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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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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2010, 여름호



들어가는말


2009년 11월 8일, 숱한 난관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지 60년 만에 비로소 친일인물들의 행적과 경력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첫 성과가 출간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고도 오랜 기간 유보되어왔던 친일파 숙정을, 강제병합 10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 역사적 청산과 학문적 정리라는 최소한의 절차를 거쳐 일단락 지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달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먼저 냉전구조의 해체와 사회의 민주화라는 시대적 상황이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정권하에서 금기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친일문제를 객관화·공론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더디게나마 사상과 학문,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면서 친일문제에 대한 연구도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 백범 영전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는 편찬 관계자들 오른쪽부터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정보화사회의 대두도 친일 청산이 국민적 지지 아래 추진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전자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현실참여에 효율적인 수단으로 기능했으며,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모금 캠페인’은 더 이상 일방적인 여론 조작이 통할 수 없음을 보여준 선구적 실례가 되었다.


그리고 학계의 연구성과 축적과 자료의 정보화도 사전 편찬을 가속화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966년 임종국이 저술한『친일문학론』이 발간되어 지식인사회에 일대 충격을 던진 뒤, 소수의 용기 있는 연구자들이 유지해온 친일문제 연구는 1980년대부터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이의 조사·연구작업이 집단화·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1 그 성과는『친일파 99인』(돌베개),『청산하지 못한 역사』(청년사)와 같은 대중서의 출간과 언론의 기획보도로 이어졌다. 시민들이 친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대중적인 실천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으며, 이들은『친일인명사전』편찬의 확고한 지지기반으로 자리잡았다.2


자료의 정보화는 원천적 사료의 방대함과 이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으로 이중고를 겪던 연구자들에게 신천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이 열악한 여건 아래 ‘공장’을 돌려 체계적으로 인명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지 않았다면 사전 편찬은 기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외부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 등 여러 정부기관의 사료공개시스템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전 편찬을 준비하면서 필요한 예산을 산정해보니 약 30억 원 정도였다. 운영자금조차 조달하기 쉽지 않은 민간연구소가 이러한 재원을 확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기초자료 조사를 단계별로 세분화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예산을 집중 투입하는 방식이었다. 일차적으로는 『매일신보』 등 신문자료와『조선총독부 관보』,『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 등 가장 기본적인 자료부터 수집해 입력하고, 잡지·단행본 등으로 정보화 작업을 확대해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역사정보화사업은 자료에 관한 한 많은 문제를 해소해주는 역할을 했다.3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힘의 원천은 편찬사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를 일으켜 세운 국민적 지지와 동참이었다. 짧게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가 구성된 지 8년, 길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한 지 18년이 되기까지, 연구소의 6,000여 회원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변함없는 성원은 일차적 결실을 거두게 한 최대 동력이었다.4


이렇게 단일 주제의 학술사업으로서는 유례없는 국민적 관심과 지원을 받으면서, 미답의 분야나 다름없었던 일제강점기 40년간 친일인사들의 행적을 분류·정리하는 작업의 일단계가 마무리되었다.


1.편찬과정과주요쟁점


편찬경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주요 설립목적 가운데 하나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명시했을 만큼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출범했다. 그러나 자료수집과 데이터 구축 등에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 편찬사업을 민간연구소가 단독으로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정 확보는 물론이고, 학계의 지지와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1999년 8월 11일, 대학교수 1만여 명이『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여 제2의 반민특위를 만들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교수 일만인 선언’을 했다. 법적인 심판과 단죄는 이미 불가능하지만,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역사적 청산만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단일한 사안에 대해 대학교수 1만여 명이 서명을 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멀리 연변에 있는 700여 명의 조선족 대학교수들부터 인터넷을 통해 의사를 밝힌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에 재직 중인 교수까지, 소장학자에서부터 원로교수에 이르기까지, 과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체육학과 교수부터 역사학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2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전임교수들만 1만 명 이상이 서명을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자 ‘새로운 문화운동’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할 수 있다.5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친일잡지들


교수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편찬위원회 구성이 추진되었으며, 2001년 12월 관련 학계를 망라한 조직으로 발족하여 편찬사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후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교수·학자 등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을 맡았으며, 이들을 포함하여 180여 명의 한국근대사 전공자들이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여 사전의 전문성을 높여가게 되었다.


편찬위원회는 내부 회의와 공청회를 거쳐 사전수록기준안을 마련한 후, 인물 선정과 집필과정에서 객관성과 엄밀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역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1차 자료는 물론이고 방계자료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사료비판을 거쳤으며, 친일행위를 한 인물들의 경력·행적 등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가치판단과 주관적 서술은 가능한 한 배제하기로 집필원칙을 정했다.


