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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산야에 통일 시를 아로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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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의 비서로 해방 정국의 파란 속 한가운데를 지나온 이기형 시인은 역사의 복권을 기다리는 몽양 만큼 세인의 이목에서 멀어져 있다. 일제 때는 항일운동으로 투옥되었고 몽양이 암살당하자 분단 조국에서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며 절필했던 그는 1980년 신경림, 백낙청 등의 권유로 다시 시작 활동을 시작해 1989년 빨치산의 삶을 다룬 시집 [지리산] 등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현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인 그가 새 시집을 냈다.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지금까지 현실의 편이 아닌 항상 역사의 편을 고수해 온 우리 시대 얼마 남지 않은 어른인 시인의 당찬 함성에 귀 기울려 보자.












▲이기형 시인
분단 59년!
오늘의 시인, 특히 젊은 시인들은 고민도 통곡도 없단 말인가! 꿈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서푼도 안되는 헛소리로 일관하니 답답하고 안타깝다. 하기야, 나라 전체가 극히 일부만 빼고는 헛것을 붙잡고 삶을 천박하게 탕진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겠다.
전진하는 역사관에서 볼 때 오늘의 우리 현실은 엄청나게 후퇴했고 타락했고 부패해 부정(否定)의 극치다. 비판적 리얼리즘 시를 써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내 시는 아직 미숙 미약하다.
일찍이 타골은 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린 후 인도 독립의 시를 썼다. 우리들은 이런 타골을 배워 조국 산야에 통일 시를 아로새겨야 하겠다. 겨레와 역사가 요청하는 시를 쓰는 데 미력이나마 계속 정진할 작정이다. (이기형 시집 <봄은 왜 오지 않는가> (삶이 보이는 창) 책머리에서)


1917 함남 함주 생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운동에 눈뜸
1933 이후 한설야, 문석준, 여운형, 임화, 이기영 등과 조선독립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모색    
1938 함흥고보 졸
1942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 2년 수학
1943-1945 ‘지하 협동단 사건’,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 항일 투쟁 혐의로 수 차례 피검
1945-1947 <중외신문> 기자 역임. 김구, 이승만, 박헌영, 이주하, 김삼룡 등을 만남
1947. 7. 19 몽양 서거 후 33년간 일체 공적인 사회 활동 중지, 칩거
1980 신경림, 백낙청, 이기영 등의 권유로 다시 시작 활동
1989 시집 [지리산]필화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현재 각종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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