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공조로 ‘협상통일’ 향해 나아가야”
=[원로 연속인터뷰]③ 강만길=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71·상지대 총장)를 만났다. 평생을 역사 연구와 ‘분단시대’ 극복을 위해 살아온 노학자를 모시고 역사와 민족, 통일, 교육 등에 대해 얘기했다. 인터뷰는 정태헌 고려대교수(한국사학과)가 맡았다. ▲정태헌=칠순이 넘으셨는데도 대학총장으로, 그리고 남북학술교류의 산파역으로 평양을 다섯 차례나 오가시는 등 오히려 사회활동이 더 활발하십니다. ▲강만길=나이가 많아질수록 욕심을 버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많이 움직이고 적게 먹는 것이다. 매일 아침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속보로 걷는 게 내 운동의 전부다. ▲정태헌=교수로 32년, 대학총장으로 3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요. ▲강만길=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부(富)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대학을 설립한 반면 우리는 대학을 경영차원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대학 수만 불어났을 뿐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은 없었다. 그래서 국립, 사립을 막론하고 세계적 수준의 대학이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과열된 대학입시 때문에 고교 공교육이 무너져 버렸다. 현행 교육문제는 고등학교는 평준화해 놓고 대학을 평준화하지 않은 데 있다. 입시지옥과 공교육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대학을 평준화해야 한다. ▲정태헌=어떤 방식으로 대학을 평준화한다는 말씀입니까. ▲강만길=우리 사립대는 대부분 등록금으로 꾸려가는 데 반해 국립대는 거의가 국고로 운영된다. 내가 맡고 있는 사립대의 경우 국고지원율은 1%에 불과하다. 국립대의 취지는 가난한 사람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국립대에 가려는 학생도 막대한 사교육비를 부담하는 형편 아닌가. 국립과 사립의 구분, 지방과 중앙의 차이를 차차 없애 국고 지원을 똑같이 해야 한다. 그렇게되면 여건이 열악한 사립대가 재정·시설등모든 면에서 균형있게 발전할 것이며평준화도 이루질 것이다.모든 대학을평준화시켜 학교 특성에 따라,학생 취향에 따라 진학하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 ▲정태헌=최근 일본 사회의 극우적 분위기가 더 심해지는 가운데 올해 초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다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강만길=신사참배는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전쟁 전범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를 참배하는 것은 전범을 전쟁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총리의 전범자 참배는 일본인 2세들을 침략주의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2세를 침략주의자로 만들고서는 결코 문명국 대접을 받을 수 없다. 또 하나, 일본의 우경화는 한반도의 통일 기운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만약 중국, 러시아쪽으로 치우쳐 통일되면 일본은 고립된다. 그럴 때 일본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우경화·친미화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우경화는 동아시아 전체의 발전 방향과 연관성이 있다. ▲정태헌=일본만 탓할 게 아닌가 봅니다. 지난해말 우리 국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친일진상규명법 통과도 불발됐습니다. ▲강만길=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나라에서 처음 세워지는 정권은 대개 민족해방운동세력이 집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한은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국내 친일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반민족행위자를 숙청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뭐가 옳고 그른지 분간이 안되고 있다. 더구나 반민족적행위자들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북·반민주로 가고 있다. 지금은 사실 실정법상의 숙청은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숙청은 해야 한다. 그래야 민족사의 옳고 그른 노선을 구분할 수 있다. ▲정태헌=이런 상황에서 중국마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강탈하려 하고 있습니다. 패권주의로 기울어지는 듯한 중국의 의도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요. ▲강만길=역시 동아시아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지난 세기의 한반도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미국, 소련을 세력권으로 한 대립의 시기였다면 21세기에는 남북한 공조를 통해 통일의 움직임이 움트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반도가 일본과 미국의 영향으로 통일된다면 만주가 위협받을 것이 ▲정태헌=이런 상황에서 북·미, 한·미, 남북 관계의 기본틀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른바 북핵 문제가 제기된 배경이 무엇이고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풀어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강만길=먼저 특수한 한·미관계는 정상적 국제관계로 바꿔야 한다. 지난해 촛불시위는 이를 돌리기 위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우리 땅에 평화통일의 기운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그러자 미국은 남북이 미국의 세력권을 벗어나는 통일로 연결될까 우려해 북을 압박하는 것이다. 북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남한에 대한 압력이기도 하다. 