주간연구소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인물정보의 집적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공문서·신문·잡지 등 문헌자료를 1차 분석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후의 신문기사·회고록·증언 등은 방증자료로 채택했다. 여기에는『조선총독부 관보』·『직원록』 등 관찬사료 23종 200여 권,『매일신보』·『경성일보』·『만선일보』 등 신문자료 40여 종,『삼천리』·『조광 등 친일잡지와 기관지 80여 종,『조선신사록』·『조선인사록』등 명감류名鑑類 140여 종, 각 도·시·군지 등 지지류志誌類 160여 종, 각종 연감·사전류 60여 종, 공훈록 40여 종, 일기·회고록·평전류 1,500여 종 등 총 3,000여 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방대한 기초자료가 활용되었다. 여기에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희귀 고문서와 사진자료도 추가되었다. 연구소는 이를 분석·재정리하여 300만여 건에 달하는 인물정보를 구축했으며, 이를 토대로 2만 5,000건에 이르는 친일 혐의자를 모집단으로 추출했다.


편찬위원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와 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관련 논문과 저술을 참고하면서 수록대상자를 선정했는데, 신중을 기하기 위해 20여 개 분야 전문분과위원회의 검토와 상임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지도위원회의 자문과 조언을 청취하고 최종적으로 편찬위원회의 전체회의에서 결정을 내리는 여러 단계의 검증절차를 밟았다. 이렇게 하여 최종적으로 4,389명의 수록대상자가 확정되고, 2009년 말 발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편찬위원회는 2008년 4월에 발표한 수록예정자 4,799명에 대한 이의신청을 같은 해 5월부터 받기 시작했다. 이의신청을 한 이해관계자는 대다수가 직계후손이었으며, 그밖에 교단·학교·기업·언론사·기념사업회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간기구가 인터넷을 통한 공시 이외에 별다른 통보를 할 수 없었음에도, 이의신청은 무려 97건 127명에 달했다. 법조계·종교계·교육계·문화예술계가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이는 반민특위의 처벌기준과 편찬위원회의 선정기준이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의신청 처리는 상임위원회가 담당했으며, 이들에 대한 심의결과 압도적 다수인 112명이 기각되고, 13명이 보류되었으며, 단 2명만이 인용 결정이 내려졌다. 기각된 사안이 많았던 것은 신청사유의 대부분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거나 강압에 의한 불가피한 협력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들 모두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의신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무자들은 다시 한 번 역사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존한 당사자가 노구를 이끌고 방문하기도 했으며 읍소하는 유족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고뇌와 번민을 이해하면서도 간절한 호소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편찬위원회가 정한 원칙과 기준이 흔들리면 편찬사업 전체의 공정성이 훼손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대다수 신청인들은 편찬사업의 취지와 위원회의 진정성을 이해해주어 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진술을 청취하는 입장에서는 “나중에 태어난 자의 특권으로 앞선 세대를 비판하지 말라”는 하버마스(J1rgen Habermas)의 경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비난을 받아 마땅한 악명 높은 친일파 후손들이 서슴지 않고 이의신청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압박과 로비로 불명예를 벗으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이 경우에는 편찬위원회와 연구소의 구성원 어느 누구도 한 치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것은 심의결과가 반증해준다.


이의신청이 인용되어 수록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사례는 신현확 전 국무총리와 최근우 전 사회당 창당준비위원장 2명에 그쳤다. 신현확은 군수성에서 고등관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어 수록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일제 말기 근무지를 이탈, 귀국하여 숨어 지냈다”는 유족측의 주장에 따라 연구소가 종전 직후의 일본 공문서까지 조사한 끝에, ‘판임관에서 고등관으로 승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는 기록6찾아내 이의제기를 수용했다. 만주국 이사관 최근우는 독립운동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한 최근우와 동일인으로 판명되어 수록대상자에서 제외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육사 27기로 소위 출신인 이동훈은 이의신청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3·1운동 때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상하이 망명을 준비하다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어 제외했다.


