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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 이사장 겸 연구소 고문 허 웅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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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뫼 허 웅 선생님 2004년 1월 26일, 86살로 돌아가심     ©한글학회


한글운동의 큰 어른이셨던 눈뫼 허 웅 한글학회 이사장님께서 2004년 1월 26일 오전 10시 13분 지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누린 나이는 86살. 허 웅 선생께서는 한글은 물론 친일청산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주시면서 민족문제연구소 고문으로 오랫동안 연구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모임이 크든 작든 선생께서는 연구소 행사에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시면 항상 자리를 함께 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학창시절부터 허 웅 선생의 모셨던 한글운동가 이봉원 회원(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께서 고인의 그리며 보낸 글을 여기 싣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영안실 33호실(전화: 3010-2000~2411, 3010-2293)입니다.


■ 영결식: 2004년 1월 30일 오전 8시(서울아산병원 영안실 33호)
■ 안장식: 2004년 1월 30일 오시
■ 묻힐 곳: 모란공원 묘지(경기 남양주시 화도면 월산리)


    ◇ 아들: 허 황(울산대 교수), 허원욱(건국대 교수)-안은경
    ◇ 딸:  허혜련-이수레, 허혜숙-조규식


 


아,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시다니요?
 끝내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아직도 우리 한말글 앞에는 장애물이 저렇게나 많이 쌓여 있는데,
 그것을 말끔히 치워버리지도 못한 지금,
 늘 앞장서 저희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셨던 선생님께서
 그냥 가시면 저희는 어떡합니까?