미국의 압박이 들어가면 북은 체제를 유지하면서 통일을 이루려고 할 것이고, 이러다 보면 미국과 대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미·일 공조체제와 조·중·러 공조체제가 대립한 상태에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 통일은 남북 공조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데, 남·북공조와 한·미·일 공조체제는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측면이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에 이런 점이 보였다. 앞으로 현명하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미 공조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남북공조를 서서히 강화해야 한다. ▲정태헌=총장님은 1970년대부터 분단극복사학을 주창하셨고 사학계가 분단극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통일운동에 앞장서고 계신데, 통일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강만길=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하는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 세기 분단국 중 베트남은 전쟁통일, 독일은 흡수통일을 했다. 우리는 어느 쪽도 못했다. 현재 남북 당국자 모두 전쟁 및 흡수 통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방식의 통일을 이뤄야 한다. 나는 이를 협상통일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첫째는 남북이 화해·협력을 해야 하고, 둘째는 모든 부분에서 공조를 해야 한다. 그 다음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또 한반도의 통일은 미·일, 중·러에 치우치지 않은 제3의 위치에서 이뤄져야 한다. 20세기에는 지정학적 요인을 들어 영세중립 통일론이 거론됐다. 그러나 중립화가 되면 지역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다. 지금 세계는 지역 협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쪽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일본 등과 함께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루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태헌=이제 학술교류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지난해 설립된 남북학술교류협회라는 다리를 밟고 지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평생 주장해오신 문제의식을 현실화시키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남북역사학자들의 공동학술회의는 이제까지 세차례 열렸고 금년부터는 매년 두차례씩 정례화하는 수준으로 나아갔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일 아닙니까. ▲강만길=지금까지 남북 학술교류는 대개 중국을 통해 이뤄졌는데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공동학술대회는 우리 땅에서 학술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남쪽 사람이 평양에서 가서 만나는 게 주류였지만, 앞으로는 북한 학자들을 남쪽에서 만날 날이 멀지 않았다. ▲정태헌=총장님의 역사학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진보적 낙관주의자입니다. 정말 역사는 진보합니까. ▲강만길=역사가 진보발전하느냐는 문제는 우리가 왜 사는가와 통한다. 역사는 인간 이상(理想)을 현실화시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을 더 낫게 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쌓여서 만들어진다. 물론 역사가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긴 눈으로 보면 한걸음 한걸음 인간의 이상사회를 향해 나아간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서는 역사 발전을 허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데, 물론 근대주의에 도취해 인간 능력을 과대평가한 데 대한 반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증진하고 인간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다. ▲정태헌=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보십니까. 지난 정부에 비해 남북관계는 오히려 후퇴한 감마저 있는데요. ▲강만길=노무현 정부는 정치생활 경험이 짧다. 그래서 지난 1년간 경험 미숙에 따른 상당한 혼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대통령도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이다. 2년째부터는 차차 안정될 것이다. 대북정책은 민족문제를 풀어가려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의 6·15선언을 이어가려는 철학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 정부가 남북화해의 길을 열었다면, 이번 정부는 남북 공조를 이뤄야 한다. ▲정태헌=우리 민족사회에 꼭 전해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강만길=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역사관, 민족관, 세계관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한다. 똑같으면 그 사회는 정체하고 멸망한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통일로 나아가고 있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역사관, 민족관이 자신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21세기를 담당해야 할 젊의 세대의 역사관, 민족관이 자기와 같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불행한 일이다. 〈원주/정리 조운찬기자〉 -강만길총장 연보- ▲1933년 경남 마산 출생 ▲59년 고려대 사학과 졸업 ▲67~99년 고려대 사학과 교수 ▲2001년 3월~현재 상지대 총장 ▲현 고려대 명예교수, 청명문화재단 이사장, 월간 ‘민족21’ 발행인 ▲저서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등 다수
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한반도가 미·일에 가깝게 통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21세기 동아시아 정치상황의 변화는 한반도 통일에 달려 있다.
최종 편집: 2004년 01월 11일 14: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