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이의신청 사유가 다소라도 개연성이 있어 보이면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자 했다. 설령 이의신청이 없더라도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검증을 거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여 수록이 유보된 인원은 이의신청을 통해 보류된 13명을 포함하여 총 382명에 이른다. 이들은 수록기준에는 해당하지만 정보가 지나치게 소략해 추가조사가 필요한 경우와 조선인으로 유력시되지만 이를 확증할 필요가 있는 해외 활동자, 그리고 신중을 기하는 측면에서 이의신청을 일부 수용하여 사실 확인 중인 경우로, 보유편補遺篇 발간 때 수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이의신청과는 별도로 발행 또는 게재의 금지를 구하는 가처분소송도 제기됐다. 일제강점기에 검사를 지낸 엄상섭, 결전미술전에 출품한 화가 장우성,『매일신보』에 다수의 친일 글을 기고한 언론인 장지연, 만주군 중위 박정희의 후손들이 선대의 친일 여부에 대한 법적 판단을 구하기 위해 가처분신청을 냈다. 사실관계가 다르고 과잉금지의 원칙을 위배하여 당사자와 후손들의 명예와 권익을 침해한다는 취지였다. 엄상섭의 후손은 1, 2심에서 기각된 뒤 대법원에 재항고했다가 2009년 11월 소를 취하했으며, 장우성의 후손은 1, 2심에서 기각된 뒤 재항고했으나 2010년 3월 대법원에서 다시 최종 기각판결을 받았다. 장지연의 후손은 2009년 11월 1심에서 패소한 뒤 항고하여 2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박정희의 후손은 발간보고회를 며칠 앞두고 게재금지가처분을 기습적으로 배포금지가처분으로 변경 신청했다. 이에 연구소는 여론의 판단을 구하고자 박정희가 교사 시절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사실을 보도한『만주신문』 기사7와 함께,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음을 입증하는 자료8를 공개했다. 1심 재판부는 2009년 11월 기각판결을 내렸으며, 원고측은 현재까지 후속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담당 재판부는 공히 “공공적·사회적 의미를 가진 사안에 대해서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례를 인용하면서, 『친일인명사전』의 ‘표현 내용이 진실하고 목적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시했다.9 헌법상의 기본권인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사전 내용과 출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일관된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적청산과학문적정리


해방공간의 각종 친일파 처리 규정안이나 정부수립 직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반민법」)」은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기본 지향은 엄격한 법적 청산이었으며, 사형·징역형·금고형 등의 신체형과 일부 또는 전체 몰수의 재산형, 공민권·피선거권 등 기본권 제한으로 가능한 방식이 모두 포함되었다.10 이는 해외 각국의 과거사 청산 법령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11 해방된 지 60여 년이 지나서 노무현 정부 때 제정된「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하「반민규명법」)」도 구체적 행위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우선으로 했지만, 국가가 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하고 이를 관보 등 공문서에 게재하는 행정절차가 수반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명예형名譽刑으로 간주할 수 있다. 더구나 후속 제정 법률인「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재산 ‘몰수’를 규정하고 있고 선행 법률의 반민족행위 조항을 원용하고 있다12는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재산형의 성격도 일부 지니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가가 법률에 의거해 중대한 민족반역행위를 저지른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엄중히 처벌하는 법적 청산은 그 대상과 범주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한계도 있다. 전면적으로 적용된 유일한 친일파 처리법인「반민법」은 귀족·중추원 참의·고등경찰·헌병·밀정 등 이른바 당연범과 달리 행정·사법관료와 군장교 그리고 문화예술계와 교육계 등 지식인의 경우에는 처벌대상이 되는 위계를 높이거나 ‘악질적인 행위자’, ‘죄적이 현저한 자’ 등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실상 관용의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성은「반민법」의 시행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나 그야말로 악질적인 행위가 입증되지 않는 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13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이 마련된 뒤 제정되었지만「반민규명법」역시 폐기와 재상정을 거듭하면서 정치적 논란을 거친 뒤 원안과는 판이한 내용으로 입법되었다.14 2005년부터 시행된「반민규명법」은 국회에 상정된 초안의 지위범이나 당연범 규정을 삭제하고 해당 법조法條 전부를 조사대상이 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재구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구체적 행적을 입증하지 못하면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하더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결함을 안게 되었다.15 예컨대 군수로 장기간 재직한 사실이 있더라도 물자수탈과 전쟁동원에 관여한 입증자료가 없으면 면책될 수 있는, 납득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민간기구인 편찬위원회는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실정과 부합하게 선정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식민통치체제에 복무한 지위에 따른 책임과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수록대상의 선정기준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반민족행위자와 함께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기여한 부일협력자 상층부에까지 수록대상자를 확대했는데, 이는『친일인명사전』이 단죄의 측면보다는 역사적·도의적 평가에 가까운 학술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의명칭


구체적인 편찬작업에 들어가면서 편찬위원회는 예상을 넘어서는 다양한 과제를 대면하고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우선 명칭의 적절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의 대안으로 ‘부일협력자사전’, ‘친일반민족행위자사전’, ‘친일행적사전’ 등이 제시되었다. 얼핏 보면 유사하지만 실상은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제목들이었다. 즉 수록대상자의 개념과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부일협력자사전’은 말단 생계형 부역자나 소극적 친일행위자가 과도하게 포함될 수 있다는 측면이, ‘친일반민족행위자사전’은 거꾸로 매국노나 민족반역자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한편 ‘친일행적사전’은 최소한의 가치판단이 배제되어 규정성이 희석되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토의결과 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인 해방공간은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자를 강도 있게 비판할 때 널리 사용되었던 ‘친일파’란 용어를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고, 사전 명칭도 원안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20여 년에 이르는 조직적 친일청산운동의 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이란 제호가 갖는 상징성도 고려되었다.


