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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9 이승만에 대한 CIA문서의 평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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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점9 이승만에 대한 CIA문서의 평가에 대해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백년전쟁>은 이승만에 대한 CIA문서를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라는 부분만 발췌해 확대해석했다. 이 문서는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심각한 이승만의 권력욕을 보여주는 사례로, CIA조차 이승만을 태생적 반공주의자로 신뢰한다는 내용과 함께 특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승만의 권력욕을 거론할 정도였다. 이승만의 독선, 권력욕 등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와 증언이 있다. CIA문서의 사례는 보고 내용의 핵심과 무관하게 그의 권력욕을 특별히 지적할 정도였다는 게 오히려 핵심이다.

 

이승만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는 대개 ‘집요함·고집스러움·독선적·파쟁적·권모술수적·권위적·권력지향적’이라는 부정적 수식어가 붙는다. 이승만 지지자들의 경우 과단성·결단력 등을 내세우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는 집요함과 고집스러움에 대한 ‘아적(雅的) 표현’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그는 권력을 향해 움직이고 목적을 위해 밀어붙이는 스타일이기에, 그의 개인적·인격적 면모는 그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역사적 평가에서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다.


때문에 <백년전쟁>은 그의 유학과정이든 독립운동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반드시 자신의 이익 또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철저하게 목적을 향해 추구한 인물임을 수많은 사례나 증언 가운데 CIA문서를 하나의 예시로 제시했다.


<생명의길> 등은 <백년전쟁>이 CIA문서를 부분적으로 발췌해 확대해석했으며, 그 자료의 핵심 내용은 이승만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만,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도대체 이승만의 독선과 아집 그리고 봉건 영주에 가까운 권위주의 그리고 그의 권력욕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이 박사 자신도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오랜 동안 생활하면서 민주주의를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가의 후예로서의 지배의식, 또는 양반의식이 매우 강한 분이었다 …(중략)… 그는 다른 사람과 의논도 하지 않을 만큼 독선적이었다. 서재필, 안창호, 김구 선생 등과는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 박사는 지성적인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분이었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1979, 79~80쪽 참조)


“이승만 씨는 결코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파시스트보다 2세기 앞입니다. 순수한 부르봉파예요.”(미군정 하지의 정치에이전트 버치의 증언, 자료집 55~56쪽 참조)


<백년전쟁>이 CIA문서를 예시한 것은 CIA조차 이승만을 태생적인 반공주의자로 신뢰하면서도 굳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특성을 거론할 정도로 이승만의 권력욕이 심각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거론할 가치도 없지만 이승만지지자들은 맥아더가 20대 후반부터 이승만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으며, 이것이 이승만이 맥아더로부터 특별전용기를 제공받아 한국에 와서 발 빠른 행보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로 설명한다. 1880년생인 맥아더가 1875년생인 이승만을 20대 후반부터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으며, 이것을 해방 후 이승만에 대한 맥아더의 특별한 호의의 배경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신기한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맥아더가 20대 후반(1905~1910년)이 되었을 무렵과 같은 시기 이승만의 행적을 대비해 볼 때, 맥아더가 이승만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을만한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맥아더는 19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태평양사단의 공병참모대리가 되고, 1905년에는 자기 부친의 부관이 되었다가, 1906년 루스벨트 대통령 부관이 되었다. 1907년에는 워싱턴 D.C.에 소재하는 미국공병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포병학교 교관을 역임했으며, 1908년 제3공병대대 보급장교가 되었다.(<두산백과사전>참조)


이 시기 이승만은 이른바 고종의 밀사 또는 일진회 대표를 표방하면서 1905년 8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을 주인으로 선택’하고 ‘일본의 승리를 기뻐’하면서 ‘러시아보다 일본의 목구멍을 선호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THE STARK COUNTY DEMOCRAT>1905.8.8). 같은 해 8월 4일, 미국 본토에 있던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 목사와 함께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여름 백악관>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 보존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는 얘기는 이 시기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하던 1905년에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 있었다. 맥아더가 정작 미대통령 부관으로 있을 때에는 이승만이 학위논문 취득에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다.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었는지 의심스럽다. 해방 후 이승만의 특별 귀국에는 이승만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인 맥아더의 호의가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같은 협조는 ‘정신적 스승’과의 교감이 아니라,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맥아더가 미국에서 오랫동안 반공주의로 일관한 이승만을 한반도의 유력한 지도자로(미국의 반공 파트너)로 조기 안착시키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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