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잊겠는가? 그속에 스러진 영령들이여!’
전국 피해자 유족, 합동추모위령제 엄수
우리 사회에서 반세기 이상 미뤄지고 있는 과거청산의 직접 피해자들이 모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최근까지 국가 공권력의 행사로 희생된 피해 국민의 유족들이 한데 모여 합동추모위령제를 열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즉각적인 과거청산법 제정을 촉구했다.
11월 5일 여의도공원에서는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준)’이 주최하고 11개 피해자 단체들이 주관한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전국 피해자 추모행사와 합동위령제(이하 추모위령행사)’ 가 열렸다.
억울하게 가신 영령과 피해자들의 한을 풀고자
추모위령행사에는 일제강제동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의문사, 삼청교육대, 인혁당 사건, 칼858기 등 그동안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혹의 죽음들과 부당한 죽음의 피해자 가족들이 전국 각지에서 50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여의도공원은 우리 사회에서 해결되지 못한 과거청산 과제의 전시장이었다. 주변 나무와 나무마다 지난 60년 동안 쌓이고 묻혀 있었던 과거청산 사건들이 사진과 글로 내 걸렸고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플랭카드와 붉고 푸른 만장들이 공원 전체에 나부꼈다.
이이화 과거청산국민위 공동대표는 여는말로 “추모행사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과 피해자들의 피맺힌 가슴을 풀어주기 위한 행사”라고 설명하고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왜곡된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을 외쳐 온 유족들의 한과 눈물의 세월을 치유하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오종렬 과거청산국민위 상임대표는 “산 자들이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하여 아직도 구천을 헤매도록 하고 있다”고 영령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둡고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여 영령의 원혼을 신원하고 유족들의 원한을 씻자”며 영령들을 추모했다.
추모위령행사는 추모 문화공연과 전통 제례로 장엄하게 치러졌다. 첫 문은 이광수 선생이 비나리로 열었다. 각 사건의 애절한 사연과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소리가 흐르고, 진혼무로 하얀 소복을 입은 공연자들이 경건한 춤사위를 보이자 여의도에는 금새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어 이원규 시인이 ‘뼈와 뼈는 서로 통한다’는 추모시로 “봉분도 없는 저 캄캄한 구덩이 속의/ 부모와 형제와 자매들/ 그분들의 희디흰 뼈가 아프니/ 살아남은 자들의 뼈도/ 일생동안 쑤시고 아플 수 밖에요”라고 추모하자 곳곳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유족들은 지난 날 억울하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하루도 잊지 못했던 통한과 인고의 세월이 떠오르는 듯 연신 눈시울을 닦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유족들은 “더 이상의 사실 은폐 왜곡과 각 정치집단의 무책임함에 단호히 맞설 것이고 진실을 통해 국민통합, 인권과 평화의 시대를 열어갈 것을 피눈물로 다짐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유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각 사건의 신위 앞에 축원의 술잔을 올리며 눈물과 함께 국화꽃을 바쳤다.
통한의 울분은 정치권에 대한 성토로 이어지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였지만, 유족들의 한맺힌 사연과 고통은 곧 진실규명과 과거청산을 지연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울분으로 표출됐다.
친일진상규명법 추진 경험이 있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반세기동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지 않고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아 피해 국민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정치권을 강하게 비난하고 “국회가 열릴 때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올해는 반드시 과거청산을 이루자”고 말했다.
유족들의 추모와 한의 발언에서는 참가자들이 하나가 됐다. 각 희생자 유족 대표자들은 국가가 국민을 죽였고 의문의 죽음을 밝히지 않고 은폐했고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를 탄압해 왔다고 규탄했다.
특히 한나라당이 해결은 커녕 과거청산을 막는데 대한 성토가 계속됐다. “나간 김에 아예 떠나라”는 말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동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손을 높이 올리고 목청을 다해 진상규명을 외쳤다.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으로 새로운 시대 물려주자
마지막으로 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상여거리굿을 하기 위해 8개의 대형 위패와 상여상징물을 앞세우고 만장과 신위를 하나씩 들고 국회 앞으로 향했다. 전경들이 공원 입구를 겹겹으로 막아 심한 몸싸움이 있었으나 유족들은 한과 분노로 부딪쳤고 ‘과거청산’과 ‘진상규명’을 외치며 강력히 항의해 마침내 국회 앞을 돌아 여의도공원으로 돌아왔다.