친일파의정의


편찬위원회가 채택한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이다.16


이 규정에서 우선 친일행위의 기간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별다른 논란 없이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까지로 정리되었다. 개항기 또는 농민전쟁기도 거론되었지만 토론 끝에 선정사유가 되는 친일행위는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심대하게 또는 완전히 침탈한 기간” 동안 발생한 것에 한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주권이 적어도 상당 부분 기능하고 있을 때 발생한 결과적 부일협력행위는, 그것이 일정 부분 국왕과 정부의 명령 또는 기타 법적·제도적 장치에 의해 형식적으로 규율받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괄적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부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권이 심대하게 침탈당한 시점은 대체로 일본군이 대규모로 진주하고 한국정부의 통치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 러일전쟁 개전 때로 상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등의 조약체결은 일본군의 실질적인 한국점령에 대한 정치적 인준과정과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진주와 동시에 일진회 등 친일단체의 매국적 반민족행위가 광범위하게 발생한 사례도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국권침탈 전후로 상한을 설정한 타당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친일행위의 하한은 사회 통념상 일제식민지배가 종결되었다고 보는 1945년 8월 15일로 했다. 해방공간에서 제시된 일부 친일파 처리 규정안에서는 해방 이후의 반민족행위나 모리행위도 처벌대상으로 삼았지만17 이는 오히려 친일의 정의를 모호하게 하고 친일파의 범주를 지나치게 확대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거니와 이념 공방의 소지도 있으므로 처음부터 검토대상에서 제외했다. 순전한 일제강점기의 협력행위로 분석대상을 제한한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라는 정의에 대한 해석이다.


편찬위원회는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의 범주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조약체결 등 매국행위에 가담한 자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자와 같은 민족반역자(반민족행위자)가 한 부류이며,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자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지식인·문화예술인과 같은 부일협력자가 다른 한 부류이다. 이 중 민족반역자 전부와 부일협력자 가운데 일정한 직위 이상인 자, 그 외 정치적·사회적·도의적 측면에서 책임을 물어야 할 친일행위가 뚜렷한 자를 사전에 수록할 대상자로 선정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체적으로 보아 『친일인명사전』에서 가리키는 친일파의 범주를「반민법」이나「반민규명법」의 적용대상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범위가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두 법은 매국이나 독립운동 탄압, 전쟁동원 등 민족반역자에 해당하는 중대한 반민족행위를 대상으로 하고 규정성이 강한 반면,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는 물론 상층 부일협력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의 친일행위자를 수록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18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리하면 역사적으로는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다만 학술적 개념으로서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대별할 수 있으나 이 또한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의 범주에 모두 포함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경계선상에 위치한 인물도 존재했다. 중요한 사실은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의 구분이 반드시 죄상의 경중에 따른 것은 아니며, 행위의 성격을 분간하기 위한 유형별 분류일 뿐이라는 점이다.


오히려『친일인명사전』에서는 부일협력자 상층부인 지식인·문화예술인·언론인 등의 책임을 무겁게 따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직역봉공職役奉公에 대해서는 그 사회적 파급력이 크다는 측면에서 강도 높은 책임을 물었다. 이민족 지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데올로기 통제로, 부일협력한 지식인들이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그리고 전쟁동원에 필요한 군국주의 이념을 선전·보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들의 경우 식민지배국의 침략전쟁에 동포를 소모품으로 밀어넣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하급 전범에 해당하며19 오히려 가중처벌의 여지가 많다고 보았다. 지식인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출세나 치부를 위해 친일한 자보다 사회적·도덕적 책임이 더 크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더욱 엄격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순사·밀정 등이 일신의 출세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극악하기는 하나 그 영향이 제한적이었던 데 비해, 식민통치기구의 상부구조에 참여한 간부들이나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이나 파급력의 측면에서 매우 치명적이고 구조적인 악폐를 낳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지도층의 정치적·도덕적 책무는 나라와 민족의 처지가 어려울수록 더욱 강조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지, 식민지배하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면책될 성격의 사안이 아닐 터이다. 만약 이러한 논리로 이들에게 면죄부를 준다면, 동시대에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이나 전 재산을 판 뒤 일가를 이끌고 망명하여 풍찬노숙을 마다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결단은 한갓 의미 없는 개인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전에서는 부일협력자 상층부,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에 더 엄중한 잣대를 적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전에 수록되는 내용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반민족행위자냐 부일협력자냐가 가치판단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선정기준


편찬위원회는 수록대상자를 선정하는 데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을 가지고 임했다. 먼저 협력행위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신중하게 평가했다. 주체적 신념의 실천이거나 출세를 위한 방도로 친일의 길을 선택한 것과 강박에 의한 동원 또는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계(생존)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한 반면,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를 좇는 기회주의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 예컨대 일부 지원병이나 소년특공대 등은 일제의 선전도구로 악용되고 부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의 막바지에서 총알받이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학병 출신 장교, BC급 전범도 그 행위의 비자발성을 감안해 일단 유보했으나 개별 사례의 분석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었다.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거나 단일 단체일지라도 되풀이하여 직책을 맡거나 장기간 참여했다면 당사자의 의지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앞에서 거론했듯,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가혹한 식민통치와 광기어린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의식과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일제의 선전선동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하여 맹목적인 협력자보다 더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 또, 군·경찰·헌병·밀정 등 폭압기구의 복무자들은 물리력으로 식민지배를 뒷받침했을 뿐 아니라 항일세력을 직접적으로 탄압함으로써 독립을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좀더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다.


