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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29일, 그로부터 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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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김현희 KAL858기 조작 의혹에 대해 공개 답변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11월 3일에 이어 11일에도 열렸다. 우리 기억 속에 ‘북한공작원 마유미’, ‘언니 미안해’와 영화와 유행어가 먼저 떠오르는 이 사건은 당시 수당 당국에 의하면 ‘1987년 11월 29일 북한이 다음 해 열린 서울 올림픽 방해를 목적으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하여금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858 여객기내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미얀마 인근 안다만 해역에서 실종되어 승무원을 비롯해 중동 건설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무고한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만행’으로 당시 전세계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던 대형 참사였다. 바레인에서 체포된 김현희가 김포공항을 내려선 날은 바로 1987년 12월 15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맞붙은 군부정권을 평화적 방법으로 교체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던 제13대 대통령선거일을 불과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던 그 16년 세월동안 가족들은 단 한조각 잔해나 유품도 발견하지 않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회한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과 딸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임옥순 회원은 이 사건 가족회를 중심적으로 이끌고 있다.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있는 임옥순 회원     ©민족문제연구소


사실 임옥순 회원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조동걸 관악동작지부장으로부터 임옥순 회원의 소식을 들었다. 전직 수학 교사 출신인 조동걸 지부장이 그녀의 두 딸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두 분은 서로가 연구소 회원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1월 9일 토요일 조동걸 지부장과 함께 임옥순 회원을 만났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그녀의 남편 김덕봉씨(45세)는 당시 현대건설 전무였는데 차기 현대건설 사장으로 모두가 인정하던 인재였다. 당시 상무는 현재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9살이었던 큰딸은 지금은 어느 덧 대학원생이 되어 있지만 둘째 딸은 아버지의 기억조차 없던 어린 나이였다.


임옥순 회원과 만나기 며칠 전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신성국 신부께서 직접 연구소를 찾아와 사건의 여러 의혹들과 활동내용 등을 소상히 말씀해 준 터라 대략의 사건 개요는 파악하고 있었으나. 임 회원은 초면에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그간의 억울한 심정을 쉼 없이 토해냈다. 환자의 아픔 사연을 의사가 성실히 들어주기만 하여도 치유에 많은 영향이 있다는 말이 있다. 16년 간 그녀가 겪었을 회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막상 억울한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엔 나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임옥순 회원을 비롯한 진상규명대책위원회가 제기한 의문점은 김현희가 폭파범이 아니라는 점, 당국의 수사가 형식적이었다는 점, ‘칼’기가 폭파되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 등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관한 것이어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점점 더 이마를 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광주에서 수 천명을 학살하고 들어선 정권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그러나, 가족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안기부가 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못하도록 갖은 협박을 가하면서도 오히려 사형을 선고받은 범인 김현희는 사건 2년 만에 특별사면을 받아 김현희는 신앙간증 형태로 전국을 누비며 열렬한 반공 연사로 활약했다고 한다. 더구나, 김대중 정권으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뤄진 지금 그녀는 완전히 행방을 감춘 상태이다. 사건 당시 수사 책임자로 안기부 대공수사과장이었던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가족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한다. 대형 민간 항공기 잔해 한 조각 발견하지 못한 그로서는 적절한 발언이 아니다.


겨우 임옥순 회원의 말을 끊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았다. “연구소는 어떻게 알고 가입하셨나요?” “아마 1994년도였던 같아요. 그 때는 회보 이름이 [민족정기]였잖아요. 왜 내 남편을 포함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희생되어야 했을까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러한 비극이 바로 분단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분단으로 남쪽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은 통일을 반대하고 반공을 내세우는데 그들의 뿌리가 바로 친일파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아마 당시에 50만원을 회비로 보낸 것 같아요.” 그 때가 마침 딸들이 중고등학생으로 입시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아마도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거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기 어려운 때였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얼마 전 반세기 전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인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정부를 대표해서 유족들에게 사죄를 하였고, 국정원은 창설이래 처음으로 이른 바 ‘수지 김’ 사건에 대해서 유족과 국민들에게 공식 사죄하였다.
수지 김 사건과 제주 4·3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 문제 역시 객관적이고 과학적이 재조사를 통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국가의 본질적인 존재 의의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유족들의 한 맺힌 절규에 정부 당국뿐 아니라 종교·정당·학계·시민·사회단체 등 전 사회 구성원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 희생된 유족 대부분은 건설 노동자였다. 약자의 죽음이 이토록 가벼이 다뤄지는 사회에서 어떻게 감히 인권과 평화와 사회 통합을 논할 수 있겠는가. 역사의 교훈은 영원한 비밀은 없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정부는 피맺힌 가족들의 절규에 성실히 답하여야 할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정부는 즉각 진상 규명에 착수하라.


끝으로 임옥순 회원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회원들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김현희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_ www.kal858.or.kr 
통일뉴스 기획기사_
www.tongi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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