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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총학생회,조선통신사 그 역사의 길을 다시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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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총학생회,조선통신사 그 역사의 길을 다시걷다>



-도쿄지회의 소식을  이렇게 전할수있도록 각별히 마음을 써주신 민문연께 감사드리며,앞으로 도쿄의 여러가지 소식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8월초,민문연이 주관하는 70여명의  ‘평화통신사’가 가고 난 직후,또 한무리의 ‘평화통신사’가 도쿄에 왔습니다.

 경희대 총학생회의 8박9일, 30명의  ‘평화통신사’입니다.

총학생회장 하대현군이 민문연의 열성회원이라고 방국장으로부터 소개가 있었고,일본현지안내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도쿄지회 회원들은 8/15일은 야스쿠니 신사와 재일동포의 삶을볼수 있는 역사탐방,8/16일은 젊은이들이 즐겨가는 곳등의 일정을 잡아 안내를 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8/15일의 역사탐방의 안내는 윤수경 회원이 맡았습니다.

사전에 꼼꼼한 준비와 공부를 해오시어 학생들에게 야스쿠니의 본질에 대해 알기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야스쿠니의 본질에 대해선 우리회원님들은 잘 아시는 터이라 이자리에서는 생략하고

그날의 분위기를 좀 전하겠습니다.



‘8.15의 야스쿠니’가 ‘백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보고느낌’이 일본우익이 어떤존재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기에 학생들에게는 좋은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침부터 일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시청의 사복경찰 5명이 학생들이 묵고있는 호텔에 나타나서, 섣불리 가게되면 충돌의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한다는 말을 해온것입니다.

여행사직원은 안전제일주의로 이번여행을 끌고가고싶어서 경시청말에 기우는 편이었고,
학생회쪽에서는 야스쿠니를 피한다면 우리가 여기에 온 의미가 뭐냐?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한동안 경시청 경찰,여행사직원,학생회,경희대 부총장,그리고 저까지 갑론을박한끝에,
우리들은 일본우익과 충돌하기 위해 온게 아니니까 조용히 보고가자는 쪽으로 의견통일을 봤습니다.

그러나 ‘조용히’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의 앞뒤로 일본 경시청차가 경위를 했고요.

버스기사도 야스쿠니는 가지말라고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말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도 버스기사가 우릴 태우고 거절하는 소동이 있어 우리들의 발이 묶인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경험에서 나오는 건데,야스쿠니는 전세버스 타고갈게 아닙니다. 전차 타고가면 값싸고 배짱편하게 갈수있지요.

우리들은 야스쿠니의 먼 발치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역시 경시청 사복경찰들이 앞뒤 틈틈이 우리랑 섞여서 야스쿠니를 돌아봤답니다.

혹시 일본우익과 충돌이 일어날까봐 …이날은 완전히 우리들이 주인공된 기분입니다.

참고로, 8.15는  일본우익뿐만 아니라  야스쿠니의 본질을 모르는 일반시민들,일본젊은이들도 참배오기때문에, 우리가 말만 하지 않으면 일본인인지,야스쿠니를 보러온 한국인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되는 상황이랍니다.

그런데 몇년전 고이즈미가 열심히 참배하여 국내외의 뜨거운 이슈가 된것과는 정 딴판으로 이날의 야스쿠니는 맥빠졌더군요.

우익 선전차가 많이 나와 있었지만 음악을 틀어대고 ‘천황폐하’등을 외치는 선전차는 하나도 없어 조용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베가 선거에 져서 지금 자민당이 초상집이라 그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일본경시청이 어떻게 알고 나왔을까? 궁금했습니다.

사복경찰에게 물어보니, 그저 우연히 호텔에 와서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물어보고 알았다…고 합니다.

일본경시청이 우연히 호텔에 오기는 왜옵니까?

제 생각엔 8.15전후해서 한국에서 일본으로 오는 단체 여행객들을 여행사를 통해 모두 체크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경시청은 이게 일이니까요.

맥빠진 야스쿠니라도 일단 둘러봤으니 학생들은 느낀점이 있었을겁니다.

사실 야스쿠니는 맥이 빠져야 하지만, 이들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둘러싼 그 소동에서도 느끼는바가 많았을겁니다.