왕王·공족公族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20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한 자나 전향자는 예외 없이 수록하기로 했으나,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있었더라도 뒤에 반일운동에 가담한 경우, 즉 선친일·후항일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친일 혐의자는 대부분 선항일·후친일에 해당하는데,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수차례에 걸쳐 심도 있는 심의절차를 밟았다. 그리하여 편찬위원회가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기 전에 숨겨진 친일행적이 노출되어 1996년 서훈이 취소된 김희선·박연서·서춘·장응진·정광조 등과 함께 새로이 20명의 수훈자가 수록대상자로 선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21 잘못된 서훈이 발생한 원인은 체계적인 근대 인물정보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해당 인사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정부가 발굴 보훈이나 오류 방지를 위해서 역사인물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련 부처의 적절한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며 앞으로 『친일인명사전』이 서훈 심사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선정기준에서 관심의 초점은 지위에 따른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구체적 행위로만 협력 여부를 판별하게 된다면 말단 집행자는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 친일파로 분류되겠지만 정작 이를 지시하거나 지휘 감독한 상층부의 책임은 실종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서는 특정 지위, 즉 고등관 이상에 재직한 자를 일괄적으로 수록대상자로 규정했다. 편찬위원회가 이와 같이 지위 또는 직위에 따른 선정규정을 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러한 규정은 일제식민통치기구의 행정관리·사법관리·경찰·군인을 대상으로 했다. 일제하의 행정·사법·경찰·군은 식민지배체제를 관철·유지하는 통치기구의 골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목표로 하는 정상 국가에서의 기능과 달리 식민지 수탈과 전쟁동원을 원활하게 관리하고 수행하는 물리적·폭력적 억압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들 네 분야의 고등관 이상은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의 유지 수행이 가능하도록 지휘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 중간 이상의 간부층에 해당한다. 이러한 간부직에 있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간부로서 가졌던 권한과 임무에 상응하여 여타 말단 관리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더욱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이들을 당연 친일행위자로 일괄 규정하는 이유는 다만 이러한 객관적 책임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실 조선인이 이러한 중간 간부 이상으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와 호응이 없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어떠한 식민국가도 동의와 충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피식민지인을 간부로 등용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전 기간에 걸쳐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안정성이 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중 일반에 수용된 적이 한 시기도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식민지배체제 가담은 최소한 기회주의적이며 출세 지향의 비도덕적 행태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국내외에서 전개된 지속적 항일운동과 압도적 다수 대중의 반일정서 등 당시의 현실은 이들의 선택을 관용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고 판단된다. 즉, 대한민국이 헌법 전문에 명시한 법통인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 항일단체와 항일운동가의 존재와 활동, 국내의 각종 반일운동, 연합군의 반격 등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이 공공연한 사실로 인지되고 있던 시기에,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복무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고등관료를 지향하고, 또 그 지위에 오르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전반적인 동의와 충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한층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나아가 임시정부가 일제에 선전포고한 1941년 12월 9일 이후 일제의 통치기구에 간부로 재직한 자는 논리적인 측면에서 적국의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에 협력한 상당 수준의 반역죄를 저지른 반국가범죄자로 간주할 수 있다.


한편 일제식민통치를 체험한 일반 민중에게는 하급관리나 순사들이 악질적인 친일파로 각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이들이 지배체제의 말단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면의 현실이다. 이들이 가혹한 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고한 식민지배체제의 상부구조가 기능하고 있었으며, 이 지배체제에는 다수의 조선인 간부가 교량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통치의 상부구조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폭압적 지배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통치기구 내에서 말단 하수인들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역할에 따른 고위간부로서의 책임이 클 뿐 아니라, 이들이 식민통치나 침략전쟁 수행에서 상부구조를 형성하고 직책상 더 영향력이 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에서 지위에 따른 책임을 규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편찬위원회가, 말단의 집행자들 모두가 이 같은 책임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관이 아니지만 고등경찰·헌병오장·밀정·검열관 등은 직무상 당연범으로 수록되었으며, 촉탁이나 고등관 아래의 하급관리·면장·서기·순사·헌병(보조원) 등 최말단의 협력자라 할지라도 뚜렷한 친일행적이 있으면 수록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2.비판에대한반론


