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회담 결과 합의안이 발표되었다. 합의의 내용은 첫째,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 둘째, 아베 총리가 내각총리로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다. 셋째, 일본 정부 예산을 투입한 ‘위안부’ 문제 관련 재단을 한국정부가 설립하고 이후 양국이 협력하여 사업을 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임을 확인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 한일 양국 정부가 정치적인 거래를 통해 합의한 이번 결정을 제2의 한일협정과 같은 ‘야합’으로 규정하며 강력히 규탄한다.
비록 일본정부가 책임을 통감하며 아베 총리가 사죄한다는 뜻을 외무상이 대신 밝혔지만, 이는 지난 24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이 요구해 온 ‘사실 인정’, ‘진상규명’, ‘사죄’ ‘배상’, ‘역사교육’, ‘추모사업’, ‘책임자 처벌’ 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법적 배상이 없는 사죄란 한낱 수사에 불과하다.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군이 단순히 관여한 수준이 아니라, 일본정부와 군 등 국가권력이 주체가 되어 조직적으로 자행한 반인도적이며 불법적인 ‘전쟁범죄’임은 유엔의 조사보고서 등을 통해서 이미 국제적으로도 인정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합의에서는 이러한 ‘위안부’ 제도의 불법성, 강제성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일본 정부는 10억 엔의 돈으로 모든 책임을 모면하고자 한다. 이를 한국 정부는 덥석 받아 안았다. 끊임없이 국가 책임을 부정했던 일본 정부야 그렇다 치고 이에 동의한 한국 정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 한국정부의 피해자들을 외면한 채 폭력으로 ‘한일협정’ 체결을 강행했던 50년 전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한일 양국의 합의가 있은 지 불과 몇 시간만에 일본 정부는 합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냈다. 모든 문제는 한일협정으로 끝났으며,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니란다. 끝난 문제면 왜 10억 엔을 내며, 잘못하지 않았다면 그 돈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일본 정부가 1995년 국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을 만든 잘못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합의가 지난 국민기금과 무엇이 다른가. 피해자들의 요구는 사실 단순하다. 일본 국가가 범죄를 저질렀으며, 이에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일본 정부는 이 출발을 수용하지 않기에 온갖 편법과 잔꾀를 부리고 있다. 출발이 어긋나니 뒤 따르는 모든 일들이 정상적이지 않다.
합의 직후 아베 총리는 사죄와 반성은커녕 “이 문제를 다음 세대에게 결코 물려주어서는 안 되니,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전후 70년의 해에 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하며 강조하였다. 이 합의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50년 전의 한일협정 때처럼 ‘최종적이며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 요구를 한국 정부가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이 합의문을 받기 위해 피해자들이 20년 넘게 싸워온 것이 아니다. 더구나 더 참담한 것은 ‘위안부’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평화비’의 철거를 양국 정부가 기정사실화 하는 뻔뻔함마저 드러냈다. ‘평화비’는 정권의 전리품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인권을 찾기 위한 상징이자 국제적으로도 인정된 기념물이다. 이것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철거하겠다는 발상은 독재 정권 하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고노담화의 검증을 비롯하여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시도해 온 아베 총리에게 애당초 ‘진정성이 담긴 사죄’를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진정성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사과가 성립한다면, 가해자의 입장에서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요구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오만하고 부당한 주장에 장단을 맞춘 한국 정부는 몰역사적이고 반인권적인 과오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리하는 정부로서 자격조차 있는지 의심스럽다.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 양국 정부가 ‘최종해결’을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명백한 월권행위이자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50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야합과 폭력으로 강행된 한일협정에 의해 버려진 피해자들은 비단 ‘위안부’피해자들만이 아니다. 강제동원 피해자,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사할린 피해자, 원폭 피해자, BC급 전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등은 지난 50년 동안 한국 정부가 저지른 무책임하고 몰역사적인 한일협정의 장벽을 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법정과 거리에서 줄기차게 싸워왔다.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다름이 아닌 바로 이들 피해자들이다.
우리는 제2의 야합으로 이 모든 과거사 문제를 덮고자 하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행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번 합의를 철회하고 재협상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 책임과 침략전쟁의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그 날까지 우리들은 계속 싸워 나갈 것이다.
2015년 12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