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안양시, 식민지 향수를 달래는데 30억원 낭비

1951

일제시대를 경험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한번 여쭈어 보자. 일본인 관리들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면사무소에 근무했던 조선인 하급관리들이 더 무서웠는지를. 대개 조선인 하급관리들에 의한 수난이 더욱 심했다고 회고할 것이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서울 한복판에 버티고 있던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보다도 자기 고장의 조선인 면장, 면서기, 순사 등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 조선총독부 수탈정책의 수족이었던 이들 조선인 하급관리들은 마치 지주보다 마름이 더욱 가혹한 전횡을 저지른 것과 같이 어깨에 찬 ‘완장’으로 얼마나 많은 식민지 민중들의 고혈을 빨아들였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12월 15일 안양시에서는 일제시대 면 직원들의 향수를 달래주려는 듯한 건물이 들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조선총독부 서이면(西二面) 사무소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관련된 기사를 인용해 보자.












▲12월 15일 개관한 옛 서이면 사무소 외부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논란 일던 안양 옛 서이면사무소 개관 (한겨레 2003년 12월 16일치)


경기 안양시는 일제시대 면사무소로 사용됐던 옛 서이면사무소의 복원공사를 1년여만에 끝마치고 15일부터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안양시는 1917년부터 32년 동안 면사무소로 사용됐던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전통 한옥인 ‘안양옥'(137.1평)에 대해 29억2700만원을 들여 지난해 9월부터 복원사업을 벌여 이날 개관했다.


복원된 옛 서이면사무소는 사무실과 화장실이 있는 관리동이 부속돼 있고 내부에는 서이면에 대한 관련 자료와 안양지역 현황, 당시 항일운동자료 등이 전시돼 있으며, 매주 화~일요일(오전 9시~오후 5시) 시민들에게 개방된다.


서이면사무소는 1914년 4월1일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이 합쳐지면서 서이면이란 명칭으로 지금의 호계 도서관 부근에 위치했다가 1917년 7월 중심가로 번창하는 당시의 안양리인 현재의 장소로 이전됐고, 이후 서이면이 안양면으로(1941년 10월), 안양면이 안양읍으로(1949년 8월) 승격되는 시기를 거쳤다.


그러나 서이면사무소는 건축 당시 건물 상량문에 ‘조선국을 합하여 병풍을 삼았다. 새로 관청을 서이면에 지음에 마침 천장절(일본 왕의 생일)을 만나 들보를 올린다’라고 적혀 있어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고 상량식을 일본 천황 생일날로 정해 거행한 것으로 밝혀져 친일논란을 빚었지만 2001년 1월 경기도 문화재자료 100호로 지정됐다.
안양/김기성 기자
rpqkfk@hani.co.kr












▲ 옛 서이면 내부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위 기사를 보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 보니 이 곳은 안양역 앞에 위치한 안양1번지라는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내부를 들여다보니 서이면 관련 자료라고 해봐야 당시 관보 몇 장과 지적도, 신문기사 몇 장에 그리고 당시 직원들이 사용한 직인들과 문필도구 몇 가지가 전부였다.   
서이면 사무소 복원 논란은 1999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양시가 밝힌 서이면 추진 관련 문서에 의하면 이 당시 설렁탕 집으로 쓰이고 있던 옛 서이면 사무소 복원에 대해서 일제시대 당시 서이면 사무소 관리였던 안현선, 김형욱씨 두 사람이 처음 제안한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돼서 안양시는 1917년에 만들어져 1949년까지 사용된 ‘안양시의 최초의 근대적 관공서 건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서이면 사무소 활용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상량문에는 위의 기사와 같이 ‘조선국을 합하여 병풍(藩屛:제후를 뜻함-필자 주)을 삼았다. 새로 관청을 서이면에 지음에 마침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을 만나 들보를 올린다’라고 적혀 있어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고 상량식을 일본 천황 생일날로 정해 거행한 것은 물론 조선인 면장인 조 주임과 신 서기에 대한 칭송도 들어있다.


“학문을 인도하며 농사를 과(課)하는 자취는 조(趙) 주임(主任)의 지휘를 모두 말하고, 계산을 놓고 장부를 계산하는 재주는 신(愼) 서기(書記)의 수단을 다시 칭찬한다”


처음부터 서이면 사무소 복원을 주도한 신중대 현 안양시장은 복원된 면 사무소 안에 마치 독립기념관의 임시정부 요인들의 밀랍인형을 연상시키려는 듯 당시 근무자들의 밀랍 인형까지 입체적으로 배치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대해 시민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시의회가 반발함은 물론 시의회에서 복원비에 대한 예산 승인을 백지화하면서 반대하자 시는 결국 시민단체 대표 그리고 시의회 복지환경위원회 위원장과 의원들 그리고 시민이 참여한 최종 토론회에서 시민단체가 요구한 일제 강점기의 안양지역의 일제 수탈사 자료관으로 복원키로 약속하여 결국 시의회도 복원에 대해 승인을 해 준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약속과는 달리 최초의 설계에서 밀랍인형만 빼고 거의 원안대로 복원이 이루어져 전시 중이다.












