품과 작가를 꼽아달라는 질문에는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을 꼽았다. “두 작품은 인류 문화의 영원한 자산입니다. 여기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다 있어요. 그게 위대한 작품입니다. ‘삼국지’는 주로 전쟁 중심이잖아요. 하지만 두 작품엔 사랑부터 궁극적인 인간 존재의 문제, 선악의 문제 그리고 권력, 독재, 민주주의, 역사, 신앙 등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두 사람은 가히 천재이죠. 바람둥이이기도 했어요.”

국내 작가로는 “누가 뭐래도 조정래와 황석영 작가”란다. “두 작가의 소설은 우리 민족 전체의 필독서입니다. 조정래는 우리 민족의 전체상을, 황석영은 우리 민족사의 수난과 민족 진로를 모색하는 민중 정서를 그렸어요.” 그는 이어 “이병주 작가도 좌우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이 보면 좋겠다”고 했다. “이병주는 작품에서 진보 보수 다 비판합니다. 진정한 보수 정치 또는 진정한 진보 정치를 하려면 정치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부가 되는 작품을 썼어요.”
지난해 말 ‘한국 현대 필화사’ 전 3권 중 1권을 출간한 그는 지금은 박정희 시대를 다루는 2권 출간을 준비 중이다. 다른 집필 계획을 묻자 “쓰고 싶은 주제가 많다. 우선 글쓰기에 대한 책을 내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글쓰기 강의를 많이 했는데요. 맘에 드는 흡족한 책을 찾지 못했어요. 한국 근현대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도 내고 싶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5-03-09>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