2004년 초 단 11일 만에 소액 모금으로 목표액 5억 원을 돌파한 국민모금운동에서도 나타나듯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확고했다. 다수가 찬성 입장을 밝힌 최근의 여론조사도 이를 반증한다.22 그러나 이 사회의 일부 기득권세력과 무지로 인해 부화뇌동하는 극우세력은 혈연·학연·이해관계·정치적 신념 등 다양한 이유에 얽혀 역사적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2005년 8월의 1차 명단 발표에 이어 2008년 4월 2차 명단 발표를 거쳐 『친일인명사전』 출판이 가시화되자 친일비호세력은 조직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편찬위원회에 대한 비난과 압박의 강도를 높여나갔다.『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과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어설픈 논리를 제공하고, 박정희주의자들과 극우단체들이 노골적인 공격을 맡는 식이었다. 이들이 최소한의 학문적 정리에 그렇게까지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자신들의 사주社主와 정치적 우상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들이 『친일인명사전』을 폄훼하는 근거는 차마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나 같이 비논리적이다. 게다가 해방 직후 친일파들의 변명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어 60년 세월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해방공간과 반민특위 정국에서 친일파들이 즐겨 내세웠던 용공색깔론·전민족공범론·공과론·인재론·희생론·생계론23에 더하여 편찬 주체를 겨냥한 자격론·정치적 음모론에 심지어 불가지론까지 등장하는 희화적 상황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난감했던 일은 이들의 주장이 사전의 실체와는 전혀 별개의 차원에서 제기되어 상식적인 소통은 물론 토론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수구언론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단 한번의 취재나 내용 확인도 없이 억지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쏟아냈다. 이들의 편향보도와 사실왜곡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사전의 선정기준이나 내용 전거에 대한 최소한의 분석도 없이 지엽적인 트집 잡기와 본질 비켜가기로 일관한 것은 스스로 합리적인 반박할 자신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먼저 색깔론을 보면 사전 편찬의 주체에 대한 끊임없는 용공 시비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연구소와 편찬위원회 구성원들의 전력을 파헤치며 친북좌파로 몰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또 여운형과 북한 인사들의 행적을 거론하면서 형평성에 문제가 많다고 강변했다. 이는 색깔론을 들이대어 사전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려는 기도였다. 여운형이 일제 말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좌우의 대결로 몰고 가려는 속내를 짐작하게 해준다. 저명한 북측 고위인사들이 사전에 다수 수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도 색안경을 낀 그들의 외눈박이 관점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24 더더구나 가관인 것은 극우 인사들의 주장이다. 라디오 토론회에 나온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의 모 인사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친일인명사전』은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주장했다.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들의 인식과 판단은 그 근거가 모두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아예 백지상태라 할 만큼 사고의 출발도 북한이요, 그 끝도 북한이다. 그렇기에 급기야는 『친일인명사전』을 패러디한 ‘친북인명사전’ 발간 소동을 일으키다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다음으로 편찬주체의 자격이나 대표성, 전문성을 문제 삼았다. 사실 이것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주장이다. 일제시기를 전공한 교수와 학자들이 180여 명이나 망라된 편찬위원회를 정체불명의 집단으로 매도한다면 도대체 누가 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도 18년간에 걸쳐 친일문제를 탐구한,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 사법부까지도 인물정보를 조회하고 있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전문연구기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예의 공과론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인물을 친일파로 규정하여 흠집을 내고 평가를 오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사전에서는 객관적 사실만을 포폄 없이 서술하고 있으며 해방 후 행적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공이 있다 해서 그 과오를 다룰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도 납득하기 힘들다. 공은 이미 분에 넘치게 인정되고 전파되어왔으며, 심지어 왜곡된 형태로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강요한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과장을 넘어서서 심각하게 뒤틀려 있는 우리의 식민지시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교정지로서 기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음모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다. 혈서기사 조작설에서부터 차기 대권주자 견제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소설 창작을 방불케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전에 수록된 위관급 장교의 한 사람일 뿐이다. 황군의 장교는 극소수 조선인만이 될 수 있었던 일본제국의 중추였으며,25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적국의 군 간부였음을 알아야 한다. 즉 박 전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특정인을 음해하기 위해 기준을 맞추는 일은 모리배나 독재정권이 선호하는 행태이지, 국민적 지지 아래 공개적이고 당당하게 편찬을 추진하는 학술단체의 방식은 아니다. 또 특정 정치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지적은 그가 정계에 진출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편찬사업이 추진되어온 그간의 경과를 볼 때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백범은 말했다.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하여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를 대할 때는 구역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드골은 말했다. “동정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두 가지 배반자들이 있다. 머리가 우수한 지식인, 문인들과 직업적 군인들이다.” 분석과 비판이 아닌 비난과 욕설을 퍼붓고 있는 논객들에게 답이 되었으면 한다.


맺음말:새로운시대를열기위하여


시대정신과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이 결합하여 어렵사리 이루어낸 성과인 만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갖는 의미와 이에 거는 기대 또한 적지 않다.


