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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내가 유골함 들고 도지사실 찾아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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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피해자 매장지 조사와 유해 발굴… 그 난항에 대하여

▲충북도청 앞 기자회견아곡리 유해 발굴을 촉구하는 충북도청 앞 기자회견 ⓒ 충북역사문화연대

2014년, 백발이 성성한 70·80대 노인들이 충북도청 정문에 늘어섰다. 야외 기자회견장에 펼쳐진 현수막에는 “충청북도는 유해발굴 실시하라”고 적혀 있었다. 마이크를 쥔 이제관 한국전쟁 충북연합 회장은 “유해 시굴을 통해 아곡리 사건이 밝혀졌다. 이제라도 충청북도는 유해발굴을 전면 실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유골함 들고 도지사실로

기자회견에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팀장이자 한양대 교수 노용석 박사가 참여했다. 그는 2014년 6월 23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의 유해 시굴 결과를 설명하면서 지방자치단체가 유해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기자회견 후 필자는 유골함을 들고 이시종 충북도지사를 면담하기 위해 도청 현관으로 갔다.

도청 현관에는 충북도청 직원과 청원경찰들이 유족들을 막아섰다. 한국전쟁 충북연합은 아곡리 유해 시굴 결과를 토대로 그해 8월 18일 충청북도에 충북 도내 4곳에 대한 유해 발굴과 관련해 도지사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도지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면담 요청 2개월 뒤인 2014년 10월 23일 유족들이 도청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도지사 면담을 시도헸다.

하지만 도청 직원들과 청원경찰들에게 유족들은 ‘늙은 데모꾼(?)’에 불과했다. 스크럼을 짠 이들을 뚫기는 만만치 않았다. 한 여성 유족은 직원들에 의해 사지가 들려 끌려 나왔다. 고성이 오가고 복받친 울음이 터졌다. 설왕설래 끝에 대표자 3명이 도지사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팥소 없는 찐빵이라 했던가! 집무실에는 도지사가 없었다. 필자는 유골함을 열고 “이 뼈가 6.25 때 대한민국 군경의 총부리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뼈입니다”라고 말했다. 묵묵히 듣던 비서실장으로부터 “도지사에게 유족들의 의견을 전달하겠다”는 답을 듣고 도지사실을 나섰다.

유족들이 속울음을 삼킨 채 도지사실에서 물러난 후 아곡리 유해발굴이 바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항의 기자회견을 한 지 5년 만에, 사건 발발 69년 만인 2019년에서야 발굴이 이뤄졌다. 아곡리 사건은 청주 보도연맹원 약 150명이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까지 끌려가서 집단학살당한 사건이었다.

개울에 두개골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출범 1년 만인 2006년 12월 ‘유해매장지 조사사업’에 착수했다. 전국에 유해 매장지 168곳에 대한 조사였다. 나는 충청북도를 맡아 청원 분터골, 옥녀봉, 오창창고를 비롯해 단양군부터 영동군까지의 매장지를 조사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59개소에서 유해발굴이 가능하다고 봤다. 그중 39개소를 우선 발굴대상지로 선정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활동 기간(2005~2010) 중 11곳을 발굴했는데, 충북에서는 청원 분터골이 대상지였다.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남일면 고은3리 분터골 현장은 계단식 논이었던 곳과 웅덩이 근처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고은3리 주민들은 그곳에서의 학살상황과 매장지에 대해 증언을 해 주었다. 2007년 발굴이 시작됐다.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계단식 논 터에서 부서진 팔다리뼈들이 쏟아졌다.

▲분터골분터골 유해발굴. 2007 ⓒ 충북역사문화연대

전쟁 발발 2~3년 후에 외지에서 온 농민이 계단식 논을 경작하면서 유해를 훼손했음에도 수많은 뼈들이 나왔다. 웅덩이 근처에서는 더 많은 뼈들이 나왔다. 이곳에서는 두개골과 치아가 원형 그대로 나왔다. 그것도 한 지점에서 3겹으로 출토됐다. 이는 사람을 총살시키고 그 위에 두 사람이 더 쓰러져 매장됐다는 이야기다. 2007~2008년도 분터골에서 337구의 유해가 나왔다.

2007년도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발굴 개토제 때였다. 약식으로 개토제를 마친 후 진실화해위원회 안병욱 위원장, 성동일 사무처장을 필두로 각 지역 유족회장들이 헬멧을 쓰고 코발트광산으로 들어갔다.

기자 역시 헬멧을 쓰고 긴 장화를 신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굴 안은 한여름인데도 서늘한 공기가 감쌌다. 조금 들어가니 대열에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양쪽 개울에 두개골이 널려 있었다. 얼핏 봐도 백여 개가 넘는 두개골이었다. 마치 두개골은 ‘왜 이제 왔느냐!’라고 원망하는 듯했다. 두개골을 마주하기에는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실미도에서 형제복지원까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활동을 종료하고 국가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권고했다.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 추모사업 지원, 호적 정정, 평화·인권 교육 실시 등이었다. 권고사항 중에서도 비중있게 언급한 것이 유해발굴 실시였다. 유해발굴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공히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종료 후 중앙정부는 유해발굴에 대해 일체 책임있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가 민간차원에서 유해발굴을 했다. 박선주 교수의 책임아래 민간 자원봉사자가 애를 썼다. 충북미신고유족회 조성규 사무국장도 대전 골령골, 충남 아산과 서산, 충북 보은 아곡리, 청원 여우골에서 땀방울을 쏟았다. 그러다가 지자체들이 하나둘 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20년도에 출범했다.

유해발굴 사업이 다시 가동됐다. 본격적인 발굴을 위해 2022년도에 매장지 조사사업이 이뤄졌다. 나는 충북 지역과 더불어 전남 지역, 실미도, 선감학원, 형제복지원 매장지를 조사했다. 전국적으로는 총 381개소를 조사해 유해발굴을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선감학원선감학원 유해매장지 조사 ⓒ 박만순

박만순

<2025-04-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내가 유골함 들고 도지사실 찾아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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