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3 친일로 오해할만한 이승만의 대일관 |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 내용은 이승만이 ‘일본 국가에 대한 반대를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인에 대한 인종 혹은 민족적 증오를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백년전쟁>은 신문기사의 부분적 인용과 악의적 편집을 했다. 또 워싱턴포스트 기사(1912.11.18)에서 이승만의 인터뷰 중 : ‘지난 3년동안’을 <백년전쟁>에서는 ‘한일합방 이후’라고 해석했는데 틀렸다. 이는 기독교 및 YMCA에 의한 자조자립운동의 전성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는 이전 ‘이승만이 반일교육자다’라는 보도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 기사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기 바란다”(호놀룰루 스타블러틴)라는 내용이다. 이 신문은 기사 제목을 “Dr.Rhee denies that korean school teaching ‘anti-japanese’”로 뽑았다. 워싱턴포스트지 이승만 인터뷰 내용은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이다. 당연히 한일 강제병합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며, 이어 “전차 레일이 깔리고, 도시마다 전기 불빛이 들어오고, 공장과 백화점이 곳곳에 생기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미국 개신교의 지원에 따른 조선의 발전상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요컨대 1910년대 우호적 미일관계 아래 이승만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함으로써 ‘친일파’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한 발언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일 뿐이다. |
사실 이승만의 ‘대일관’이나 일본에 대한 발언은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보면 전형적인 ‘친일파’로 오인할 정도로 놀라운 내용들이 많다. 실제 신채호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 마저 이승만을 국적으로 성토할 정도였다. <백년전쟁>은 독립운동가라는 그가 어떤 ‘친일적(으로 볼 수도 있는)’ 발언을 했으며, 그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라는 점을 포착하고자 했다. <백년전쟁>은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에 실린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기 바란다”는 이승만 발언 기사와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린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는 부분을 제시하며 그의 ‘위험한’ 사고를 추적했다. <생명의 길> 등은 <백년전쟁>이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에 쓴 이승만의 기고문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이승만이 “일본과 잘 지내자”는 친일발언을 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비난했다. 이승만 측은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없으며, <백년전쟁>은 올리버 박사가 쓴 <이승만전기>를 인용한데 불과하다고 했다. 또 올리버의 글에는 “한일합방”이란 말은 없다고 해 <백년전쟁>측이 자의적으로 “일제지배 3년이 되어서”라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사는 ‘한일합방’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지난 3년’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에 문맥상 미국 감리교가 조선에 15만 달러를 지원해준 결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미국 신문에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말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우선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결코 친일파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이렇게 오해를 살만한 발언을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발언 배경에 그의 대일본관이나 독립노선은 어떤 맥락에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에 실린 이승만 기고문과 관련한 기사 제목은 Dr.Rhee denies that korean schoolteaching ‘anti-japanese’이다. 적어도 미국인 또한 이승만의 기고를 <백년전쟁> 제작진과 같은 맥락에서 독해했다. 그 이유는 이 기고문이 이전 9월 29일자 <이승만이 반일 교육자다>라는 보도에 대한 반박기사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하와이에서는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1910년대 박용만은 당시 국민군단을 조직, 독립군을 양성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탄압이나 배척을 받아도 박용만이 더 받을 상황이었다. <백년전쟁>은 박용만과 달리 교육사업에 몰두하던 이승만이 굳이 정정보도까지 내며 대일유화적인 내용의 인터뷰를 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결과적으로 박용만과 같은 강경노선과 무장독립군 양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고 본다. 기사조차 실재하지 않으며 조작이라고 몰아갔던 워싱턴 포스트 기사(1912.11.18)는 이승만 측이 찾지 못했을 뿐이며, 이 기사 내용에 대해서도 역시 오독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시점은 한일 강제병합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전차 레일이 깔리고, 도시마다 전기 불빛이 들어오고, 공장과 백화점이 곳곳에 생기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게 어찌 미국 개신교계 헌금의 결과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인가. 당시 독립운동가 가운데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오직 이승만 한 사람 뿐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진실로 일본과 권세를 다투려 한다든지 일본인을 배척하자는 것이 조금도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일본이 우리의 종교적 자유를 방해하지 말아서 조선 민족이 장래에 생존을 유지하며 자유 복락을 누릴 희망이 있도록 배려하면 우리는 일본인의 정치적 자유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자 함이니 그렇게 된다면 어찌 피차에 다행한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승만의 발언(이승만, <한국교회핍박>, 1913, 107~108쪽 참조)은 종교의 자유를 준다면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오해마저 불러일으킨다. 한편, 1923년 이승만은 하와이모국방문단을 조직해 국내에 파견한 적이 있다. 임시정부 대통령이 하와이 주재 일본영사관과 교섭하고, 동포들로 하여금 일본의 여권으로 모국방문을 하게 한 사실을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구나 학계 일각에서는 이 모국방문단 사업이 일제가 하와이 한인사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추진한 프로젝트의 하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자료집, 20~21쪽 참조) <백년전쟁>은 이런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시민들에게 판단을 맡긴 것이다. 한편 <생명의 길> 등은 이승만은 일본의 제거대상 1호였는데도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일본으로부터 아무런 위협을 당하지 않았다고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이들이야말로 전체 맥락의 일부만을 가지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주진오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일본 감옥에 수감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고통 받았을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승만이 1910~1912년 사이의 짧은 기간 한국에 머물렀고, 체류 중에도 YMCA 관련 활동밖에 하지 않았으므로 일제로부터 위협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시기 대표적인 독립운동 관련 사건인 105인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지만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아무 일도 당하지 않고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제거대상 1호는 후일 그가 임정 대통령이 되면서 그의 지위에서 비롯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 이래 일제는 해외불령선인 제1호를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 제2호를 임정의 새로운 지도자 백범 김구로 지목했다. 학계 또한 이승만의 부적절한 대일관(對日觀)을 여러 사례에서 확인하여 밝혀 놓았다.(자료집 16~22쪽 참조) 기왕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이승만은 미국의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객관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대일 유화적 또는 ‘친일적’ 태도와 반일적 태도 사이를 오갔다고 지적한다. 특히 1910년대 미일관계가 우호적일때는 일본에 대해 유화적 발언을 하거나 친일로 오해받을만한 발언도 했으며, 이 때문에 현지 한인들이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러한 이승만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해 격분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아래 1910년대 동포사회 내부만을 향한 이승만의 반일구호는 한인 사회에서 자신의 선명성을 드러내고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마저 불러일으켰다. <백년전쟁>은 사실 관계나 학계의 평가에서 확인되는 당연한 문제 제기를 다루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