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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연수의 ‘秀堂門’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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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종합운동장 정문과 그 위에 걸린 김연수의 현판     ©민족문제연구소


전주 종합경기장 정문 일주문에는 친일파의 공적을 기념하는 현판 ‘秀堂門’이 버젓이 걸려있어 시민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수당문은 제44회 전국체육대회(1963년)때 삼양사 회장으로 있던 김연수가 낸 성금으로 세운 것으로,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김연수의 호를 따 ‘수당문’이라고 새겨 현판을 걸었다고 알려진다.


수당 김연수(金秊秀, 1896~1979)는 전북 고부(현 고창군)의 만석꾼인 김경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2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형 인촌 김성수와 업무 분담을 통하여 토지와 자본을 증대시켜 대지주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1936년에 경기도 관선의원과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위원, 1937년에는 경기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발기,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 이듬해에는 일왕으로부터 견수포장(絹嫂褒章)을 수여 받았다.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직후 2만원(지금의 2억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친 이래 1943년까지 바친 국방헌금 총계가 80만원을 넘었다.


특히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원의 조선항공 공업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친일 정치활동을 통해 일제의 전쟁협력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1942년 1월 14일, ‘일억일심’이라는 연두 소감을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조선의 민중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여 자발적으로 황민화 운동 실천에 앞장선다.


1944년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권세대(日本勸世隊)’에 참여하여 일본 유학생들에게 학병을 권유하는 유세 활동으로 유명했다.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의 학도들이 입대하여 죽어야 황국신민이 될 수 있고, 그래야 조선인이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1943년 8월에는 징용제의 실시를 “2,500만의 무상의 광영”이라고 찬양하는 글을 썼다.


이처럼 화려한 전력의 수당 김연수는, 경기도 관선 도의원, 만주국명예총영사, 중추원 칙임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임전보국단 간부, 학병 권유 등의 반민족 행위를 한 혐의로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2002년 2월 28일에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대표 김희선)’이 선정하여 발표한 친일파 708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기념하는 현판을 종합경기장의 일주문에 버젓이 걸어 두고 기념할 수는 없다. 광복이 된 지 58년이 지났다. 이제는 친일파를 기념하는 일주문의 현판을  하루 속히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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