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TV의 <백년전쟁>방영에 대한 중징계처분을 규탄한다
지난 7월 25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 전체회의는 RTV가 방영한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편과 ‘프레이저 보고서’ 편이 방송심의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처분을 결정했다. 야당 추천위원 2인을 제외한 여권 추천위원 6인 전원이 중징계를 주장한 결과이다.
보도에 따르면, 여권 추천위원들은 <백년전쟁>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편파?왜곡 영상이라고 한결같이 비난했다. 그런데 ‘두 얼굴의 이승만’ 편에 대한 이들의 이른바 심의 의견은 마녀사냥을 연상케 하는 억지논리로 일관하고 있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엄광석 위원은 1948년 미국 CIA(중앙정보국) 보고서 인용에 대해, “문서 안에 분명히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음에도 방송에선 그 부분을 빼고 악의적인 부분만 인용하고 편향적인 시각의 인물들만 인터뷰해, 다큐멘터리의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독선적, 권력집착적인 특성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수많은 사례와 증언이 남아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신뢰하는 미국의 CIA보고서조차 그의 주요 특성으로 권력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있다고 인용한 것이다. 더구나 이승만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에서 긍정하는 부분을 인용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엄 위원은 또 <백년전쟁> ‘이승만편’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갱스터’, ‘플레이보이’ 등의 표현을 사용해 “초대 대통령을 모욕?저주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왜곡한 증오라는 이름의 먹물로 써내려 간 다큐멘터리”라면서,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청소년들에게 저주의 역사관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대해 과징금을 물리는 게 당연하다고 강변했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독선과 위험에 찬 시각이 아닐 수 없다. 하와이 체재기 이승만과 관련된 10여건의 소송 대부분이 재정(또는 재산 분규)과 폭력 사태에 관한 것이며, 기록에조차 이러한 행태에 대해 ‘Rhee`s Gang’이라고 나오고 있다. 또 그의 맨법(MannAct) 위반 사안이나 여성 관련 소문에 대해, 이것이 사실이라면 ‘플레이보이’라고 불릴 사안이 아니었을까 정도로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갱스터, 플레이보이라는 풍자를 대통령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규정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발상이지만, 독재를 하다 국민들에게 쫓겨난 대통령에 대한 비판조차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으로 받아들이는 궤변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헌법에 명시된 4?19혁명정신이 아니라 4?19로 쫓겨난 독재자에게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행태야말로 반대한민국적이며 반헌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권 추천의 권혁부 부위원장은 “해당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일관되게 건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반대한 곳으로, 다큐멘터리 제작 시점 역시 지난해 11월 중순으로 누가 봐도 정치 선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백년전쟁>에서 인용한 신문 보도 등에 대해서도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원자료가 대부분임에도 이를 “검증되지 않은 자료”라고 제멋대로 규정했다.
<백년전쟁>은 이명박정부 시기 자행된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일련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진실을 알리고자 장기 계획 아래 2011년초부터 제작을 진행한 것으로 앞으로 여러 편의 후속작업도 예정되어 있다.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일방적 찬양으로 역사전쟁을 불러일으킨 자들이 이에 대응하는 시민단체의 반론제기를, 정치 선동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건국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권부위원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공식 해명을 요구할 것이며,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 등을 한 단체로 몰아세우는 것 자체가 권 부위원장이 정치심의의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초기(196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을 다룬 ‘프레이저 보고서’에 대해서도 역사 왜곡이라 단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한국의 경제성장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의해 주도됐다는 내용이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여권 추천의 최찬묵 위원은 “방송 내용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대한민국이 현재 이만큼 살고 있다는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왜 <백년전쟁>이 박정희 대통령 덕에 이만큼 살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
더구나 ‘프레이저’보고서는 미국이 어떤 관점, 어떤 목표에서 박정희의 초기 집권기(1960년대)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프레이저보고서만이 아니라 미국 CIA문서 등 다수의 자료를 인용하여 재정리한 것이다. 1960년대 박정희정권은 군출신들로서 의욕만 앞섰지 경제정책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196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에 미국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것을 얘기한 것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내용이라니 그 발상 자체도 놀랍거니와 박정희 신화를 맹신하는 인물이 심의위원으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심의의 공정성을 의심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년전쟁>은 엄밀하게 말해 방송심의대상이 되기 어렵다. <백년전쟁>은 일일이 증거자료를 제시하며 내용을 전개한 것이며, 그러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역사적 평가를 개진한 것이다. 더구나 퍼블릭 액세스 채널인 RTV를 통해 방송되었기 때문에, 야당 추천 장낙인 위원의 말처럼 만약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에서 (공정성) 문제가 있다면 반대 주장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RTV 측에 편성?방송을 요청하면 될 일이다. 역사관의 차이에 따른 논쟁의 영역일순 있어도 심의 대상일 순 없기 때문이다.
