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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몸뻬’ 입어야 미인이라는 친일파의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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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채만식

▲전북 군산시 내흥동 금강변의 채만식문학관ⓒ군산시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의 작가인 채만식(1902~1950)은 한국인들에게 꽤 익숙한 문인으로 전북 군산에서는 훨씬 친숙한 인물이다. 이곳에는 채만식문학관이 있고 채만식문학상도 존재한다.

지역사회에 든든한 기반을 가진 이 문인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2009)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위원회는 그의 친일을 소설 창작을 통한 징병제·지원병제·내선일체·황민화·대동아공영권·침략전쟁 및 후방지원 필요성의 선전, 보도특별정신대·국민총력조선연맹 등에 대한 가담, 산문 형식의 글을 통한 국책문학론 선전 등으로 분류했다.

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 채만식 편은 “1942년의 만주국 간도성 조선인 개척촌 시찰과 그 결과로 <매일신보> <반도지광> 등에 발표한 ‘간도행’, ‘농산물 출하(공출) 기타’ 등의 산문을 통해 만주 개척지 선전 및 그에 따른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획책”했다고 보고했다. 한반도 안의 한국인을 일본과 연결시키는 일뿐 아니라, 문필 활동의 영역을 만주로도 넓혀 두 그룹과 만주 진출 한국인들을 한 데 묶는 작업도 했다.

죽기 2년 전에 그는 참회의 글을 발표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된 직후에 발간된 <백민> 1948년 10월호부터 이듬해 1월호까지에 <민족의 죄인>을 발표했다. 전직 국어교사인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은 “그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자신이 친일을 하게 된 것은 ‘비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였다는 뉘앙스를 드러낸다”라며 <민족의 죄인>의 해당 부분을 소개한다.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해방의 투쟁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도 않고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꾸준히 투쟁을 하였다.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에 들고 만 것이었다.”

흔히 국내 항일투사보다 해외 망명 항일투사를 더 높게 치는 경향이 있지만, 채만식은 국내에서 지하활동을 하는 독립투사들이 더 용맹했다는 시각을 나타냈다. 경청할 만한 지적이다.

그는 제3자들의 독립운동을 품평하는 일에는 공정한 시각을 가지려 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과 자신의 차이를 한낱 ‘용기와 비겁의 차이’로 축소시켰다. 세상과 역사에 죄를 짓는 친일을 비(非)용맹·비영리 수준으로 떨어트렸다. 그러면서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했을 뿐이라고 독백 같은 말을 했다.

역사학자 임종국이 <친일문학론>에서 비평한 바에 따르면, 위와 같은 스타일의 자기 합리화는 채만식의 일제강점기 활동 때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1941년 1월 5일부터 15일까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시대를 배경하는 문학’이라는 전시문학론에서 그는 “문학이란 건 그가 서식하는 시대에 대하여 반드시 순응을 하지 않지 못하는 생리를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학은 시대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논리는 문인의 친일을 종용하는 뉘앙스도 띠고 문인의 변절을 합리화하는 뉘앙스도 풍긴다. 임종국은 채만식이 “문학”을 ‘문학자’나 ‘문인’으로 바꿨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문인 개인의 변절을 문학 자체의 변절인 양 합리화했다는 지적이다.

“차라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니 문학자는 신체제에 순응치 않을 수 없다고만 했던들 이 얼마나 간명직재한, 동정할 만한 글이었겠느냐 말이다”라고 임종국은 비판한다. 자기가 하는 일의 본질을 간명하고 즉각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채만식의 문제점은 위의 <민족의 죄인>에도 반영됐다.

채만식의 친일은 일제의 한국 착취를 돕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참회가 완성되려면 옛 주인인 일본의 반성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몸통인 일본의 사과·반성과 배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도 없이, 그것도 친일을 용기나 지능 부족의 소치쯤으로 폄하하는 반성은 진정한 반성이 될 수 없다. 그의 참회는 하나 마나 한 것이었다.

