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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5 무장 의열투쟁을 부정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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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점5 무장 의열투쟁을 부정한 이승만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백년전쟁>은 외교독립노선을 부정하고 무장독립·의열투쟁만을 인정하고 있다. 이승만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무장봉기론에 맞서 장기적인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것으로 노선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독립운동 방략으로 전쟁, 의열투쟁, 외교투쟁, 문화운동 등 여러 유형이 있기 때문에 외교노선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는 없는 게 상식이다. 다만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유달리 무장투쟁, 의열투쟁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은 학계의 상식에 속하며 <백년전쟁> 또한 이를 거론한 것이다

 

이승만이 무장·의열투쟁을 줄기차게 반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08년 장인환?전명운이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의열투쟁에 대한 변호 통역을 거절했으며, 1930년 <태평양잡지>기사에서도 이승만이 의열투쟁을 “무법한 개인행동”에 불과하다고 규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뿐 아니라 무장한인들의 국내 잠입움직임 등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했다.(Robert T. Oliver,<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60, 170쪽 ; 경향신문 1965.8.7,7면 기사 ; 자료집 14~15쪽 참조) 윤봉길 의거를 직접 지휘한 김구노선을 비판한 것이다. 이는 김구와 이승만의 친소관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국사 교과서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으로 가르치고 있는 이 역사적 의거를 이승만은 정작 부정하고 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백년전쟁>의 물음이다.


게다가 1921년 이승만의 상해 임정 대통령 연두교서는 무장독립노선에 대한 그의 인식을 충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우리 형편상, 전쟁 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서 싸우자” 그런데 <생명의 길> 등은 ‘백년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분법 아래 무장투쟁만이 독립운동의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당시 현실성 떨어지는 무장봉기론에 맞서 장기적인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이승만의 노선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발언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자 했다는 해괴한 주장마저 내놓고 있다.


<백년전쟁>은 외교노선 자체가 독립운동의 한 방략임을 부정한 바 없다. 독립운동에는 독립전쟁, 의열투쟁, 외교?문화투쟁 등 다양한 노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의 외교론이 여타 독립투쟁 노선을 백안시하면서 부정하거나 제약했고, 한인사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지목한 것이다. 또 무장투쟁론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생명의길>의 주장대로라면 3·1독립운동도 독립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현실성이 떨어지기에) 부정되어야 한다.


이승만이 임정의 책임자가 된 결과가 오히려 임정의 약화와 분열을 가져온 것과 달리, 윤봉길 의거 이후 장개석정부가 임정을 적극 지원하여 이후 임정이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 사실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해방 후 김구와 이승만이 반탁운동에서 함께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단독정부론을 내놓으면서, 통일국가를 견지한 김구는 이승만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진영은 반공을 표방하더라도 분단국가 수립은 반대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은 김구를 이승만과 갈라서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승만정권 아래 김구가 안두희에게 살해되었을 때 정작 안두희는 옥중에서 호사 생활을 하고 출옥 후 초고속 승진을 하고 호화생활을 했다. 전 임정 주석을 살해한 안두희의 ‘놀라운 삶’을 볼 때 과연 이승만이 정말 김구와 ‘끝까지 함께 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김구선생이 안장된 묘소에 철조망이 쳐지고, 효창원을 관통하는 도로가 뚫리고, 독립운동 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묘소 앞에 효창운동장이 만들어지고, 묘소 참배마저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승만 정권 치하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이승만이 끝까지 김구와 함께 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 있는가. 진실이 무엇인지 직시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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