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보도자료]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결성식 & 95주년 기념 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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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결성식

& 95주년 기념 학술회의

 

3·1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 본격화

 

오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위상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독립운동계, 종교계 학계의 원로와 단체대표들은 2월 26일 10시 한국언론재단 19층 기자회견장에서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3·1독립선언 95주년을 맞는 올해부터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3·1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고 확산시키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3·1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에 거족적으로 항거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사의 금자탑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실상과 달리 협의로 해석되고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3·1운동이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일대 전변의 계기를 제공한 혁명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3·1혁명을 계기로 군주제가 극복되고  민주공화제 이념이 뿌리를 내렸으며,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 또한 크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또 일제의 천황제 파시즘이 노골화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3·1정신에 대한 인식도 크게 변화하여 일제 말기에는 혁명 또는 대혁명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이 같은 견해를 적극 수용해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여 이를 3·1혁명으로 복원하는 정명(正名)운동을 벌이는 한편, 자주독립·민주공화·동양평화·경제정의 등의 3·1정신을 규명하고 국민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다양한 학술·문화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관계자들은 매년 학술행사를 열 예정이며 특히 2018년에는 남북공동학술회의를, 100주년인 2019년에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3·1혁명을 조망하는 국제심포지엄도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3·1정신을 기념하는 제대로 된 공간이 없는 현실을 감안해 순국유적지인 서대문독립공원에 3·1혁명 기념시설을 조성하는 시민운동도 추진할 예정이다. 

26일 열리는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결성식은 윤경로 준비위원장(전 한성대 총장)의 대회사,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등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의 격려사,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기념강연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3·1혁명이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거족적으로 전개된 것이었던 만큼, 100주년 기념사업의 발기인도 각계를 망라해 7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독립운동계에서는 윤경빈·김우전 전 광복회장을 비롯해 독립운동가 이회영·이상룡·김규식·김원봉·윤세주·최준·안희제·윤기섭·차리석·최능진 선생의 후손들과 다수의 독립운동 유관단체 대표들이 참여했다. 종교계에서는 천도교의 박남수 교령, 불교의 학담 대승사 회주(백용성 스님 문도 대표), 천주교의 김희중 대주교, 원불교의 이선종 전 서울교구장, 기독교의 김상근 목사 등이, 학계에서는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등이 뜻을 함께 했다. 

한편 이날 2부 행사로 ‘제국에서 민국으로’라는 주제 아래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도 개최된다. 이 학술토론회는 서중석 전 성균관대 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하며, ‘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미리 배포된 자료집에서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3·1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이에 대한 독립운동 진영의 시기별 인식변화를 분석해 3·1운동이 민족혁명인 동시에 민주혁명이었다고 규정한다. ‘3·1혁명’을 통해 ‘제국’은 종지부를 찍었고 ‘민국’의 시대가 새로 열렸으며, ‘인민’은 더 이상 1910년 이전의 ‘신민’이 아니라 목숨을 내건 투쟁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주체임을 스스로 입증했다고 본다. ‘3·1혁명’을 통해 일본제국뿐만 아니라 대한제국도 부정되었다는 의미다. 그는 ‘3·1혁명’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국한시킨다면 그 자체로는 일제의 통치정책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 결과만을 남겼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일 수 있지만 임시정부의 수립에서 상징되듯이 민국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과거와의 혁명적 단절을 초래한 미증유의 사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아가 독립운동 진영은 3·1정신을 계승하여 일관되게 민주공화제를 수용했으며, 점차 인식을 심화시켜 일제말기에는 ‘3·1(대)혁명’이라는 시각을 공유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해방공간에서도 이같은 사정은 다르지 않았으나 제헌헌법 전문 논의과정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초안에 들어 있던 ‘3·1혁명’ 대신에 집어넣은 3·1운동이라는 명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3·1혁명’의 역사상을 복원할 것을 주장한다.         