 



에도 도쿄 박물관과 관동대지진 조선인 추도탑 


한국인거리가된 신 오오쿠보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그다음은 관동대지진의 재일조선인과 관계가 있는 장소들로 갔습니다.

역시 윤수경 회원의 안내였는데,윤수경회원은 ‘재일’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알기쉽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에도도쿄 박물관’안의 한귀퉁이에 관동대지진때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안내가 있다길래 관람을 했는데,워낙 큰 박물관이라 사실 저도 재일조선인의 안내를 발견못했습니다.

대신 에도시대말기 명치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이 근대화하는과정에서 에도의 수장이었던 사람과 이토히로부미가 하나가되어, 자신들의 나라만을 위해 이웃나라는 아랑곳없이 그당시 국내외정세를 얘기나누는  여러가지 사진,자료들이 눈에 띄였습니다.

박물관에서 10분정도 떨어진 공원에 관동대지진,도쿄 대공습때 숨진 사람들을 추도하는 시설이 있습니다.

그 한쪽 귀퉁이에 관동대지진때 숨진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시설이 있어 우리학생들은 그곳을 찾아 묵념을 올렸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전국적으로 5만 정도였다는데,살해당한 조선인은 6천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일제가 지진으로 인한 사회불안을 안정시키고 독립운동을 차단하는 2중효과를 얻기위해  우리민족을 ‘죽창꽂이’로 사용한것입니다.

일제에 당한 우리민족의 아픔을 어디 나열할수가 있겠습니까?

윤수경회원이 숨을 멈추기도하고,눈을 감기도하고,얼굴을 찡그리며 돌리기도 하면서 그런 일제의 압박속에서도 ‘재일’은 꺽이지 않고 살아왔음을 학생들에게 얘기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경시청은 점심먹은후에도 계속 우리들을 따라다니다가,에도 도쿄 박물관까지 따라온후 그제서야  해산한다고 가더군요… 


니시도쿄 제2초등학교에 우리그림책 증정

도쿄지회 회원중에 ‘우리학교’의 학교버스 운전수를 하고계시는 정병무회원이 계십니다.

경희대학교에서 일본역사문화탐방을 온다고 하니 우리학교 아이들이 그림책이없어 일본그림책을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심청전”흥부놀부전’..등등의 우리의 그림책을 좀 가져올수없느냐는 얘기를 해왔습니다.

하대현 학생이 대학본부에 이사정을 얘기해서 특별히 지원금을 얻어내어서 그림책을 40권 가져왓습니다.  정병무회원은 이소식을 접하고 너무나 기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며,생각한끝에 ‘우리나라’노래패공연을 이 관동지방의 우리학교들이 연대해서 성사시켜보자는 제안을 해왓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에다가와’학교/정병무회원이 근무하는 학교/그리고 오오타에 있는 제6초등학교가 연대하여 공연을 성사시켜보자는 제안입니다. 


민예관 방문

도쿄지회 양동준 회원의 안내로 방문했습니다. 양동준회원은 교과서 문제로 잘 알려진 ‘스기나미’區의 민단단장님을 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날 참석을 안해 그모습을 구체적으로 전할수는 없습니다만,이 민예관은 조선의 도자기가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에서부터 일제시대에걸쳐 우리의 문화재를 이들은 많이 가져갔지요.

학생들이 어떻게 보고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젊은이들의 만남
 


재일동포 3세 두명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안내했습니다.

한명은 제 딸인데요… 어땠는지 감상을 들어보니 아주 즐거웠고,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밤 10시까지 안내하고,얘기하고,먹고,마시고 했으니 즐거웠겠죠.

우리들은 올바른 기억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이 떵떵거리며 살고있고,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먹고 잘곳을 걱정하는 현실은 올바르지 않고, 이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난것 이기에 작은힘이나마 투쟁에 보태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한국, 일본, 재일의 젊은이들은 역사의 올바른기억을 위한 투쟁을 왜 해야하는지? 그 역사인식이 옅습니다.

그들의 옅은 역사인식을 탓할게 아니라,그 젊은이들이 가꾸어 가고자 하는  다양한 평화로운 미래,다양한 인간의길….

그 다양함과 역사의 깊이와 무게가 서서히 어울려지도록 씨앗들을 뿌리고 키워내어야 할것같습니다.

그럴때 역사의아픔은 평화의 열매가 되어 돌아오고,일본우익은 설 자리가 없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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