조금씩 오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졌고 행진까지 모두 마칠 때에는 이내 모두의 몸과 가슴에 참담히 스러져간 영령들의 눈물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고 소외계층으로 고통받아 온 유족들은 모두 깊은 주름과 백발에 노쇠했지만, 이날은 평생 한으로 잊지 못하는 가족의 넋을 달래고 피해 유족 모두가 하나임을 확인하며 올해 꼭 과거청산법을 만들자는 결의를 다지고 행사를 마쳤다.
국회는 들어라! 전국 희생자 유족 대표들의 절규를!
내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이 군대서 왜 죽었는지 밝혀라!
아들 군대에 보내서 5달만에 어떻게 죽었는 지도 모르고 13년을 살고 있는 못난 어머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만 알려달라고 14년동안 요구했지만 들어주는 곳도 없고 밝히는 곳도 없다. 군에서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밝혀달라는데 왜 못하나? 일이 생기면 단 한사람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피같은 국민의 세금을 받아서 지금 뭐하고 있는가. 즉각 진상 밝혀라.
– 윤옥순 군경의문사진상규명과폭력근절을위한가족협의회 회장
군부독재 단골메뉴 색깔론으로 과거청산 막지마라!
진상규명은 공기 속 산소같은 과제고 억울하게 가신 겨레와 애국지사를 생각하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조작간첩과 빨갱이는 군부독재의 단골메뉴로 선거마다 등장하고 국민을 속여왔다. 한나라당은 색깔공세로 세상을 속이고 있다. 국회 파행에 앞장 선 한나라당 아주 나가고 국민 혈세를 뜯어먹는 거머리를 청산하자.
– 임기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 상임의장
고문하고 증발시킨 3만6천 민간인의 죽음을 해명하라!
삼청교육대는 1980년 당시 39742명을 잡아갔다고 하는데 지금 3500명만 드러났다. 나머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죽었나! 왜 이런일이 누구에 의해서! 저질러졌단 말인가! 삼청교육이 얼마나 혹독한 매질과 심한 고문이 있었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심지어 시체처리공장을 차려놓고 마구 소각시켰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삼청교육대 진상규명을 해야 하는 이유다.
– 전영순 삼청교육대인권운동연합 회장
칼858기 폭파 증거없이 가족들에게 사망 강요말라!
칼858기는 작은 유품도, 단 한구의 시신도, 비행기 폭파된 기체 조각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정부 발표가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납득할 수 있는 진상이 밝혀지면 병이 돼버린 가슴속 미련도 끊을 수 있다. 진상규명만이 17년 전 중동에서 열심히 일하다 오고, 대한민국 승무원으로 자랑스럽게 살아온 가족들을 가족들 가슴속에 제대로 돌아올 수 있게 할 것이다.
– 차옥정 칼858기가족회 회장
반 세기를 통곡했다. 과거청산법 안되면 한국은 망한다!
지난 반세기동안 이 땅에는 숨죽인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유족들은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무덤에 술 한 잔 올리지 못하고 한날 한 시에 제사를 모시는 마을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가! 고령의 유족은 유명을 달리하고 진실은 사라질 위기에 있다. 한나라당은 16대에도 민간인학살진상규명법을 부결시켰다. 만약 올 11월에 과거청산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한국은 가까운 시일내에 확실히 망한다.
– 채의진 학살규명범국민위전국유족협의회 상임공동대표
고문조작사건의 발원지, 한나라당은 두려워하라!
과거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민주사회’라는 지금도 너무나 억울하다. 민주화운동한 사람들을 고문 조작해놓고 왜 명예회복을 안 시키나. 과거청산의 본산인 한나라당은 얼마나 무서워서 개혁을 안하는가! 과거청산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 한 명 한 명을 구천을 떠도는 영령들이 저승에서도 벼르고 있음을 분명히 경고한다.
– 정종렬 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 회장
강제동원피해자 몸값으로 세운 경제, 박정희 딸 입다물라!
각 지역구에서 이렇게 많은 국민이 왔는데 일도 없는 국회의원들이 한 명도 안왔다. 이것이야말로 국민 전체를 무시하는 행동이고 사과받아야 한다. 박정희가 경제 살린 동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가족들은 피와 땀이자 몸값이다. 박근혜가 어릴 때 대통령 딸로 편하게 잘 먹고 잘 살때 우리는 피눈물 흘리며 50, 60년을 살았다. 과거청산 올바로 해 내서 후대에 부끄럼없이 시대를 살아온 것을 물려 주자.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회장
가족 죽인 자들이 죽어야 이 통한이 풀리랴!