▲ 총독부 훈공자 명단에 당시 서이면장 조한구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면 천황의 생일을 맞아 올린 서이면 상량문에 언급된 조 주임은 어떤 인물일까. 1914년부터 몇 차례를 빼곤 줄곧 서이면장을 역임한 조한구(趙漢九 1883∼1965)라는 인물이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두 차례에 걸쳐 훈장을 수여한다. 관보로 본 안양 근대사(성결대학교 안양학 연구소, 2002)라는 책에 보면 그는 1930년 1월 28일과 1933년 6월 30일 두 번에 걸쳐 총독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기록이 있다. 바로 식민지 수탈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현재 안양시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아래는 안양시 사이버향토사박물관에 소개된 조한구에 대한 소개이다. 


조한구(趙漢九) (고종 20년(1833)∼1965)


행정가. 자는 장일(章日). 호는 금운(錦雲).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창강(滄江) 조속(趙速)의 10대손이며 동순(東舜)의 셋째아들.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방죽말) 271에서 출생했다. 1914년 3월 1일 시흥군 서이면(西二面)의 초대면장에 부임한 이래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 황무지인 안양건설에 진력했다.
1927년 1월 서이면(안양면의 전신) 발전을 위해 첫째 안양의 시가지를 확장하고 둘째 안양의 교육시책을 위해 모범 사숙(私塾)을 설치하여 셋째 농촌진흥을 위하여 보통농사를 보급하고 아울러 양잠·축산·임업을 적극 권장하여 서이면을 우량면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1932년 안양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고뢰 정태랑으로 부터 1만평의 토지를 기부 받아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안양역전(현 대농단지)에 건설하는데 앞장을 서 안양이 오늘날 공업도시화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안양이 관악산과 삼성산 등 산자수명하고 서울 근교라는 지리적 이점에 착안하여 1932년에는 안양천(현 삼성천)변에 석수동 수영장(현 안양유원지)을 설치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케 했고, 1936년 4월 1일에는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흑석리·신길리·상도리와 영등포읍 영등포리·당산리·양산리가 서울시 확장책에 의해 서울시에 편입되자 당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 청사를 안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안양의 각계 각층을 총 망라하여 「시흥군 청사 이전 군민대회」를 개최해 광복 후 시흥군청사가 안양(현 뉴코리아호텔 자리)으로 이전하는데 디딤돌이 되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안양금융조합장에 재직하면서 안양 경제에 일조를 하기도 하였으며, 또 군포초등학교와 안양초등학교 설립에도 힘썼다.
광복 후 1948년에는 국민회 시흥군지부 감찰부장과 시흥군보승회 조사부장을 거쳐 1949년에는 초대 안양읍장에 부임하여 격동기 안양건설에 공헌했다.
묘는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방죽말(현 안양시교육청사 자리)에 있었는데 도시화 건설로 1977년 충북 음성군으로 이장하였다
[참고문헌] 《안양시지》,《안양읍통계연보》,《안양문화》,《풍향조씨세보》,《동아일보》
http://museum.ayct.net/anyang_gd.htm


조한구에 대한 평가를 보니 ‘식민지가 조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복거일과 김완섭이 위의 글을 쓰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글만 보자면 오늘의 안양 발전은 일제시대 면장을 지낸 조한구의 노고가 대단히 컸다는 것이다. 안양시는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1999년 맨 처음 서이면 사무소 복원을 제안한 안현선, 김형욱 두 사람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조한구와 신서기에 대한 추앙 내지 자신들 역시 오늘의 안양 발전의 주역임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건물의 복원을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될 대부분의 안양시민과 국민들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할까. 이미 투입된  약 30억 원의 시비와 앞으로 추가 매입과 확장 공사를 위해 100억 원의 시비가 더 들어간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떠할까.


이러한 식민지 향수를 불러일으킬 건물 복원에 처음부터 반대운동을 벌여온 이형진씨(항일애국지사 우·해기념사업회 회장,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는 “당초 이러한 건물 복원이 문제가 많으므로 식민지 수탈의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알려주는 공간으로 만들 것을 여러 차례 제안하였고, 시장도 그렇게 구두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맞닿아 있으면서 곧 이전할 안양1동사무소와 함께 복원 공간을 더욱 확장하도록 하였는데 막상 개관된 모습을 보니 흥분을 감출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형진씨의 부친 이재현(李在賢 1917. 2. 2 ∼1997. 2. 24: 독립장)선생은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이재현 선생의 친형인 이재천(李在天 1913. 5. 10 ∼ ?: 애국장)선생 역시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임시 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1940년 8월 18일 석방된 기록이 있으나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이 두 항일지사 형제분의 동상과 조형물은 올해 3.1절 평촌 자유공원에 건립되었다.


한편, 이형진씨는 상량문에서 조한구와 함께 언급된 신 서기에 대해서도 그 후손이 현재 일제 시대에 취득한 막대한 재력의 소유자이면서 안양지역의 최고 유력한 인사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자료를 계속 수집 중이며 상황에 따라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 신중대 현 안양시장
20세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요즘 여기 저기서 한국판 홀로코스트격의 기념·박물관을 짓자는 운동이 활동하다. 평화박물관, 인권박물관, 일본군위안부 박물관, 이한열 박물관 등. 이러한 운동을 펼치는 분들은 항상 재원 마련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에 비한다면 일제시대 조선인 관료들의 향수를 달래는 역할 이외는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서이면 사무소 복원에 들어간 돈이야말로 혈세가 아니고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오늘날 발전된 도시 안양은 일제시대 관료들의 몫이 아닌 민중들의 몫임을 안양시장 신중대 는 명심해야 한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