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국민여론을 거스르는 오기 정치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현 정권의 불통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국회 시정연설이었다. 특히 국정 한국사교과서 추진을 강행하겠다는 불퇴전의 결의를 밝힌 대목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논의도 타협도 필요 없다는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주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민족정신, 외세지배의 쓰라린 경험을 거론하고 통일과 미래를 위해 국정제로 전환하는 것이 정상화라 강변하였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사 국정화를 지지하고 주도하는 세력들이 앞의 가치와는 분명한 대척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평화통일을 근본이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국정제를 추진하는 세력들이 일관되게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친일과 독재를 합리화해 왔다는 점은 어린 학생들조차 거세게 동의하는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나 “역사교과서를 통해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겠다는 발상도, 평지풍파를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학계와 교육계를 좌파로 몰고 야당은 물론 상당수 여당의원들까지 반대하는 국정제를 밀어붙여 정쟁의 원인을 제공하고 갈등과 분열을 확산시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정말 모르고 있단 말인가? 적반하장이요 유체이탈 화법의 진수라 할 만하다.
오래 전 독재정권하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국론통일’이라는 슬로건이 다양성을 특질로 하는 민주사회에 가당하기나 한 용어인지는 차치하고, 백번 양보해 만일 그럴 의지가 있다면 국정화 반대운동에 나선 다수의 시민들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야당에 대해선 ‘화적떼, 난신적자’라고 막말을 서슴지 않는 친박 실세들부터 먼저 엄중히 단속하기 바란다.
이른바 “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영감과 비전을 제공하는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대한민국이, UN의 권고를 받아들여 베트남도 내다버린 시대착오적인 국정 역사교과서를 왜 지금 이 시점에 부활시키려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많은 나라들이 배우려 노력하는 혼과 정신’이 설마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려는 국정 역사교육일리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최근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혼란은 없어야 한다’는 언설은 얼핏 논리적 정합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 또한 궤변과 꼼수에 다를 바 없다. 문제의 핵심은 국정제의 전체주의적 속성이다. 양심적인 절대 다수의 학자들이 집필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서 뉴라이트와 어용학자들로 집필진을 구성할 수밖에 없겠지만, 과거 유신시대의 국정 한국사에서 드러나듯 권위주의 정권 아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집필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그 유신독재 때의 국정 한국사나 교학사 고교한국사, 초등학교 국정 사회교과서 실험본 등이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의 실체를 예견하게 해준다. 결국 국정제는 정권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변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국민들은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권력은 유한하고 역사는 영원하다. 한 두 사람의 한풀이를 위해 역사와 교육을 망가뜨리는 크나큰 과오가 절대로 현실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2015. 10.27.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