거리에서 지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 둔 마음은 모두 같다. 우리는 가족들과 즐거웠던 한 때 그 추억으로만 살고 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얼마나 화나는가! 우리 부모 죽이고 자식 죽인자가 지금 야당 총재다. 우리는 먼저간 가족과 자식의 뜻과 정신으로 살아서 진실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후손에 물려줄 것이다.
– 강민조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관행적으로 국민을 죽여왔다. 더 이상은 안된다!
헌재가 관습법을 얘기했는데 우리 국가는 관행적으로 국민을 죽여왔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입대 중에 의문사를 당했는데 국가는 진상규명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 부모들이 안심하고 자식을 군대에 보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엔 추모사를 올릴 수 없다. 군의문사를 과거청산법에 포함해서 즉각 진상규명하라!
– 허영춘 의문사유가족연대 상임의장
전국합동추모위령행사 준비에서 마침까지, 함께 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전국 곳곳에서 모인 유족이 위령제 준비
5일 위령제에는 전국의 국민들이 모였다. 피해사건별로 수도권에 있는 유족은 물론 여수, 순천, 고흥, 나주, 해남, 함평, 익산, 대전, 산청, 함양, 거창, 문경, 대전, 괴산, 고양, 강화 등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특히 나주민간인학살유족회에서는 지역특산물인 오디주를 제주로, 여수유족회에서는 대추타래 등 제수물품을 준비해 왔다. 당일 제사상 차리기, 위패제작, 상여상징물 메기 등 모든 피해자 유족들이 직접 준비하고 참여해 행사를 치렀다.
■ 국회의원과 지자체, 피해 국민의 아픔 나눠
김원웅 국회윤리특위위원장(열린우리당), 이영순 의원(민주노동당)과 김성곤 의원(열린우리당)이 참석해 영령들을 추모하고 과거청산법 제정을 거듭 약속했다. 또한 제주4.3과 여순사건의 경험을 가진 제주시와 여수시에서 지역민을 위로하고자 후원했으며 김영훈 제주시장은 직접 참석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 학생, 연구자, 인권단체 등 각계에서 힘모아
추모위령행사는 자금마련과 진행까지 각계의 뜨거운 연대로 성사됐다. 과거청산국민위 소속단체는 물론 사회 원로와 학계 변호사 연구자 등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했고 당일 함께했다.
전통제례와 공연 준비를 위해서는 거창민중연대에서 일꾼들이 대거 상경했고 거창농민회도 성심을 담아 국화꽃을 지원했다. 사회를 본 명계남씨나 이원규 시인 등은 오히려 후원금을 냈고 최도은, 안치환, 꽃다지, 김용우 등 민중가수들도 흔쾌히 도왔으며 인쇄물이나 장비도 큰 도움을 받았다.
당일에는 교복을 입은 중경고 학생들이 행사를 끝까지 도왔고 동국대 학생들도 무대 설치와 마무리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각종 현안으로 바쁜 인권단체연석회의 소속 인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일을 분담했고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에서도 함께 선전활동을 벌였다.
언론, 합동위령행사 외면 심각
피해자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다!
지난 5일 열린 전국피해자 추모합동위령제는 지난 60여년간 우리 역사에서 은폐되거나 의혹을 받아온 주요 사건의 피해자들이 다 모여 공권력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그 유가족들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날 언론의 모습은 과거청산이 우리 사회에서 왜 어려운 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행사는 인터넷 언론과 한겨레 외에 일간지에서는 단 한 곳도 보도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언론들의 보도태도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수성과 지성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위령제 하루 전날 있었던 실험동물위령제를 크게 보도할 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지적했던 언론이 우리 역사속에서 스러진 영령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토록 무관심할 수 있는가?
과거 독재시절과 일제강점기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지. 언론의 지금과 같은 행태가 방조하지는 않았는지 되묻는다.
언론에 거듭 촉구한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언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기사거리만을 찾는 언론은 가라. 피해자 문제를 돌아보는 일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 지를 보여주는 잣대이다. 언론은 각성하라!
<전국 피해자 유족 선언문>
진실과 통합, 인권과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