역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저자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조선민국임시정부·한성정부·신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과 참여인물, 강령 등을 분석해 3·1운동과 민주공화제 임시정부 수립의 연관성을 해명했다. 그에 의하면 3·1운동의 소산으로서 여러 임시정부는 모두 공화제를 표방했으며, 이러한 지향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에 만든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라는 구절이야말로 3·1정신의 총화라는 것이다. 국체와 정체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세계사적으로도 선구적인 것이었다. 1910년 이전만 하더라도 근대국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입헌군주제론이 대세였지만 1910년대 이후 공화제대의론(공화제론과 대의민주주의제론)이 강력하게 대두했고 이것이 3·1운동을 계기로 근대국가형성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박찬승 교수는 이러한 흐름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 스스로 수용하고 발전시킨 것이라는 점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는 사상사적 관점에서 3·1혁명과 사회주의의 관련성을 구명했다. 그는 역사적 무관론과 맹아적 연관론의 두 견해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는 각기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2.8독립선언서>나 <조선독립의 서>에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호의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3·1혁명기 지하유인물에서도 사회주의적 양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참가자들의 내면세계에도 재산균분 등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만세시위운동 국면에서 나타난 맹아적 형태의 사회주의 현상은 ‘베르사이유의 배반’ 즉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은 사태를 계기로 급격히 새로운 대안으로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국외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와 대중조직운동이 고조되는 양상 속에서 사회주의의 역할이 확대되어 간 것이다. 3·1혁명 수감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이 분화되어 나왔으며, 출옥한 이들이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노동자와 청년단체 등 대중조직운동을 병행했다. 임 교수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3·1혁명이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연관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서희경 경희대 교수는 해방 후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를 검토했다. 서 교수는 3·1운동에 대한 인식을 한국현대정치사의 핵심 척도로 이해한다. 3·1운동이 하나의 민족으로 거듭나는 거대한 시원적 체험이었음에도 해방 직후부터 좌우파의 3·1운동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세력은 민족을, 좌파는 인민을, 이승만은 국가를 우위에 두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과 좌익이 이념적 순수성에 집착한 반면 이승만은 여기에 국제정치라는 현실적 요소를 항상 고려했다고 파악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좌파는 부정론을 우파는 승인론을 내세웠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한 데 비해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이 모든 정치적 분열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3·1운동 정신의 단절로 이해한 반면 이승만은 그 완성으로 이해했다. 서 교수는 이러한 분석 끝에 김구를 비현실적인 일국노선을 고집한 민족주의의 순교자이자 예언자로 평가한다. 3·1운동과 달리 임정의 법통이 헌법전문에 명시된 것은 1987년 9차 헌법개정 때였다.  

3·1운동의 정치적 지향과 3·1운동이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더 나아가서는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재정립함으로써 대한민국 정체성의 기원을 밝히려는 이번 학술회의는 3·1혁명론, 임정법통론,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등 인화력이 적지 않은 예민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3·1운동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 좁혀나갈지 주목된다.


때 : 2014년 2월 26일(수) 10:00 18:00

곳 : 한국언론재단 19층 기자회견장


Ⅰ부 3·1혁명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결성식

 3·1혁명 95주년 기념식

 3·1혁명 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결성

 기념강연  3·1정신 재정립의 현재적 의의 —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Ⅱ부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 : ‘제국’에서 ‘민국’으로

1. 발표(13:00 – 16:00)

 ‘운동’인가 ‘혁명’인가-‘3·1혁명’의 재인식 —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3·1운동과 민주공화제 임시정부의 수립 ——박찬승 한양대 교수

 3·1혁명과 사회주의 ———————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

 해방 후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대한민국 국가정체성 — 서희경 경희대 교수

 

2. 종합토론(16:10 18:00)

 좌장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토론 : 김정인(춘천교대 교수), 한시준(단국대 교수), 김경일(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나미(한국방송통신대 교수)


▶ 기획안(PDF)

▶ 자료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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