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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함세웅 신부의 ‘멍에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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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명문80선 77] 함세웅은 2000년대 이후에도 민주와 정의의 한길을 걷고 있다.

▲함세웅 신부, “모두 일어나 윤석열 퇴진!”윤석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 제안자 100인과 1,500 서명자들 주최로 2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우리 모두 일어나 나라를 지킵시다” 1,500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함세웅 신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참석자들은 “현 정권이야말로 국가기강을 허무는 ‘반국가세력’입니다. 대통령 부부가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국민이 생명을 잃고 민생이 피폐해져도 대통령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친일·매국 역사쿠데타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윤석열 세력은 정권 연장을 위해 언론과 방송을 무법적으로 장악해 왔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생태-기후위기에 대한 몰인식은 무지를 넘어 무모하기까지 합니다”라고 주장하고 “국민 여러분! 이처럼 온갖 망동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국정 난맥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주저하지 말고, 민생을 파탄시키고 전쟁 위기를 조장하고 국민의 신뢰를 잃은 윤석열 정권을 ⓒ 이정민

우리나라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천주교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이 그 중심에 있었다. 함세웅 신부도 그 중의 한 분이다.

1942년 서울에 태어나 가톨릭대학에 입학했으며 로마에 유학, 사제 서품을 받았다. 용암동성당 주임사제를 거쳐 가톨릭대학에서 교부학을 가르쳤다.

1974년 ‘사제단’의 결성을 주도하고, 재야연대조직인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으로 맹활약했다. 두 차례의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유신독재에 맞섰다. 그의 투쟁은 5공 독재 시절에도 의연히 이어졌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된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6월 항쟁을 이끌어냈고, 1980년대 말에는 <평화신문>과 <평화방송> 대표로서 시대정신을 담은 새로운 화두를 한국사회에 제시했다.

함세웅은 2000년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을 이끌면서 민주와 정의의 한길을 걷고 있다.

그는 <고난의 땅 거룩한 땅>, <약자의 벗, 약자의 하느님>, <칼을 주러 오신 예수> 등 강론집과 사회비판적 기능을 담은 <멍에와 십자가>, 신앙인의 자기성찰을 담은 <심장에 남는 사람들> 등 책을 지었다.

‘천주교의 민족사적 반성과 신학적 성찰’

<멍에와 십자가>에는 통절한 내용이 담긴다. 그 중에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민족사적 반성과 신학적 성찰’이란 논설이다. 천주교 신부의 위치에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게 보통 용기와 식견이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집단에서 자체의 비판이 당장은 아픔이지만 길게는 그만큼 건강성을 유지하게 된다.

이 논설은 1. 역사적 성찰. 2. 현실적 반성 – 철저한 회개, 철저한 믿음. 3. 미청산의 현실. 미청산의 교회. 4. 교회의 거듭된 변신. 5. 광주 민중항쟁 시기의 교회. 6. 민족통일을 위한 교회의 노력으로 구성되었다. 몇 부분은 골라본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사상과 종교는 언제나 기존의 가치와 수구적 문화권에 의해 거부되고 제동받아 왔다. 18세기 말 천주교가 이 땅에 수용될 당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쨌든 당시 천주교는 많은 구도자들에게 신선한 청량제가 되었다. 특히 양반, 상민 등이 엄존한 계급사회에 만민이 평등한 형제자매라는 가르침은 충격적인 매력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당시 권력층에 의해 천주교가 거부되고 박해받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른바 서학사상은 초기 남인의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다가 서민 대중, 곧 중류와 상민 층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이는 만민평등사상이라는 획기적 가르침에 크게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믿음이란 하느님을 설파한,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 대한 철저한 추종을 뜻한다. 예수에의 추종,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른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본받는 것이다. 예수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룩된 부활의 삶이다. 때문에 사도교부인 안띠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를 추종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순교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순교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의 완성된 결실이다.

1945년 8월 15일을 우리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 불러 왔고 그렇게 배우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과연 8.15가 해방인가? 아니다. 그것은 공허한 개념뿐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자리를 미군정이 이어받았을 뿐, 결코 우리 민족의 해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우리의 손으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이룩하지 못했던 김구는 바로 이를 예견했기에 땅을 치며 울었다. 김구의 예견은 적중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민족의 희망이며 꿈이었다.

그런데 미군정에 의해 임시정부는 주권을 상실한 채 내 나라 내 땅에서도 여전히 망명정부일 뿐이었다. 아니, 해체되어 존재마저도 잃고 말았다.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이 여지없이 짓밟힌 또 하나의 수치며 죽음이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치 못해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결여된 남한 사회는 이러한 원죄 때문에 아직도 중병을 앓고 있다. 되돌아 온 악령의 비유 (<마태오복음> 12:44 참조)에서는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곳에도 다시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온다 했거늘 하물며 치워지지도 않고 정돈도 안 된, 청산되지 않은 한국사회에 일제보다 더한 악령이 얼마나 더 많이 쉽게 침입해 오겠는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쇄신의 노력과 증언의 삶을 펼치는 이들에게 장애가 만만치 않았다. 대구에서 발간되는 <가톨릭시보>의 왜곡된 보도와 거짓 정보는 오원춘 사건의 보도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교회를 분열시켜 많은 이들을 혼란시켰다. 주교단 또한 시국과 관련하여서는 꼭 특정한 지역의 입김을 강하게 받은 양의적 문건을 결정적 시기에 발표하여 민주세력을 방해하는 이중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국민적 열망과 신자들의 열정은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올바른 내용을 파악하여 뜻있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보여 준 한국교회의 현실 개혁의 노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는 참으로 시대적 요청과 국민의 바람이 교회의 제도를 넘어 교회의 참된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했던 때라고 생각된다.

2천년대를 위한 복음화는 민족사적인 반성과 민족과의 합일이라는 그리스도 강생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과 그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복음화란 결코 공허한 개념이나 신자들의 물량적 증가 또는 행사 중심의 구호운동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복음화란 예수 추종의 장엄한 고백과 선언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설정이다. 그것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분명한 청산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2천년대 복음화를 외치기에 앞서 우리는 잘못된 우리의 삶, 잘못된 우리의 과거를 공개적으로 성찰하고 고백해야 한다. 사실 20세기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일구어내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정신인 아죠르나멘또(Aggiornamento)와 쇄신, 갈라진 형제와 세상에 대한 개방적 자세, 특히 봉사와 대화 등을 바탕으로 한국교회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 (주석 1)

주석
1> 함세웅, <멍에와 십자가>, 빛두레, 1993.

김삼웅

<2025-03-2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함세웅 신부의 ‘멍에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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