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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법 311호 법정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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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윤 운영위원(현 홍대부고 교사 겸 서울북부지부장)
2003년 12월 2일 오후 2시,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의 구성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송두율 교수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어쩌면 이 시대의 한 명장면이 되기도 할 현장 같아서 일과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먹고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서울지법 형사합의 24부(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 배심 임지아, 조정웅 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는 송 교수의 가족과 친지를 비롯한 그의 ‘석방을 위한 대책위원회’ 같은 진보단체와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소위 ‘안보를 지키기 위한 비상회의’ 같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기싸움에서 꺾이지 않으려는 듯 대치하고 있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독일 지식인 920명이 만든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하였던 독일의 한국협회 의장 라이너 베르닝 박사가 송 교수 가족 옆에 앉아 눈길을 끌었다. 공판이 열린 311호 법정은 좌우 12석씩 10열, 그러니까 모두 120석의 자리밖에 없어 20여명 정도는 뒤에서 서 있는 채로 이 역사적인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하였다.


검은색 양복차림의 송 교수는 모두진술에서 “재판정에 서서 한마디도 하기 전에 이루어진 여론몰이에 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 절감했다”며 입을 열었다. 그는 “절망감과 함께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종종 찾아왔다”며 “저를 해방 이후 최대간첩으로 둔갑시키는 현실을 지켜보며 비민주적·반통일적 구조를 읽을 수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리스말인 에포케(epoche)는 ‘일단정지’를 의미하는데, 새로운 것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관성적으로 달려왔던 속도를 우선 멈춰야 한다”며 “개인적으로 나도 1평 공간에 갇혀있는 현재를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는 일단정지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다.


 송 교수가 입장할 때와 진술을 마쳤을 때 앞자리에서 그를 격려하는 사람들이 박수와 환성을 보내자 뒷자리의 반대 그룹에서는 “빨갱이, 미친 놈”라는 욕설이 튀어나와 정리(廷吏)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이들 두 세력은 이미 재판에 앞서 건물 입구에서 송두율 교수 석방과 학문·양심의 자유를 갈구하는 탄원 모임과 ‘거물간첩 송두율’을 추방하라는 모임으로 맞선 바 있다. 더군다나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보수단체 회원으로 보이는 이들 중 3명은 무모하게도 가스총까지 감추고 법정에 들어가려다 적발되는 한심스런 소동을 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 명의 검사가 교대로 신문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21세기 초의 오늘날에도 공안당국의 시각은 몇 십 년 동안의 구태를 답습하는 진부한 흑백논리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북측의 주장을 열거해 놓고 “이런 말을 들은 적 있죠?”라고 질문하는 식이니 이것은 송 교수의 혐의에 대한 사실 확인이라기보다는 예단된 잣대로 그의 사상을 평가 해석하려는 무리수가 엿보이는 치졸함처럼 생각되었다. 검찰 신문에서 송 교수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인지(認知), 오길남씨 방북권유, 독일에서의 입북 사전교육 등의 혐의사실은 부인했으나, 북한 학자들과의 접촉사실과 여비 정도의 자금을 지원 받은 사실은 시인을 하였다.


 송 교수는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느냐” 검찰 신문에 “지령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라고 고쳐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북한체제의 성격규정과 관련된 질문에는 “모른다”는 답변으로 비켜가 수구 쪽의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


김형태 변호사는 신문에 앞서 “공소 사실 가운데 핵심인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 사실에 대해, 공소장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해명하라”고 요구하자, 검찰은 “북한은 노동당 규약을 무시하고 후보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며 “재판과정에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맞받아 쳤다. 송 교수는 변호인 측 신문에서 “북한이 남북학술대회를 체제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더라도 이를 계속 주도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 바로 남과 북이 계속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검찰이 남측이 북측 교수들보다 3배나 많이 참석한 학술회의 분위기를 북측의 발언만 부각, 확대시켜 회의 자체를 적화통일의 선전장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색깔 씌우기에 대한 확고한 의지표명이라고 보겠다.


예정된 두 시간이 훨씬 지난 5시 너머까지 진행된 첫날 공판은 진정한 진실의 실체를 가려내기 위한 첫 라운드에 불과하였다. 그 스스로 말하는 ‘경계인’으로서 학문적으로 집대성을 이루는 내재적 통일론마저 그 진의가 붉게 도배질 되는 참담한 현실. 손꼽아 기다려왔던 37년만의 귀국이 포승줄로써 앙갚음되어 돌아온 그의 조국! 사법당국에 대해서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유행에 한참 떨어지는 고물 장난감을 가지고 소모적인 싸움질을 하는 것 같다면 오늘날까지 활개를 치고 있는 냉전수구세력에 대한 모독이 될까?


불과 십여 년 전, 기억도 생생한 문익환 목사의 평양 방문, 임수경양의 세계청년학생축전 참석, 그리고 작가 황석영씨의 입북 사건을 되돌아본다. 그들은 한결같이 악법 중의 악법이라고 지칭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었다. 그 당시에는 앵무새 같은 제도권언론으로부터 악의적인 빨갱이로 둔갑되거나 잘해야 어리석은 감상주의자로 몰려 각성되지 못한 시민들로부터 비웃음 섞인 힐난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앞으로 나가는 법, 이제 그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의 물꼬를 튼 역사인(歷史人)으로 재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58년, 폭압적인 군사독재 시절 머나먼 이국 땅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고대하며 학문적 위업을 이룬 이 시대의 석학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삭막한 현실! 물론 그가 우리 남측의 북측에 대한 감정적인 정서, 곧 맹목적인 증오심을 감안하지 못하고 행동반경을 넓힌 것이 죄라면 죄가 되는 것이 바로 이 국가보안법에 기인한다. 순수한 학문에의 열정과 남들도 나와 같이 악의가 없으리라는 믿음 속에서 아무런 방비 없이 입국한 송 교수를 보면서 동갑내기의 심정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위에서 말한 대로 몇 년 세월이 지나면 이 사건은 한낱 희극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당장 오늘이라도 이 민족을 기만하는 국보법을 폐기하고 그를 이성과 관용으로 보듬어 안는다면 송 교수야말로 통일을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자기 몫을 다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운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참고: 이 글을 만들기 위하여 신문의 관련기사에서 관계되는 발언록들을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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