감각적인 방법으로 일제 침략전쟁 미화

▲채만식ⓒ작가회의

지금은 군산시 일부인 옥구군 임피면에서 러일전쟁 2년 전인 1902년에 출생한 채만식은 와세다대학 부설 제일고등학원을 중퇴한 1924년에 강화도의 사립학교 교원이 됐다. 바로 그해 12월, 잡지 <조선문단>에 단편 <세 길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 뒤 <동아일보> <별건곤> <혜성> <제일선>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서른네 살 이후로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평소 풍자적 작풍 속에서 동반자 작가의 면모를 보이며 일제 현실을 고발하였던 채만식은 1940년을 기점으로 체제 협력이 길에 들어섰다”고 평한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동조하는 성향을 보이던 작가가 친일을 선택했으니, 그 역시 크게 보면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940년경 이후의 약 5년 동안 그는 꽤 감각적인 방법으로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그는 여성들의 전쟁 참여를 유도할 목적으로 “새로운 미인”의 논리를 설파했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가 1943년에 발행한 <반도지광> 제67호에 실린 ‘몸뻬 시시비비’라는 글에서 여성들의 전시 의복으로 몸뻬를 추천하면서 이를 새로운 미인과 연관 지었다.

“땅바닥을 휩쓰는 긴 치마보다 짤막한 스커트나 혹은 몸뻬를 입은 경편(輕便)한 맵시가 아름다워 보이며, 치마저고리 갖추어 입고 가정에서 바느질 같은 잔일이나 보살피는 깨끗한 여인보다 작업복 입고 공장에서 해머 휘두르는 여인의 건강하고 기름때 쥐어바른 얼굴이 아름다워 보이며, 화장품 가게에 가만히 앉아 오는 손님 응대나 하는 여점원보다 전차나 기차의 그 동적인 여차장들이 아름다워 보이며, 결국 그들이 새로운 미인이라 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동하는 여성이 아름다운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채만식의 핵심 메시지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일상 복장까지도 전시체제에 맞춰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다는 점을 주입시키면서 여성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그는 남자들을 상대로도 감각적이다 못해 자극적인 방법으로 대일 충성을 촉구했다. 살아서 충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채만식 편에 따르면, 그는 1943년 1월호 <춘추>에 기고한 ‘추모되는 지인태 대위의 자폭’에서 “이 성전을 완수하자면 살아 있는 몸만으로는 잘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사후에 혼백까지도 이 성업이 달성되기 전에는 흩어지지 아니할 각오입니다”라고 말했다. 죽은 뒤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성전을 완수해야 한다고 썼다.

그런 식의 충성을 완성한 지인태처럼 해야 “그 이름이 야스쿠니의 신역(神域)에서 천추에 빛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일왕을 위한 전사자들을 제사지내는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안장돼 영원히 신의 세계에서 살려면, 죽은 뒤에도 혼백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충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전업 작가로 살면서 이런 식의 친일 집필을 이어갔다. 산문을 기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설 창작으로도 친일을 했으니 일반 친일문인보다는 친일 수익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가 만주까지 파견돼 현지를 답사하고 집필을 했으니, 일반 문인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유리한 편이었다.

그런 돈을 받아 가며 약 5년간 일제에 충성했던 그는 해방 뒤에도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런 상태로 1948년 9월에 부실한 참회를 했고, 한국전쟁(6·25전쟁) 발발 보름 전인 1950년 6월 11일 사망했다. 그가 사후에 받고 있는 불합리하고도 과분한 대우를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고발한다.

“1984년 8월 군산시 월명공원에 백릉 채만식선생 문학비가 세워졌다. 1996년 <탁류>의 작품 무대인 군산 시내 세 곳에 채만식소설비가 세워졌으며 2001년 2월 군산시에 채만식문학관이 개관되었다. 2002년 11월 군산시와 군산문화원 주관하에 채만식문학상이 제정되어 2003년부터 시상했다. 이 상은 작가의 친일행위를 문제로 삼은 시민단체의 반대로 2005년 한 해 동안은 중단했지만, 2006년부터 재개되었다.”

김종성

<2025-03-2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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