먼저 『친일인명사전』은 민주주의를 향한 소망을 담고 있다.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복무한 친일파들은 일제시기 천황제 파시즘을 유지·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형태만 달리하여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은 역대 독재정권에 인적·물적 토대를 제공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정착을 지연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역사적 정리는 민주주의의 확대 심화를 위한 전제이다.


또한 『친일인명사전』은 인권·평화·인종·종교에서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 현존하는 징병·징용·위안부 문제는 전쟁동원에 협력한 자들을 반인도적 전범으로 취급해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들과 함께 인종 간 대결을 조장하거나 신사참배를 선동한 이데올로그들의 죄적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한일 과거사청산의 관점에서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 파시즘을 공고히 하는 데 복무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은 표리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하여 한국 내에서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근·현대사에 대한 민족 내부의 자성은 일본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본다.


한편, 『친일인명사전』과 같은 지난한 과거사청산 작업을 시민들의 지원만으로 이뤄낸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국가가 60여 년간이나 외면해온 미결과제를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는 사실은 역사를 바꿔나가는 주역이 결국 민중임을 입증해주었다. 그것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 추진과 시민들의 친일청산 실천운동이 국가 차원의 과거사청산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발족은 물론이고, 다른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출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성과라 하겠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우선 『친일인명사전』이 단순한 친일행위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한국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최대의 역사·인물 정보의 집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간 일제침략사나 독립운동사 연구는 질과 양, 두 측면에서 모두 깊이 있게 진행되어왔지만, 정작 식민지배의 메커니즘과 근·현대 사회계층의 계기적 연관성에 대한 구조적 해명에는 소홀한 점이 적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이 인물사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미답의 연구 분야에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친일인명사전』은 다양한 인물군상의 다기한 인생행로가 담겨 있는 대서사로서도 가치가 크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는 생활사(Life History)의 보고寶庫라는 점에서 각 부문의 창작과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학술·문화 콘텐츠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증주의에 대한 실증적 반격의 의미도 지닌다. 그간 당위적 사실로 여긴 나머지, 주요 친일파를 제외한 부일협력세력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다소 미흡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제 친일인물 또는 그를 옹호하는 세력에 대한 정서적 반감과 추상적 이해를 지양하고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건전한 이념적 지평의 전개를 가로막는 자칭 보수세력의 연원을 추적하는 데도 『친일인명사전』의 현실적 유용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 외에도 지성사의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지하듯이 압축근대로 상징되는 20세기 한국 사회는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축적의 폭과 깊이에서 볼 때 충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기에도 역부족인 현실에서 고집스럽게 한 시대를 정리한 것은 이념이나 가치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이다. 과거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知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 ‘내공’만큼 우리 사회는 더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되리라 믿는다.


다수의 전문 연구자가 오랜 기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일차적 성과인 만큼 미흡한 부분도 눈에 띈다. 예컨대 군과 경찰은 직업의 특성상 자료가 희소하여 방증을 확보하고도 1차 문헌사료로 입증할 수 없어 수록을 보류한 사례가 많았다. 지방과 해외의 경우 자료수집과 조사연구에 현재의 인적·물적 여건이 충분히 따라주지 못해 소루한 상태로 마무리한 점을 고백한다. 이밖에도 귀중한 증언임에도 일일이 자료 확인을 통해 채택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미비점은 앞으로 진행될 후속 편찬사업 과정에서 보완할 것을 약속드린다.


일단락은 지었지만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완결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수십 권에 달하는 친일문제연구총서의 일부인 인명편이며, 총론편과 자료편도 준비 중에 있다. 지방과 해외 조사가 끝나면 초판을 보완하는 보유편과 수정증보판도 발간할 예정이다. 『친일인명사전』과 함께『식민통치기구사전』,『일제협력단체사전』 등 식민지기의 인물과 조직에 대한 종합적인 편찬사업이 완료되면 한국 근대를 입체적으로 분석·조명하는 데 효율적인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앞으로 많은 분들의 참여와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한다.


 


조세열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친일문제와 한일관계 등 근현대 과거사청산과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한 관심 분야이다.「74년 조직(세칭 ‘인혁재건위’)사건의 운동사적 의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의 의미와 쟁점」,「친일파의 축재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재산환수에 대한 법률적 타당성 연구」등의 글이 있고,『일제협력단체사전』, 『친일인명사전』 집필에 참여했다.



1. 김민철·조세열의「‘친일’ 문제의 연구경향과 과제」,『사총』 63, 역사학연구회, 2006에서 친일문제가 학계에서 갖고 있는 특수성과 운동적인 측면, 그리고 연구사에 대해 종합적인 정리를 시도한 바 있다.


2. 박한용, 「분단 이후 친일파 청산운동의 재개와 과제」,『한국 근현대사 속의 친일의 의미와 친일파 청산운동의 필요성』, 학술단체협의회, 2002 참조.


