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명문80선 61] 사회적으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간난신고를 겪은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조선총독, 정부총감, 군사령관 등 일제 침략의 원흉들과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수괴들의 비밀회합이 준비되었다.
이들을 한방에 날려버리고자 은밀히 준비했던 애국지사들의 거사가 ‘부민관 폭파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역 조문기는 1926년 경기 화성 출신으로 1942년 일본강관 주식회사의 파업을 주도하여 지명수배를 받고, 1945년 대한애국당을 결성하고, 부민관 폭파 의거를 주도했다.
해방 후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옥고를 치뤘다. 그는 1951년 <황금자>, <수도>등에서 극단활동을 하고, 1959년 이승만 암살, 정부전복음모라는 조작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무고로 밝혀지고, 1982년 건국포상을 받았다. 1985년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 2001년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5년 3월 유지호·권남경이 정리한 <슬픈 조국의 노래>라는 회고록을 펴내었다. 독립운동 진영을 비롯 사회적으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책의 ‘서문’이다.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들이 아니라 독립운동자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 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 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는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 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운동자들을 토벌하던 황군장교들은 해방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세력의 뿌리가 친일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서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놓은 후계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 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중략)
서툰 내 글 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보니 행여 역사 한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게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각하고 역사의 한 구석에 조용히 세워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 감고 싶다. (주석 1)
주석1> 조문기, <슬픈 조국의 노래>, 17~19쪽, 민족문제연구소, 2005.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삼웅
<2025-03-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조문기의 ‘슬픈 조국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