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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36년’ 잊은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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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에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이 동아시아를 주름 지우더니, 독도우표 발행을 향한 아닌 밤중의 홍두깨가 동해의 파고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한 두번도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다. 교과서 왜곡으로, 한국 침략이 정당했다는 궤변으로, 침탈이 한국의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경제논리로, 그리고 흑룡회(黑龍會)의 흉포를 닮은 정객들의 신사순방과 독도 영유권을 번갈아 들먹이며 우리 민족의 주체성과 생존권을 야금야금 갉아왔다.


이럴 즈음 민족문제연구소의 5개년 지속사업인 ‘친일인명사전’ 3차년도 예산 5억원을 전면 삭감한 데 이어 김희선 의원 등 여야 의원 154명 공동 발의의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을 여소야대 국회와 관련 행정부처가 모처럼 장단을 맞춰 유산시켰다. 그리곤 송병준의 후손은 일제 침탈 앞잡이로 약취한 선조의 재산을 찾겠다고 나섰다.


지금 내가 딛고 선 땅이 대한민국이 아닌 내지(內地), 서울이 아닌 ‘게이조(京城)’가 아닌가 멍청하게 나목이 파리하게 떨며 서있는 앞산을 바라본다. 필시 저들이 대한민국 국록을 받는 공직자가 아닌 총독부 관리거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아닌 일본 중의원(衆議院) 의원은 아닐진대 어찌 이런 해괴한 현상이 저 장엄한 여의도의 돔에서 경호를 받으며 엄숙하게 거행될 수 있단 말인가.


-친일인명사전 예산 삭감-


‘친일인명사전’ 예산을 깎아 출신 지역구 선심으로 전용시켰대도 그걸 따질 방도가 없는 그 특권, 온갖 부정부패에도 쇠고랑을 못 차도록 작당하던 그 복마전에서 ‘조선사편수회 간부’나 ‘창씨개명을 언론을 통해 주도적으로 선전한 자’를 친일 행위자에서 삭제하는 등 ‘친일의 성역’까지 조성했다. 역대 대통령조차도 투옥 당했고, 현직 대통령이 단군이래 처음으로 한껏 인신 공격당하는 성역 없는 이 대명천지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죄악인 민족과 국가를 배반한 전쟁범죄에 성역을 설정하는 파렴치가 민의의 대변기관인 국회에서 떳떳하게 자행되는 걸 보고 안중근 의사나 백범 선생은 뭐라 하실까. 그렇게 거물 친일파는 빼고 조무래기들이나 거론하도록 만든 누더기 조각이나마도 안심이 안되는지 결국은 슬그머니 법률을 방기시켜 버렸다. 그럴 바에는 애시당초 제정 못하게 막을 것이지 헌 걸레짝으로 찢어발겨서 초를 친 것은 김을 빼고 또 빼도 행여나 통과될까 반대파 의원과 일부 관련부처가 이심전심으로 얼른 생뚱한 구실을 부쳐 가로막아버린 소이연이다.


이러고도 우리가 일본을 나무랄 자격이 있는가. 고구려사의 실종, 덕수궁에 들어설 어느 대사관저, 이라크 파병 등등이 결국은 친일파 미청산의 사생아들 아닌가. 이런 판국에 “정부는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코자 하는 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안의 취지에 공감”하며, “법안이 통과되면 정부는 이를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당여지사에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친일진상규명에) 나설 게 아니라 학계로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연막을 쳤다. 그럼 왜 ‘친일인명사전’ 예산은 깎았을까?


이러고도 정치개혁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까. 물갈이의 제1차 대상은 친일파와 그 직·간접적인 비호세력이다. 55년 간 속아온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잔꾀를 보고싶지 않다. 곳곳에 세워진 친일파 기념관, 각종 사업과 축제와 포상들을 이제는 제발 더 보고싶지 않다. 법안은 막을 수는 있지만 친일파 청산을 위한 국민의 열기는 끌 수 없다.


-민초의 힘으로 과제 완수를-


‘오마이뉴스’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네티즌의 힘으로!’ 캠페인을 시작한지 이틀만에 8천만원이 넘는 쾌재를 올리고 있다. 광복절까지 계속될 이 캠페인은 정부가 아닌 민초의 힘으로 민족사의 과제를 기필코 풀게 할 기세다.


일제 치하에 희생당한 혼령들의 한을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말을 해다오. 그래서 효선이와 미선이를 애도하는 심경으로, 한강에 독극물을 방출한 이방인에게 실형을 내린 김재환 판사의 용기로 이 땅을 충만케 하리라. 이 열기로 위기를 맞고있는 이 법안을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완벽하게 보완하여 제정할 것을, 그리고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을 부활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임헌영 /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04년 01월 12일치
http://www.khan.co.kr/news/artview.html?artid=200401111857341&code=9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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