3. 이때 기획된 정보화 사업 중 식민지기 통치사료의 보고라 할 수 있는『조선총독부관보』는 예산문제로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자료의 ‘축적’, 그것이 곧 한 시대의 문화 ‘축적’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4. 조세열,「망각의 역사를 넘어서」,『민족문제연구소 창립 15주년 기념자료집』, 2007.


5. 김민철,「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준비하면서」,『말』1999년 8월호.


6.「商工事務官平林佑休職の件」, 任免裁可書·昭和二十一年·任免百五十八(昭和21年 09月05日), 日本 國立公文書館 所藏文書 [請求番] 本館-2A-043-00·任B04295100.


7.「血書·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滿洲新聞』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8.「舊時陸軍軍人(軍屬)屆」昭和 二十年 三月 一日.


9. 장우성 관련 2008카합 823 발행 및 게시금지가처분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민사부 결정; 엄상섭 관련 2008카합 1003 게재금지가처분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민사부 결정; 장지연 관련 2009카합 1237 발행 등 금지가처분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2민사부 결정; 박정희 관련 2009카합 1324 게재금지가처분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3민사부 결정.


10. 박수현·이용창·허종,『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세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참조.


1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외국의 식민지·점령지 과거사청산법령』, 2007 참조.()


12.「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은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반민규명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13.「반민법」은 처벌 규정이 대폭 완화되어 군·법조·교육·학술·문화·예술·언론 등의 분야를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으며, 이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분석이 있다. 반민특위에 관한 전면적인 분석 논문으로는 허종,『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친일파 청산과 그 좌절의 역사』, 선인, 2006; 이강수,『반민특위 연구』, 나남, 2006이 대표적이다.


14.「반민규명법」입법과정에서 나타난 쟁점과 한계는 조세열,「면죄부가 된 친일진상규명법」,『내일을 여는 역사』16, 2004;「‘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의 의미와 쟁점」,『기억과 전망』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참조.


15.「반민규명법」은 제2조 정의에서, 초안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을 조사대상에 불과한 ‘친일반민족행위’로 대체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범주를 대폭 축소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제23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조항을 신설, “특정한 직위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재직자를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여 지위에 따른 책임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16. 이만열,「친일파의 개념과 범주」,『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제1차 국민공청회 자료집』,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민족문제연구소, 2001.


17. 조선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소집요강(1946. 1. 30),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친일파 규정(1946. 2. 14), 대한독립협회의 민족반역자규정(1945. 12. 10.) 등에서는 8·15 해방 이후의 반민족·반민주행위자와 모리행위자도 친일분자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


18. 매국노·매국적·민족반역자·반민족행위자·부일협력자·부적자·전범·친일분자·친일 파시스트 등 여러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친일파는 이들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범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19. 과도입법의원의「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초안(1947. 3. 17)은 ‘언론, 문필 등으로써 전쟁행위를 고취한 자’ 등을 전범으로 분류해놓았다.


20.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황족과 일본화족·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은 구체적인 친일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이은(영친왕)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했다. 왕·공족의 성격에 대해서는 金英達,「朝鮮王公族の法的地位について」,『靑邱學術論集』14, 韓國文化硏究振興財團, 1999 참조.


21. 대통령장: 金性洙 / 독립장: 金鴻亮, 尹益善, 李鍾郁, 張志淵 / 애국장: 朴聲行, 李東洛, 李恒發 / 애족 : 姜永錫, 金應珣, 金禹鉉, 南天祐, 朴暎熙, 劉載奇, 任龍吉, 車相明, 崔俊模, 崔志化, 許永鎬 / 건국포장: 尹致暎.


22.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친일인명사전』발간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나간 역사를 바로잡아 교훈을 얻기 위한 것으로 잘한 일이라는 응답이 58.6%, 역사를 무리하게 들춰내 갈등을 야기하는 것으로 잘못한 일이라는 응답이 31.8%로 나와 긍정적 평가가 두 배 가까이 이른다.(『데이터뉴스』 2009. 12. 21)


23. 박한용, 앞의 논문, 70∼73쪽.


24. 해방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광업부 고문을 지내고 자본가로서는 유일하게 애국열사릉에 묻힌 이종만,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사하고 ‘혁명시인’의 칭호를 받은 이찬,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신고송, 보위성 부상을 지낸 김정제, 교통국장을 지낸 한희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교육문화성 부상을 지내고 공훈·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황철, 인민배우 문예봉,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송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을 지낸 안영일, 교육문화성 부상을 지내고 계관 칭호를 받은 조명암 등 대다수가 애국열사릉에 묻힐 정도로 예우를 받은 고위급 인물을 비롯해 다수의 재북인사가 사전에 수록되었다.


25.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조선인 임관자는 총 63명으로 연평균 1.75명이며 이 중 5명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군 임관자도 총 67명으로 연평균 4.8명에 그치고 있다. 일본 육사에 편입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은 총 20명이다.(민족문제연구소 D.B. 자료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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