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7 복잡하고 이상한 부동산 거래 |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육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했으며, 그 결과 8년제 남녀공학 기숙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영수증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재정보고서도 투명하게 공개했다. 횡령은 없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이승만 측은 이승만의 부동산 구입자금의 출처, 연8% 대출이자의 조달과 교육시설 운영자금, 부동산 매매과정에서 발생한 차액 등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자금들의 사용처에 대한 구체적인 입증자료를 하나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이승만은 영수증을 잘 모을 정도로 알뜰했고, 대출금 등은 학교에 모두 투자했다는 막연한 설명만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한 후 회계보고를 하지 않아 한인사회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공적성격의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그 대출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회계기록은 없다면, 그 재정을 운용한 자는 당연히 횡령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수는 없다 하겠다. |
이승만 측은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는 교육사업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학교터를 담보로 한 상당한 액수의 대출금이 어디에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에 대한 명확한 회계 자료가 있다면 공개해야 할 것이고, 없다면 이승만이 공적자산을 유용한 것이 아니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생명의 길 등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이승만은 상당히 불투명하게 재정을 운영했고, 당시 동포들로부터도 강한 반발과 비난을 받았다. 교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재산들이 결국 이승만 수중에 떨어지는 과정에서 법정 분쟁과 폭력 사태로 얼마나 한인 사회가 고통을 겪었는지는 수많은 소송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자료집 5장 1~3절 참조)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수탁인(Trustee)으로서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으로 구입했거나 국민회가 소유한 각종 학교터나 건물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하는 과정을 한인여학원, 에마기지, 교사기숙사, 남학생기숙사의 사례를 통해 추적했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행적이 현지 한인(반이승만세력)과의 소송이었고 그 소송의 상당 부분은 재정권을 포함한 주도권 다툼이었으며, 한인사회 분열의 불씨가 바로 이승만의 ‘자산사유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학교터나 건물은 하와이 교민들의 피땀으로 축적한 공적 자산이었고, 교육사업을 명분으로 투자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자금을 운용할 방법은 대출뿐이었다. 이승만은 이렇게 성금으로 학교터나 건물을 매입해 그 부동산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았다. 그리고 그 대출금은 어디에 썼는지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다. 한편 연8%의 대출이자를 꼬박꼬박 받아 챙겼던 백인들에게 이승만과 그의 학교법인은 ‘우량고객’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또 하와이 사회에서 이승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곤 했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서 <백년전쟁>은 부동산 구입자금의 출처와 대출금 사용처에 심각한 의혹을 제기하였으며, 연간 8%에 이르는 대출금 이자, 교육시설의 운영자금, 부동산 매매에서 발생하는 차액 등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자금의 용처에 대해 이승만 측에게 구체적인 입증자료의 공개를 요구한다. 이승만 측의 주장대로 대출금이든 부동산 매매수익이든 모든 자금이 전부 교육사업에 투자되었다면 근거자료를 통해 입증하면 될 것이고, 입증하지 못한다면 횡령의 혐의를 불식시키기 어렵다고 본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한 이후 일체 회계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는 이승만 자신만이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백년전쟁>은 교민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마련된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제대로 알고싶고, 제대로 역사에 기록하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제기를 던졌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하와이 동포들의 애국심을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