 설 연휴 하루 전 혹시나 해서, 김계곤, 이현복 두 부회장님을 모시고 분당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가 마지막 선생님의 모습을 뵙고자 하였지만, 아드님께서 연휴 뒤에 뵙는 게 낫겠다 하여, 그 때 못 뵙고 돌아온 것이 정말 한이 됩니다. 그래도 못난 후학들을 배려하셔서 설 연휴가 끝나기를 기다리셨군요. 하루라도 빨리 먼저 가신 사모님을 만나고 싶으셨을 텐데도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편찮으시어 학회에도 자주 못 나오신다는 말을 듣고, 지난해 9월 수지 자택으로 선생님을 뵈러 갔던 일과 지난해 10월 한글날 학회 행사장에서 뵈온 것이, 이승에서 선생님을 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 날 오후 학회가 주최한 마지막 ‘온누리 한말글이름 큰잔치’ 시상식에서, 선생님께선 특별히 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시고는, 30여 년 전 저를 처음 만나셨을 때를 상기하시고 나서, 국어운동과 한말글이름짓기 운동을 대학 안에서 처음 시작한 저에 관해 말씀하시며, 여러 사람 앞에서 과분하게 저를 추켜세우셨습니다.
 그것이 선생님을 뵈온 마지막입니다. 저는 그토록 선생님한테 끝까지 사랑만 받고, 선생님 뜻은 제대로 이어가질 못하고 있는 못난이 제자가 됐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뵙기로는, 제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에 입학한 1966년 11월이었습니다. 몇 명의 학우와 함께 선생님 연구실로 가서, 아무래도 대학 안에서 국어운동과 한글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처음에는 ‘이렇게 뜻이 맞는 학생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연구활동이나 하면 어떡했냐?’고 하셨는데, 그 뒤 저희 동아리(국어운동학생회)가 언론에 크게 소개되고, 고운이름자랑하기 행사 또한 더불어 유명해지자, 선생님께선 흐믓해 하셨고, 지도교수로서도 적극적인 후원자가 돼 주셨지요. 지도교수 취임 승낙서에 사용하셨던 한자 도장도 그것이 마지막, 그 뒤로는 언제나 한글 도장만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67년 3월 문리대 한 강의실에서 ‘국어운동햇불점화식’을 했을 때, 선생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글만쓰기 추세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어느 누구도 거꾸로 돌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씀이 제게도 신념이 돼, 그 뒤 어떠한 방해꾼이나 장애물이 있어도 언제나 그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하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심리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선생님의 직제자라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제가 추구하는 정신적 학문에서는 선생님이 언제나 저의 진짜 스승이셨습니다. 국어운동과 한글전용에 관한 강연을 위해 선생님을 모시고 지방으로 다닌 적도 여러 번이었고, 회원들과 도봉산으로 놀러갈 때 선생님을 모신 적도 있습니다. 졸업 때는 전공 스승과는 함께 사진을 찍지 않으면서, 선생님과는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선생님은 학문으로만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도 뛰어나셔서, 많은 젊은이한테서 존경을 받는 참 어른이셨습니다. 제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업 주관)의 고문직을 기꺼이 맡아 주셨고, 몇 번 저희 모임에 오셔서 친일파 청산의 당위성에 관해 연설하셨습니다. 공식석상에서 선생님의 마지막 강연이 된, 지난해 한글날 학회 행사장에서도 선생님께서는 어느 때보다 한글사랑에 이어 친일파 청산을 절절히 역설하셨습니다. 다행히 올 연초 전국의 누리사람(네티즌)들이 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업에 보태라고 6억여 원의 성금을 모아 주는 큰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도 선생님의 간절한 유지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밖에도 군부 독재나 전교조 문제 같은 것이 사회적 논란거리가 됐을 때, 선생님께선 늘 젊은 사람들 편에 서서 진보적인 판단을 내려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도 그런 선생님을 뵈며, ‘역시 큰 어른은 다르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 곁을 떠나시기 직전에 이처럼 용솟음치는 겨레의 힘을 지켜보실 수 있었던 것이 -비록 중환자실에 계셨을지라도- 제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여겨지고, 그나마 다소 위안이 됩니다. 이제는 선생님의 평생 과업이었던 한말글운동도 이처럼 역사의 소명을 깨닫는 현명한 누리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저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 선생님께서 뿌리신 씨앗이 정보화시대를 맞아 그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을 추억하기에는 몇 날 며칠이 계속 돼도 끝이 나질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2001년 11월에 사모님을 먼저 보내시고, 그 쓸쓸하고 애절한 심정을 시로 엮어 작은책으로 내셨지요. 사모님 가신 다음 해 한글날 선생님께선 ‘먼저 떠난 아내 백 금석의 추억으로 쓴, 일곱 달 동안의 일기’를 ‘못 잊어 못 잊어서’란 제목으로 내시고, 그 책 한 권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선생님께선 제가 사모님께서 돌아가시기 꼭 1년 전 한글날에 선생님 댁에 가서 선생님과 사모님의 다정하신 일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었는데, 그 떄 찍은 사모님 사진이 어찌나 표정이 좋은지 모르시겠다며, 선생님은 그것을 크게 확대하여 벽에 걸어 놓으셨고, 그 앞에서 마치 생존해 계신 분에게 하는 것처럼, “여보, 이 군이 왔네.” 하시며 목이 또 메이셨지요. 사모님 돌아가셨을 때, 선생님은 영안실에서 제 손을 꼭 잡으시며 “밥도 할 수 있고, 빨래도 할 자신이 있지만, 외로울 때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그것만은 자신이 없네.” 하시던 그 때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닭곰 먹고 싶어 / 첫 번째 실패하고 / 두 번째 또 고아서 / 되끓이다 태워    버려 / 세 번째 다시 해 놓곤 / 공양주 생각한다.
 이 시를 읽고 선생님의 애간장 끊는 심정이 눈에 밟혀 집사람과 같이 닭죽을 쒀 갖고 반포 댁으로 찾아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젠 선생님께서 그렇게나 사랑했고 그리워하셨던 사모님을 만나시게 됐습니다. 만나셔서 그간의 심정을 표현한 시들을 한 구절씩 읽어 주시며, 두 해 남짓 못 누리셨던 행복한 시간을 다시 찾으십시오. 


 하지만 선생님, 정말 지금 가시면 안됩니다.
 저희들이 우리 공동의 적들과 싸워 나가는 데 아직은 선생님의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천군만마의 힘이 될 수 있는 말씀 한 마디 남기시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가실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 무어라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살아갈 말씀 한 마디를요!
 “………….”
 잘 알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말씀 고이 가슴에 담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그 고귀한 뜻이 온 누리에 가득 퍼지도록, 이 못난 제자 다른 동지들과 함께 힘껏 애쓰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시옵소서.


 2004년 1월 26일 오전
선생님 부음을 듣고
제자 이 봉원 울며 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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