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친일화가가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을
즉각 교체하라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 ‘명량’의 누적관객 수가 1,800만명에 육박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의 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연내 중국 전역 3,000여 개 극장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왜적의 침입에 맞서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 장군과 당시 수군들의 활약상이 대국주의 의식이 강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다고 하니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는 우리 국민들의 역사적 자긍심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국내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아산 현충사를 찾는 시민들이 부쩍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현충사에서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불편함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영정의 작가가 다름 아닌 일제 시기 친일행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장우성(1912~2005)이기 때문이다.
장우성은 친일화가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1941년부터 1944년까지 4회 연속으로 입선한 경력을 바탕으로 화단에 경력을 쌓아 나갔다. 특히 1943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에서는 조선인 수상자로는 최초로 답사를 하였는데 당시 시상식을 보도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3년 6월 16일자 기사는 장우성이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銃後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心魂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제는 후방(총후)의 조선인들을 총동원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의 선전·선동 역할을 특히 강조했는데 장우성은 바로 이러한 시책에 적극 협력할 것임을 공언했던 것이다.
1944년 3월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미술가협회·조선군 보도부·조선총독부 정보과가 후원하고 일본어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주최한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에 「항마降魔」를 응모하여 입선했다. 결전미술전은 「결전미술전람회 목록」에 “공격하라 멈추지 말라”를 구호로 명기할 정도로 침략전쟁을 부추기는 군국주의 미술전람회였는데 장우성의 입선작인 「항마」는 ‘악마를 굴복시키는 날카로운 검’이란 뜻의 일본 국민가요 「항마의 이검」降魔の利劍과 주제가 일치하며, 여기서 악마는 귀축미영鬼畜米英 즉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벌인 장우성은 해방 이후에도 서울대 미술부 교수(1946년~1961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1971년~1974년)를 지내고 대한민국 홍조소성훈장(1960년), 예술원상(1971년), 홍조근정훈장(197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장(1976년), 5·16민족상(198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금관장(2001년)을 받는 등 온갖 영예를 누렸다. 1991년 그의 호를 딴 월전미술관이 서울 팔판동에 건립된 데 이어 2007년에는 이천시립월전미술관으로 확장 이전하기에 이른다.
일제시대 경력을 바탕으로 해방 후 한국 화단의 문화권력으로 등장한 장우성은 1953년에 이순신
장군 영정을 제작하였으며 1973년 당시 문화공보부 산하 선현영정심의위원회가 그의 작품을 표준 영정으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표준 영정이란 위인들의 초상이 작가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직접 나서서 특정 영정을 표준으로 정한 것이다. 표준 영정이 정해지면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동상, 지폐, 우표 등도 제작해야 하며 교과서에도 사용된다. 그래서 표준 영정은 위인을 기리는 선양 사업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준 영정을 친일 경력이 명백한 화가가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사용한다면 이는 국민정서에 반할 뿐만 아니라 반교육적인 처사이며 궁극적으로는 선현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장우성이 그린 표준 영정이 문제가 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60주년인 지난 2005년 친일화가들이 그린 표준 영정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고 그 결과 2007년 장우성이 그린 유관순 열사의 표준 영정이 지정 해제되고 새로운 작품으로 교체된 바 있다. 그러나 장우성 사후 유족들과 월전미술문화재단 측은 아무런 반성의 뜻도 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영화 ‘명량’의 흥행을 등에 업고 최근에는 ‘월전의 영정 초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적지 않은 일본인들까지도 숭앙하고 있는 시대를 넘어선 표상이다. 그런데 친일화가가 그린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을 아무 의식 없이 참배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제기에 대한 정부 당국의 대응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조정식 의원(시흥을)이 친일화가들이 그린 표준 영정에 대한 지정 해제를 요구하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작가의 친일 논란은 문화체육관광부 영정동상심의규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지정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면서 지정 해제를 거부했다. 하지만 영정동상심의규정 제5조 2항을 보면 “정부표준영정이 천재지변, 화재 등으로 인하여 멸실, 도난, 훼손되거나 고증 및 사진 등 새로운 근거에 의하여 그 인물과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이 된 경우, 기타 지정을 해제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발생”하면 영정에 대한 지정해제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즉, 작가의 행적이 역사정의와 교육 가치의 실현에 배치된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면 당연히 지정을 해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앞으로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뿐만 아니라 아산시, 충남도 등 유관기관들은 하루 속히 현재의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에 대한 지정 해제를 위해 나서야 할 것이며, 나아가 정부는 93점의 표준 영정 중 장우성, 김은호, 김기창 등 친일화가들이 그린 14점의 표준 영정에 대해서도 지정 해제 절차에 착수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앞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와 천안아산지회는 오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앞의 요구가 관철될 때 까지 장우성의 친일행위를 널리 알리는 거리 전시회와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교체를 촉구하는 서명운동 등을 꾸준히 전개할 것임을 밝혀둔다.
2014년 10월 26일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천안아산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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