사실 여권 추천인사들이 장악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백년전쟁> 심의과정과 결론도출에서 명백하게 정치적 단죄라는 의도를 가지고 임했다. 심의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RTV의 요청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문제 제기한 사안에 대해 방대한 분량의 원자료들과 관련 연구성과들을 제출했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심의 내용이 사실의 적부 문제이기에 RTV측의 요청에 따라 기꺼이 진술인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심의 과정에서 제작사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소명 자료가 왜 근거가 없는지 단 하나의 반박자료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승만 지지자들이 조악하게 만든 <생명의길>의 내용을 모든 근거로 삼아 일방적으로 <백년전쟁>을 ‘저질 다큐’ ‘반대한민국 다큐’로 몰아갔다.
무엇보다 이들은 다큐의 내용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서도 그 내용을 심의하는 데에 제작사측 인사를 완전히 배제했다. RTV는 심의 내용이 전문적인 역사 사실에 관한 것이기에 민족문제연구소 인사를 진술인으로 해 심의위원회에 이를 전화로 통보했다. 그러나 6월 27일 전체심의위가 열린 당일 박만 위원장은 전체위원회에서 진술을 받는 것은 절차상 마땅치 않다고 다시 소위원회로 회부했다. 7월 10일 다시 소위원회에 출석했으나 권혁부 소위원장은 민족문제연구소는 방송사가 아니어서 심의 결정에 의한 특정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는 점과, 제작사측이기 진술에 편파성이 있으며, 연구소의 진술인이 ‘라디오 대담을 들어보니 자기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편협된 인물이어서 진술을 들을 수 없다’라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진술의 기회를 박탈하는 망동을 저질렀다. 사전에 위임장을 제출하였고 앞선 전체회의에서도 진술 자격에 대해 특별한 문제제기가 없었음에도 어떠한 사전 통보 및 교체요청도 없이 소위원회 개최 당일에 성명을 특정하며 진술인 채택을 거부하여 사전 교체 등의 기회를 차단하고 제작자측의 의견진술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에 대해 사실의 적부를 심의하면서 사실 여부를 답할 수 있는 관계자 출석을 막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제작자라서 진술에 편파성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징계와 관련해 자기방어권을 부인하는 일방적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연구소의 전문 연구자이자 백년전쟁 관계자의 진술 자격에 대해 인격모독적인 발언까지 하면서 진술 거부 요건으로 든 것 자체가 이 심의가 갖는 정치적 성격과 편파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소위원회의 야권 추천 2인의 위원이 항의 퇴장하고 RTV관계자 또한 진술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입맛에 맞게 처리해 전체위원회에 회부한 것이다.
최소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어느 사실이 맞고 틀린지 명백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절차마저도 외면한 채 징계로 가는 일방통행을 선택했다. 나아가 이들은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도 회피하면서 오로지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대한민국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심의를 가장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탄압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방송의 공공성과 윤리성에 기초한 심의가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의 수단으로서 진행된 정치심의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번 심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건전하고 자유로운 방송언론문화를 유도하는 본연의 목적과 달리 특정 권력의 입장에 충실하면서 반대 의견에 재갈을 물리고 보복을 가하는 또 하나의 통제기관이자 압박수단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백년전쟁>에 대한 수구 언론의 광적인 비난과 공격, 일부 정치권의 <백년전쟁>에 대한 매도와 함께 방송통심심의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민주주의의 퇴행과 맞물려 있음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번 결정을 결코 수용할 수 없으며 그 절차와 내용의 불합리함을 공개적으로 문제삼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러한 정치심의가 반복되지 않도록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근본적 쇄신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이를 위해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싸워 나갈 것임을 밝혀둔다.
2013. 7. 31.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